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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곡 어몽룡 "월매도"

새샘 2018. 12. 17. 20:41

어몽룡, 월매도 , 비단에 옅은 묵(견본수묵), 119.2x53cm, 국립중앙박물관

 

달밤을 배경으로 하늘로 힘차게 솟아 있는 매화 가지가 인상적이다.

아래쪽에는 늙어 버린 굵은 가지가 손바닥을 펼친 듯 펼쳐져 있다.

매화꽃은 새로 난 가는 가지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꽃들은 달빛에 그림자만 보이듯이 윤곽선 없이 옅은 먹으로 그렸고 꽃받침과 꽃술이 있을 법한 자리에 짙은 먹을 찍었다.

 

먹 사용은 이외에도 기교적이다.

하늘로 뻗은 새로 난 가지는 먹선 하나로 단숨에 그으며 일견 연약하지만 강한 생명력을 나타내었다.

반면 밑둥의 늙은 가지는 말라 버린 붓으로 그어 듬성듬성 여백을 남겨 거친 풍상을 겪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대비는 굵고 가는 가지에서도 반복된다.

달과 매화가 연출하는 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런 강렬한 인상이 담긴 것이 이 그림의 매력 중의 매력!

그러나 이 그림은 실은 당시 이단에 속했다.

강렬한 터치 속에서 발산되는 묘한 시적 서정 때문이다.

이는 당시 국제적 기준과는 동떨어진 조선적 개성이었던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

그림과 도자기의 가장 큰 차이는 생활이 어디까지 개입돼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도자기 중에도 궁중의 의례나 공식 연회에 사용됐던 왕실 도자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일상생활을 위해 실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사용하기에 편리한 목적이나 기능이 우선된다.

또 사용인의 취향에 따른 장식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도자기는 철저하게 실용성이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회화는 애초부터 실용보다는 고급한 감상을 전제로 한 문화였다.

이런 문화는 수준이 높은 지역에서 전해져 영향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시 조선은 중화 문화권에 속해 있어 자연히 그 중심인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조선 시대 회화의 흐름은 이런 중국의 영향과 유행을 어떻게 소화해서 한국적인 형식과 내용을 찾아가는가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기가 되면 초기와 달리 조선의 독자적인 양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가 대표적이데, 석봉은 조선 초기부터 내려오던 중국의 송설체에서 나아가 투박해 보이면서도 강한 인상의 석봉체를 완성해 선보였다.

그림도 그랬는데 그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일지 어몽룡이었던 것이다.

 

매화 그림은 중국 원나라 때부터 많이 그려졌다.

이때의 대가는 왕몽王蒙(1308~1385)으로 그의 매화 그림 스타일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초기의 대컬렉터였던 안평대군의 소장품에도 그의 그림이 5점이나 들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매화는 이를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게 된다.

물론 조선 초기의 매화 그림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중기에 들어 일지 어몽룡이 그린 것부터 전하는데, 그는 왕몽 화풍과 달리 자신의 개성이자 조선적인 스타일로 그렸다.

왕몽의 화풍은 어몽룡 그림과 달리 가지 하나가 옆으로 구부러진 뒤에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는 게 보통이다.

[어몽룡보다 조금 뒤이지만 오달제(1609~1637)의 매화에 이런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조선적인 것은 촌스럽거나 무지한 그림으로 꼽혔다.

그 실례로 임진왜란 중인 1596년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양호가 한 말이 있다.

그는 울산 전투에서 대패한 뒤에 허위 보고를 올려 면직된 장수이기도 한데, 어몽룡의 매화를 보고 "그림의 격은 매우 뛰어나지만 매화꽃이 거꾸로 달리지 않아 잘못됐다"고 한 것이다.

이는 물가에서 가지가 거꾸로 자라는 도수매倒水梅를 염두에 두고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도수매란 북송 때 매화를 사랑했던 시인 임포(967~1028)가 달과 함께 매화를 읊어 유명해진

 

"성긴 그림자 맑은 물 위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소영횡사수청천 疎影橫斜水淸淺)

 은은한 향기 달빛 어린 황혼에 떠도네       (암향부동월황혼 暗香浮動月黃昏)"

                  

라는 구절이 그림 속으로 들어오면서 대유행을 한 스타일이다.

 

양호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십년 뒤인 1606년에 사신으로 온 주지번 역시 어몽룡의 그림을 보고 "꽃받침이 모두 위를 향하고 있어 살구꽃 같다"고 혹평했다.

이들이 이렇게 본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중국식대로 본 것일 뿐이다.

어몽룡이 그린 것은 늘 보았던 매화에서 느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그린 것이다.

자기 감정에 몰두했던 만큼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눈에 달리 보였던 것이었다.

어몽룡이 그린 매화에는 강하고 거친 가운데 꾸밈이 없는 담백한 서정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이런 특징은 바로 이후에도 여러 면에서 보게 되는 한국의 미적 특징 중 하나이다.

 

 

 

'일세一世에 일지一枝' 또는 '조선 제일'이라 불리는 어몽룡의 월매도현재 오만원권 지폐 뒷면의 중심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월매도의 배경으로 깔린 그림은 탄은 이정의 풍죽도.

 

어몽룡魚夢(1566~1617)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화가이다. 자는 견보見甫, 호는 설곡雪谷 또는 설천雪川으로 판서를 지낸 조부와 군수를 지낸 부친과 달리 본인은 종6품의 현감에 그쳤다. 매화를 잘 그려 일지一枝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당시 이정의 대나무 그림과 황집중의 포도 그림과 더불어 삼절三絶로 불렸다.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이경윤과 연관이 있는데, 그의 장인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 이경윤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했다. 말하자면 이경윤 아들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따라서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은 하지만, 이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는 진천 현감을 지냈다는 이력 이외에는 거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매화 화품은 단절되지 않고 조선 중기의 조속(1599~1668), 조지운(1637~1691) 부자로 전해졌다.

 

※이 글은 윤철규 지음,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컬처북스,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고, 오만원권의 그림은 새샘이 추가한 것이다.

 

2018. 12.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