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오늘날 평양 지역인 대동강 유역을 지배했던 고대 국가들 본문
1. 최씨낙랑국(서기전 1세기 경~서기 37년)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낙랑이 한반도 북부 대동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찍이 조선 중기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성호사설』에서 낙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은 두 군데 있었고 낙랑군은 요동, 낙랑국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도 그의 대표 저서『조선상고사』에서 역시 두 군데의 낙랑 존재와 함께 한사군의 낙랑군을 북낙랑, 대동강 유역의 낙랑은 남낙랑이라고 했다. 대동강 유역의 낙랑에 관한 가장 분명한 기록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무신왕 15년(서기 32)>조인데 그 내용은 낙랑국 왕인 최리崔理가 호동 왕자에게 북쪽 나라인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북쪽 나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 즉 최씨낙랑국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최씨낙랑국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낙랑국이다.
종래에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옛 문헌에 보이는 낙랑 기사는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료에서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은 서로 위치하는 지역이 다르므로 별개의 낙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리의 낙랑국 즉 최씨낙랑국은 서기 37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무신왕 20년(서기 37)>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해 그곳을 멸망시켰다고 했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을 말하는 것인지 최리의 낙랑국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 14년(서기 37)>조를 보면, 고구려의 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해 그곳을 멸망시켰고,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투항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고구려가 멸망시킨 낙랑은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끼어 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 낙랑은 그 위치로 보아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 될 수는 없으며 바로 평양 지역 즉 대동강 유역의 최씨낙랑국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우리나라 열국시대(여러나라시대)의 최씨낙랑국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서기전 28년으로서『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 거서간 30년(서기전 28)>에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당시 신라를 침략할 정도의 국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씨낙랑국은 동 시대의 열국이었던 동부여, 고구려, 신라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59년, 37년, 57년과 비슷할 것이므로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었을 추정된다.
최씨낙랑국의 지배계층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한사군의 낙랑군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서기전 195년~서기전 108년에 기자조선을 멸망시킨 위만조선이 고조선 서부변경을 침략·잠식하고 그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오늘날 요하까지 차지해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그 결과 고조선 왕실은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었던 연맹부족을 통어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전 2세기 이전의 사료에는 고구려, 예맥, 부여, 옥저, 낙랑 등의 명칭이 오늘날 요하 서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반해, 그 이후 중국 사료인『후한서』와『삼국지』에서는 이들 명칭이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족들이 동쪽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예맥, 부여, 옥저, 낙랑 등은 원래 오늘날 요하 서쪽에 거주하던 고조선 구성부족의 명칭이거나 그들이 거주하던 지명이었으며, 위만이 고조선의 서부를 침략하던 시기와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던 시기에 이러한 침략세력에 항거하던 그 지역의 일부 토착주민은 동쪽으로 이동해 오늘날 요하 동쪽에 정착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그들의 본래 명칭을 여전히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기에 원래 한사군의 낙랑군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의 일부도 위만의 고조선 침략에 항거하며 이동했을 것이고, 그 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했을 때에도 일부 주민이 침략세력에 항거하며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인데, 이들이 최리의 낙랑국 즉 최씨낙랑국도 건립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은 동일한 명칭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2. 동한 광무제가 세운 낙랑(서기 44년~300년)
고구려가 최씨낙랑국을 멸망시킨 7년 뒤인 서기 44년 이 지역은 다시 중국 동한 광무제의 침략을 받아 동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무신왕 27년(서기 44)>조에는 (동)한의 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을 만드니 살수(오늘날 청천강) 이남은 (동)한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래에는 이 기록도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인식했다. 동한이 이 지역을 낙랑이라 부른 것은 고구려에 멸망당하기 전 낙랑국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그대로 낙랑으로 불렀던 것 같다.
동한이 낙랑 지역을 친 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동한은 세력이 성장하고 있던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를 공략하고 그곳에 군사적 거점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것은 오래지 않았으므로 그 주민들은 아직 고구려에 동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고구려에 대해서 반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낙랑국의 유민이 동한의 힘을 빌려 낙랑국을 재건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한사군의 낙랑군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자 그들의 원주지였던 낙랑군 지역과 내통해 낙랑국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동한의 광무제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낙랑국 지역의 주민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그 지역을 공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청천강 이남의 낙랑 지역은 한반도에서 중국의 군사기지 및 교역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동한의 광무제는 낙랑국 지역을 공략하고 설치한 군사식민지는 계속해서 낙랑으로 불렀는데, 이 낙랑과 주변 정치세력의 지리적 관계를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사료의 기록을 종합하여 낙랑의 위치를 고찰한 결과 낙랑의 북쪽에는 조선, 동쪽에는 예(맥), 남쪽에는 마한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낙랑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 청천강이었으므로 동한이 지배하던 낙랑의 영역은 대체로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하나는 최씨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으므로 낙랑국과 고구려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동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이 낙랑국의 위치와 같다면 어째서 그 북쪽이 고구려와 접하지 않고 조선과 접경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고구려의 남쪽 국경 대부분은 조선과 접하고 있었지만 국경 일부가 낙랑과 접해 있었거나 아니면 동한이 설치한 낙랑은 최씨낙랑국 영역을 완전하게 확보하지 못해 북쪽 경계선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렇게 동한이 250년 이상을 대동강 유역을 지배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많이 발굴된 중국식 고분과 유적을 한국의 주류 고대 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잘못 인식하여 고조선의 한반도 북부설의 증거로 제시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3. 신라(서기 300년부터)
『삼국사기』「신라본기」<기림 이사금 3년(서기 300)>조에 낙랑과 대방 양국이 귀복했다는 기록에서 그 멸망이 확인된다. 더욱이 서기 300년 이후에는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멸망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그런데『삼국사기』「백제본기」<분서왕 7년(서기 304)>조에 백제가 낙랑의 서부 현을 빼앗았고 그 후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왕이 죽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혹시 이 기록을 서기 304년까지도 대동강 유역에 낙랑이 존재했음을 오인할 수도 있겠지만, 기록에서 현이란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한 현을 말하며, 태수라는 명칭 역시 한사군의 낙랑군 지방장관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 기록은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 분명하다.
이보다 앞선 서기 302년(미천왕 3)에 고구려는 현도군을 치고 8천 명을 사로잡은 바 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와 백제는 동족의식이 강했고 관계가 원만했으므로 백제의 낙랑 공격은 고구려가 현도군을 친 것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군을 공략했음은 후에 백제가 요서 지역을 공략한 사실에서 확인되듯이 충분히 가능했던 것으로, 이 시기에 이미 백제는 오늘날 발해 서북안 지역에 군사적인 진출을 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고대사 신론'(만권당, 2017)과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8. 12. 4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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