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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이 아닌 중국 요하 서쪽의 난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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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이 아닌 중국 요하 서쪽의 난하 동부 연안에 있었다

새샘 2018. 11. 15. 11:18

한국 고대사 특히 고조선 연구에 있어 핵심 쟁점 중 하나가 바로 한사군 좀더 구체적으로 낙랑군의 위치이다. 한국 고대사학계의 통설은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 등은 같은 지역에 존재했고 시간적으로 전후관계에 있던 정치세력으로 인식해 왔으며, 그 지역은 바로 한반도 북부의 평양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윤내현 교수는 문헌 연구 및 고고학 자료 연구를 통하여 위와 같은 한국 고대사학계의 통설을 부정하면서 고조선 강역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의 난하 동부 연안에서 한반도 전체에 이르며, 한반도의 청천강 이북 지역은 고조선 직접 통치 지역이었고, 청천강 이남 지역은 고조선 거수국인 한韓(일반적으로 삼한三韓이라 부르지만 한이 옳은 명칭)에 의한 간접 통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한사군의 낙랑군은 오늘날 요하 서쪽의 난하 동부 연안 지역인 고조선 서부 변경에 위치하고 있었고, 당시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에는 고조선 거수국이었다가 독립한 최씨낙랑국이 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 경 고조선의 강역 및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의 위치>

 

서한(전한) 무제가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했음은 중국 『한서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한사군에 대해 그동안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한강 이북의 한반도에서 만주 남부 지역에 걸쳐서 위치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의 위치는 오늘날 대동강 유역으로 원래 고조선이 위치한 지방이었던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윤내현 교수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오늘날 발해 북안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변에 있었던 기자국 즉 기자조선의 정권을 탈취한 후 고조선 서부를 잠식해 세력을 키워 그 영역이 대체로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에서 요하에 조금 못 미치는 지역에 이르고 고조선 영역 전체의 절반쯤 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한사군은 오늘날 요하 서쪽에 위치했었고 낙랑군 또한 그 지역 안에 있었음은 당연하다.

 

『한서漢書』「지리지」에는 낙랑군에는 조선朝鮮, 패수浿水, 수성遂城, 대방帶方 등 25개 현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 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그 위치가 확인된다면 대체적인 낙랑군의 영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25개 현 가운데 조선현과 수성현 등 2개 현의 위치가 분명하게 확된다. 조선현에 대한 응소의 주석과 『위서魏書』「지형지」<평주>조의 조선현 주석에서 조선현은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랑군에 속해 있었고, 그 위치도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 어느 시기에서든 조선현의 위치를 확인해낸다면 그곳이 바로 서한시대의 조선현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집해』에 따르면 조선 지역에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의 세 지류가 있는 열수洌水라는 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의 세 지류가 있는 열수를 확인해낸다면 그 지역이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현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난하는 유수라고도 불렸으므로 『수경주』「유수」조를 보면 유수에는 습여수, 무열수, 용선수라는 지류가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습수는 습여수, 열수는 무열수, 산수는 용선수의 약칭이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은 『사기색은』에서 조선의 명칭에 대해 선의 음은 선仙인데 산수汕水가 있어서 취했다는 기록에 따라 선鮮과 산汕은 통용되었으므로 용선수의 약칭이 산수가 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습수, 열수, 산수의 세 지류를 가진 열수는 오늘날 난하의 본류나 그 지류였음을 알 수 있으니 결국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오늘날 난하 유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조선현의 위치는 수성현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진서』「지리지」<낙랑군>조의 수성현에 대한 주석에서 '진秦이 축조한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장성의 동단이 바로 수성현이 된다. 수성현과 조선현은 모두 낙랑군에 속해 있으므로 수성현에서 머지않은 곳에 조선현이 있었을 것이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한 지역이 낙랑군이 되는 것이다.

 

진장성의 동단에 대한 기록은『사기』「몽염열전」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몽염에 의해 진장성 이른바 만리장성이 축조되었으며 그것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한 시대의 요동은 어느 지역이었을까? 요동은 요수의 동북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당시의 요수는 오늘날 요하가 아니었고,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요동은 오늘날 요하 동북부 지역이 아니라 난하 동북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당시 요동이 오늘날 난하 동북부 지역이었음은 다음과 같은『사기』「진시황본기」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진제국의 2세 황제가 대신들과 함께 동북부의 군현을 순행하면서 갈석산에 비석과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에 대해 사마천은 대신들이 요동에 다녀왔다고 적었다. 이는 ·한 시대의 요동이 갈석산이 있는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갈석산은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산 이름으로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위치하는 창려현의 갈석산으로서 난하 하류의 동부 연안에 있다.

 

이로써 오늘날 난하 동북부 지역이 진·한 시대의 요동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진장성의 동단은 난하 하류 동부 연안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장성은 진제국에 의해 완전히 신축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인 전국시대에 있었던 여러 나라의 장성이 보수· 연결되어 완성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진장성의 동단은 원래 연장성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사기』「흉노열전」,『위서』「지형지」<영주>조,『진서』「지리지」<평주>조,『후한서』「원소·유표열전」등의 기록을 연결해 보면 진장성의 동단인 양평이 있었던 요동군은 오늘날 요하 동북쪽이 아니라 난하 동북쪽이었음을 알게 된다.

 

다소 후대의 기록인 당시대에 편찬된『통전』에 당시의 노룡현에 대해 주석하기를 그곳은 한시대의 비여현 지역인데 갈석산이 있고 진晉의『태강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진장성의 축조가 시작된 곳이라고 했으므로 진장성의 동단이었던 양평은 갈석산 지역이었거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염철론』「험고」편에는 연나라의 국경이 갈석과 요수(오늘날 난하)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진제국의 동북부 국경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동북부 국경과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연장성과 진장성은 연나라와 진제국의 동북부 국경선 위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한의 동북부 국경이 이전 시대인 진제국의 동북부 국경보다 동쪽으로 이동한 일이 없으므로 전국시대 연나라와 진제국의 동북부 국경에 위치했던 갈석은 서한과 위만조선의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했던 낙랑군은 갈석의 동쪽 지역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 난하 동부 연안에 있는 창려현의 갈석은 낙랑군의 서남부 경계 경계에 위치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한서』「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가연지전>의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이며 이 표현은 갈석이 한사군 지역의 서쪽 경계에 위치했음을 전해준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 한사군의 낙랑군은 한반도의 북부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동부 연안에 위치했으며 창려현의 갈석이 그 서쪽 경계였다는 사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낙랑군은 위만조선 강역의 지리적 중심지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한과의 접경 지역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낙랑군에 속해 있었던 조선현에 알아보자.『한서』「지리지」<낙랑군>조에서 조선현에 대한 주석에서 서주의 무왕이 기자를 봉했던 곳이며,『진서』「지리지」<낙랑군>조의 조선현 주석에도 서주가 기자를 봉했던 땅이라고 했다. 이런 기록에 따르면 상 왕실의 후예였던 기자가 동북 방면으로 이동해 한때 정착했다고 전하는 조선은 바로 이 낙랑군의 조선현 지역이었음을 알게 된다. 먼저 알아본 낙랑군 위치에 대한 결과와 종합하면 한사군의 조선현 지역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는『사기』「조선열전」에 전국시대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변경 초소인 장새를 축조했다는 기록과,삼국지』「동이전」<한전>의 주석으로 실린『위략』에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를 파견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다. 이 두 기록이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의 이론이 없지만, 이 두 기록을 대조해보면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사기』에는 조선을 복속시켰다고 했고『위략』에서는 조선의 서방 2,000여 리를 빼앗았고 한 것이 그것으로서,사기』의 조선과『위략』의 조선은 서로 다른 조선을 지칭한 것이다. 즉 연나라에 복속된 조선은 위만조선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이 된 지역이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한 것이며, 연나라가 복속시킨 조선은 연나라에게 빼앗긴 고조선 땅인 서방 2,000여 리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연나라가 빼앗은 땅이 2,000여 리였다는 표현은 실제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중국어에서 '넓다'는 뜻을 지녔던 것으로 연나라가 넓은 땅을 빼앗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현의 위치가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매우 근접된 지역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에는『위서』「지형지」<평주>조 '북평군' 기록과『수서』「지리지」<북평군>조의 수시대의 북평군 노룡현 주석, 그리고『수경주』「유수」조의 노룡현 주석 등이 있다.

 

한국 사학계가 알고 있는 낙랑의 멸망 연대인 서기 313년은 한사군의 낙랑군을 말하는 것이다. 즉『삼국사기』「고구려본기」<미천왕 14년(서기 313)>조의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쳐서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 지역에서 축출되었다고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 지역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으므로, 이 기록은 고구려가 당시 난하 동부 연안까지 진출해 낙랑군을 습격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미천왕 시대에 낙랑군과 그 주변 지역에서 벌어졌던 전쟁 기록에는 미천왕 3년(서기 302) 현도군을 쳐들어 8,000명을 포로로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고, 12년(서기 311) 장수를 파견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해 취했고, 15년(서기 314) (당시의 전쟁지에서) 남쪽 방향으로 대방군을 쳤고, 16년(서기 315) 현도성을 공격해 격파하고 많은 무리를 죽이고 붙잡았으며, 20년(서기 319) 진晉나라의 평주자사인 최비가 도망해 왔다는 등이 있다.

 

현도군은 오늘날 요하 서쪽에 있었고, 대방군은 동한 시대인 서기 196~220년에 낙랑군 둔유현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설치했다. 그리고 당시 진시대의 요동은 진·한시대의 요동과 같은 지역으로서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이었으므로 미천왕 시대의 전쟁은 고구려가 오늘날 요하로부터 난하에 이르는 지역을 공략했음을 전하는 것이다. 만약 종래 한국 사학계의 통설처럼 낙랑군이 오늘날 평양 지역에 있었다면 미천왕 시대 고구려는 남부와 서부 양쪽의 국경지대에서 전쟁을 치렀다는 것이 되는데, 전략적으로 과연 그렇게 무모한 양면 전쟁을 감행했었을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고대사 신론'(만권당, 2017)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8. 11.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