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탄은 이정 "묵죽도" 본문

글과 그림

탄은 이정 "묵죽도"

새샘 2018. 12. 16. 16:52

<이정, 묵죽도, 비단에 수묵, 119.1×57.3㎝, 1622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사신의 취향에 맞춰 접대 역의 신하를 정했다. 명나라 황제의 황손이 태어난 것을 알리러 온 사신 주지번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수찬으로 자부심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서화 솜씨도 매우 뛰어났다. 보통 중국 사신은 이것저것을 요구하면서 뇌물도 적잖이 챙겼으나 그는 일체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런 까다로운 사신을 맞아 조정에서는 이경윤(1545~1611)이정(1554~1626) 그리고 어몽룡(1566~1617)을 지목해 그를 대접하라 했다.

 

사신 접대의 자리에서 주지번이 먼저 서리 맞은 대나무와 난초를 그리자 그에 화답해 당시 최고의 대나무 화가로 손꼽혔던 탄은 이정이 대표로 나서서 비에 젖은 대나무인 우죽과 바람에 날리는 풍죽을 그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대뜸 "큰 대나무 잎은 버드나무 잎 같고 작은 것은 갈대 잎 같다"고 혹평을 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매화 그림의 대가인 어몽룡이 그린 그림에 대해서도 "매화가 아니라 살구꽃을 그린 것 같다"며 깔아뭉갰다.

 

조선 최고의 그림을 이렇게 헐뜯은 데 대해 당시 주변에 있던 조선 신하들도 불쾌하게 여긴 듯하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이때 탄은이 그린 대나무 그림을 보고서 "왕손王孫 필치의 오묘함은 섣부른 공교함을 넘어섰다"는 식으로 받아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실제로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 가져간 탄은의 대나무 그림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값을 떠나서 서로 갖겠다고 하면서 성가가 높았음을 증언하는 기록도 있다.

 

당시 주지번이 이런 말을 하게 된 이유를 근래의 연구를 통해 살펴보면, 그가 명나라 중기에 새롭게 등장한 문인화풍의 대나무 그림에 익숙한 탓에 전통 양식에 좀더 가까운 이정의 그림이 낯설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탄은의 대나무 그림은 이처럼 조선 전기의 전통을 바탕으로 해 새로운 경향을 일부 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 전기에 그려진 대나무 그림은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그런 공백을 메워 주는 것이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조선 전기 즉 15세기에 제작된 청화백자에는 화공 솜씨로 보이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대나무를 보면 줄기가 가는 데 비해 잎이 비교적 큰 특징을 보인다.

 

탄은의 대나무는 이런 조선 전기 스타일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장식성보다는 대나무 전체의 사실적인 생동감을 의식한 것이다.

 

탄은의 그림에서 대나무 줄기는 분명해 보인다. 댓잎은 강하고 분명한 필치로 개介 자로 벌어져 있다. 또 대나무 사이의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담묵과 농묵의 댓잎 표현을 분명히 구분했다. 무엇보다 그가 그린 대나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살짝 흰 줄기가 말해 주는 생동감이다. 이런 역동성에 중심을 부여하기 위해서 대개 아래쪽에 짙은 먹으로 바위를 그리는 게 보통이다. 이런 그림은 치밀한 관찰과 사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 <묵죽도墨竹圖>는 이와 같은 탄은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천계 연간의 임술년 봄에 탄은이 월선정에서 그렸다(천계임술춘天啓任戌春 탄은사우월선정灘隱寫于月先亭)"라고 썼다. 천계는 명나라 16대 황제 희종의 연호로 이때의 임술년은 1622년이다. 월선정은 최근 연구에 따르면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공주는 탄은 집안 대대로 논밭이 있던 곳으로 만년에 그가 내려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그림은 탄은이 타계하기 4년 전에 그린 것이다. 생애 마지막 절필작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화풍상으로 보면 그가 그린 여러 대나무 그림에 보이는 특징들이 종합적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정李(1554~1626)은 선조 무렵에 활동한 왕족 출신 화가로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이다. 세종의 5대 후손으로 석양정錫陽正을 제수받아 흔히 석양정 이정이라 불린다.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서에도 뛰어났다. 그림은 대나무 이외에 매화와 난초도 잘 그렸다. 특히 대나무는 당대 최고로 손꼽히면서 당시 간이최립(1539~1612)의 문장,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후대의 수운 유덕장(1675~1756), 자하 신위(1769~1845) 등과 함께 조선 3대 대나무 화가로 손꼽힌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칼을 맞아 오른팔이 거의 잘리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솜씨는 전보다 더 뛰어났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그림 중에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거의 없다. 1594년 12월에 그린『삼청첩三淸帖』(간송미술관 소장)이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으로 전한다.

 

※이 글은 윤철규 지음,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컬처북스,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12. 1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