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허주 이징 "금니산수도" 본문
검은 배경에 금가루를 아교물에 녹여 만든 값비싼 금물로 그린 환상적인 산수 풍경
조일전쟁(임진왜란)과 조청전쟁(병자호란)의 2번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면서 그림도 불타 사라져 버렸다. 두 전쟁이 끝난 뒤 복구, 부흥 작업과 병행해 불타 버리고 없어진 그림들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 일어났었는데 이때 탁월한 실력으로 이 일을 도맡다시피 한 화가가 바로 왕족출신의 화원 화가였던 허주虛舟 이징李澄(1581~1653 이후)이었다.
1990년대 초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난죽도> 병풍도 이때 그의 손으로 복원된 그림이다. 이 병풍에는 관련된 얘기는 다음과 같다. 1500년 전후 한림학사 강은姜溵은 윤언직이 그린 <난죽도> 8폭을 얻고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시를 적어 줄 것을 부탁해 이를 병풍으로 꾸몄다. 이후 병풍은 대대로 강씨 집안에 보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런데 평택 군수로 있던 조수륜은 이 병풍에 쓰인 조광조 시를 한 번 보고 암송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암 선생의 증손자 부인 윤씨가 비단을 마련해 이징을 불러 그림을 다시 그리게 하고 조수륜이 외우고 있던 시를 병풍 그림 위에 적어 넣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1635년의 일인데 이처럼 이징은 이 무렵 가장 뛰어난 화가의 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이 밖에 이징은 전란으로 궁정에서 유실된 조선 초기의 화원 화가 석경石敬이 그린 산수화첩을 복원해 극찬을 받은 일도 있다. 문인들도 앞다투어 이징에게 그림을 청했는데 시인 유희경은 자신의 별장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으며, 조선 초의 문신 일두 정여창의 후손은 일두가 살았던 화개의 옛 별장집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했다. 오로지 옛 기억에 의존해서만 그린 그림인데, 이때 그려진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1643)는 오늘날까지 전한다.
이렇듯 몰려드는 주문은 당연히 이징의 탁월한 그림 솜씨 때문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는 당시 남들이 쓰지 못하던 고가의 재료까지 손에 넣어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이를 말해 주는 것이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금니산수도金泥山水圖>이다. 금니화란 금가루를 아교 물에 갠 금물 즉 금니(또는 이금)로 그린 그림을 말하므로, <금니산수도>는 <금물산수도>, <이금산수도>, <니금산수도> 등으로도 불린다.
비단을 검게 물들여 금물을 써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애초에 불경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에서 시작되었다. 사경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신앙심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래서 고급 재료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특별히 불러오는 등 온갖 정성을 쏟는 게 보통이다. 이런 사경 중에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넣은 그림을 변상도變相圖라며 여기에는 금물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 금물 그림은 사경의 전통이 일반 회화에 이어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이징 이전에도 금물을 사용한 화가는 있었지만 왕족 화가인 탄은灘隱 이정李霆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징 이전에는 거의 제한된 범위의 특수한 환경에서만 금니화가 그려진 것이 보통이다.
금니산수화는 검은 배경에 그린 그림이라 성격상 선의 묘사가 중심이 되기 쉽다. 따라서 먹 면을 사용하는 일반 그림과 달리 수정이 쉽지 않다. 여간한 솜씨가 아니면 그 기량이 쉽게 탄로나기 십상이다. 이 그림은 웅장한 산으로 둘러싸인 강가 누각을 그린 것인데 검은 바탕에 금선으로 그려진 산수 풍경은 현실에 보이는 자연이 아닌 이상향을 그린 듯 환상을 자아낸다.
이 그림 속의 산수 구도는 어느 정도 안견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뭉게뭉게 피어나듯 하늘로 치솟은 먼 산의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짧은 선으로 나무를 그린 것, 그리고 앞쪽 중간에 누각이 있는 돌출된 언덕과 그 위에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 등은 안견풍의 그림에서 흔히 보던 것들이다. 다만 누각이 있는 언덕이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중간으로 나와 있고 뒤편의 산도 길게 늘어져 있는 정도가 변화로 보인다.
허주 이징이 그린 이 금니화의 존재는 솜씨도 솜씨이려니와 주변의 후원자는 물론 주문자들이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었나를 막연하게나마 추측하게 해 준다.
※이징李澄(1581~1653 이후)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화원 화가이며 자는 자함子涵, 호는 허주虛舟. 왕족 출신으로 그림을 잘 그린 학림정 이경윤의 5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서자이다. 벼슬은 도화서 주부였고 그림은 산수를 포함해 인물, 화조, 묵죽까지 못 그리는 그림이 없어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어렸을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에 몰두하는 바람에 집안 사람들이 삼일 동안 찾지 못하다가 겨우 찾게 되자 아버지 이경윤이 화가 나서 종아리를 때리자 울면서 다시 다락에 올라가 그리던 새 그림을 마저 마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93살까지 장수한 화가로도 유명하며, 어진을 그린 공로로 62살 이후에는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60대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5남 4녀의 자식 가운데 막내아들은 63살 때 낳았다. 나라를 대표하는 화원이란 뜻의 국수國手로 불렸다. 장수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 결과 조선 중기 화가로는 드물게 80여 점의 많은 작품이 전한다.
※이 글은 윤철규 지음,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컬처북스,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11. 2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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