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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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충암 김정 "산초백두도"

새샘 2018. 11. 7. 20:32

가지에 앉은 새를 그린 절지화조 화풍을 대표하는 그림 산초백두도

김정, 산초백두도, 종이에 담채, 32.1x21.7cm 국립제주박물관

 

조선 초기의 그림 중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여럿일 수 있는데, 그 중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이 큰 전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그림이 대량으로 망실되었을 사건도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주류 세력이었던 문인들이 크게 숙청을 당하는 사화였다고 여겨진다.

 

사화는 1498년부터 1545년까지 50년 남짓한 사이에 4번에 걸쳐 일어났다.

한번 사화가 일어나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문인들이 연루돼 떼죽음을 당하고 귀양을 갔다.

당연히 연루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이 와중에 집안의 물건이 온전히 남아 있을 리가 없으며 글과 시와 그림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김정 金(1486~1521)은 연산군과 중종 때 순창 군수와 형조 판서까지 지낸 문신이다.

절조가 높고 행동거지가 올발라 문인들이 많이 따랐을 뿐 아니라 시로도 유명했다.

그는 한때 정계 은퇴를 꿈꿨으나 신진 사림을 대표하는 정암 조광조(1482~1519)의 간곡한 부탁으로 개혁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훈국 세력과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결국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젊디젊은 36세 나이에 희생되었다.

 

귀양과 죽음으로 인해 그의 글과 시는 당연히 흩어졌다.

후손들이 문집을 낸 것은 30년 뒤의 일로서 아마도 이때 함께 흩어져 버린 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그림이 오늘날 한 점 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화조화 花鳥畵로서 가시나무 가지에 새 두 마리가 고즈넉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산초백두도 山椒白頭圖>이다.

가시가 삐죽삐죽한 산초나뭇가지에 한 마리는 고개를 깃털 속에 파묻고 있으며 다른 한 마리는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새들 주변에 푸르스름한 담채를 엷게 칠해 밤의 정경을 나타내었다.

 

<산초백두도>조선 초기의 화조화 중에 유일하게 그린 화가의 이름이 전하는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그림 속에 관서나 인장이 전혀 없지만, 18세기 대컬렉터이자 감식가로 유명한 김광국 金國(1727~1797)이 이 그림을 김정 그림이라고 밝혀 놓은 글이 있다.

그는 자신이 모은 그림에는 반드시 글을 적어 함께 표구를 해 두었는데, 여기에서 이 그림을 김정 그림으로 유일하게 전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충암 김 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해와 별과 같이 빛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공에게 있어 서화는 비록 한가로운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삼절이라 불리우면서도 우리나라의 풍속이 어두워 그다지 숭모하고 아낄 줄 몰랐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많이 전하지 못하고 오직 이 한 조각 종이가 난리 속에 보존되어 지금까지 남아 전하니 그 보배로운 가치야 어찌 연성 용천에 비길 뿐이겠는가.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이는 그 품격만 취할 것이 아니라 또한 이로 인해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인즉 더욱더 어진 이를 우러러보는 일에 일조가 될 것이다. 1780년 동짓날 경주인 김광국이 삼가 쓰다."

 

여기에서 '난리 속에 보존되었다'는 구절은 김정의 불행한 운명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 속의 삼절이란 말은 그와 시와 글씨가 이름난 외에 예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탓인지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김광국 소장의 그림 외에 두 점이 더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조선 초기의 화조화에 보이는 두 가지 유형 가운데 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그린 유형에 속한다.

가지에 앉은 새를 그린 절지화조 折枝花鳥 화풍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이런 스타일은 이후 조선 중기에도 전해져 가지에 앉아 잠들어 있는 새나 혹은 가지를 중심으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구도로 발전한다.

또 다른 스타일은 물가나 계곡 주변에 바위나 절벽을 배경으로 새가 그려진 것이다.

이런 스타일을 편경片景화조화라고 부른다.

 

그림에 화원 그림과 같은 기교는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얌전한 필치로 간결하게 새의 모습을 그렸다.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는 가시가 무성한 것으로 보아 산초나무로 여겨진다.

새는 머리와 뺨에 하얀 반점 같은 문양이 있어 할미새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 이를 백두조 白頭鳥라고 하며 산초나무에 즐겨 앉는다.

 

산초나무에 앉는 백두조는 화가이자 시인인 김정의 눈에만 들어온 것은 아닌 듯하다.

그 무렵의 문인들도 눈여겨본 것이다.

조선 초기의 대시인 서거정 徐居正(1420~1488)은 "내 머리가 흰 것은 시름 때문인데, 너는 시름이 얼마나 되길래 흰 머리가 됐느냐(아자인수두백진 我自因愁頭白盡 여수기허능백두 汝愁幾許能白頭)"하고 읊은 적이 있다.

새의 흰 머리를 시름에 겨워 하얗게 변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의 유몽인 柳夢寅(1559~1623)도 이 새가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시를 읊었는데 "가시나무에 살면 찔리기는 하지만 높이 날아 매에 잡아먹힐 걱정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어려운 처지 속에 안분지족과 부귀영화에 뒤따르는 위험을 빗대 노래한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문인들은 새 한 마리도 상징적으로 보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묘사화에 희생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정의 눈에 비친 할미새와 산초나무 역시 그랬을 것이다.

가시나무에 깃들어 자는 새의 평안은 이상 사회를 실천해 가는 정치 역정 속에 목숨까지 내놓게 되는 그의 생애에 견주어 어디쯤의 심경을 그린 것일까요.

 

※김정 金淨(1486~1521)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대시인으로 자는 원충 元沖, 호는 충암 沖庵 또는 고봉 孤峯. 1507년에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 순창 군수 시절에는 중종의 폐비 복원을 상소하다 파직 당했다. 이로 인해 한때 정계를 떠나려 했으나 친구인 조광조의 설득으로 관직에 나아가 함께 개혁 정치를 펴다 결국 사화에 희생되고 말았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주모자 중 한 사람인 남곤(1471~1527)과는 다음과 같은 젊은 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그가 남곤이 손에 넣은 <망천도>에 시를 써 준 적이 있다. 이때 술에 취해 잠든 자신을 깨운 남곤을 보고 '어떤 젊은 놈이 나의 단잠을 깨우느냐'하고 남곤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금산에서 진도로 그리고 제주로 유배된 끝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 그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당시부터 매우 희귀했는데, 특이하게도 1780년 중국에 간 연암 박지원은 베이징 시장에 나와 있는 한 화첩 속에서 김정의 화조화 그림 한 점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 글은 윤철규 지음,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컬처북스,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11. 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