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명에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되었다 본문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 경 고조선의 강역 및 한사군의 낙랑군 위치>
『사기』「조선열전」에는 "조선의 왕인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가 전성기에 진번·조선을 침략해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해 장새를 축조했다. ····· (그는) 진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겨우 변방을 지키며 진번·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만이 및 옛 연나라·제나라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왕험에 도읍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염철론』「주진」편에는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한 후에 동쪽으로 패수沛水浿水(오늘날 난하)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문헌에 나오는 조선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연나라에 복속되고 진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조선은 난하 동부 연안의 지명으로서 고조선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연나라나 진나라가 고조선을 복속 또는 멸망시켰다고 기록한 문헌은 하나도 없으며 그 시기에 고조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 두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이 고조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일개 지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다음 문헌에 의해서 입증된다.『한서』「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소는 주석하기를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위서』「지형지」 <평주>조 '북평군'을 보면 북평군에는 조선과 창신[신창?] 2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조선현의 주석에는 "서한·동한을 거쳐 진晉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에 속해 있다가 그 후 폐지되었다. 북위의 연화 원년(서기 432)에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현으로 이주시키고 다시 설치해 북평군에 속하게 했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현의 위치는 진시대까지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시대까지의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를 확인해낸다면 그곳이 서한·동한 이래의 조선현의 위치가 된다. 그런데 『진서』「지리지」 <평주>조 '낙랑군'을 보면 진시대의 낙랑군은 한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조선, 둔유, 혼미, 수성, 누방, 사망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고 수성현은 진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조선현의 위치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수성현은 진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했으므로 그 위치가 확인된다. 진장성의 동단은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 지역이었으므로 수성현의 위치는 바로 이 지역이 된다. 수성현이 창려 갈석 지역이었다면 같은 군에 속해 있었던 조선현은 이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한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 되어야 한다. 진시대의 낙랑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고 조선현도 그 위치가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한 무제가 설치했던 한사군은 이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난하 하류의 동부 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먼저 있고 난 후에 그 지역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것이 고조선 전체에 관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고조선 지역 안에 국명과 동일한 지명이 존재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사례가 참고가 될 수 있다. 중국 최초의 국가였던 상商[마지막 도읍지 이름을 따서 은殷이라고도 부름] 왕국의 경우 국명과 동일한 상이라는 명칭의 읍이 존재했음이 갑골문과 문헌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서주西周 왕국에서는 정치적 중심지를 주라 불렀으며 도읍인 호경을 종주, 동경인 낙읍을 성주라고 불러 그 명칭이 국명과 동일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여졌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곳을 도읍지로 보기에는 너무 변방에 치우쳐 있고 고조선 세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는 내용이 있다. 명시대의 영평부는 창려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이로 보아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서 언급된 조선에 있었던 성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성은 아마도 고조선에서 국경지대에 방위용으로 축조했을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연나라 국경초소인 영자새를 의식했을 것이다. 큰 성이 있었기 때문에 변경의 고조선인들이 그곳에 운집해서 살았을 것이고, 중국인들의 눈에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여 조선이라는 명칭이 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부연해 둘 것은 서주 초에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이동했던 기자 일행이 난하의 서부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가 진秦시대에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려 난하의 동부 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기자국의 준왕은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 당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을 옛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이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던 지명이라면, 『사기』「조선열전」에 조선과 나란히 기록된 진번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이것은 같은 열전에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의 기록이 해결해 준다. 거기에는 진번에 대한 주석으로 “요동에 번한현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요동의 번한현 지역이 진번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번한현은 오늘날 난하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진번은 난하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로써 조선과 병기된 진번은 조선과 근접해 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지역의 명칭에 따라 한사군의 진번군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고대사 신론'(만권당, 2017)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8. 12. 28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겸재 정선 "장안연월" (0) | 2019.01.30 |
---|---|
전 학포 이상좌 "송하보월도" (0) | 2018.12.31 |
설곡 어몽룡 "월매도" (0) | 2018.12.17 |
탄은 이정 "묵죽도" (0) | 2018.12.16 |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전쟁에도 고조선 국경선은 변하지 않았다 (0) | 2018.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