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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전 학포 이상좌 "송하보월도"

새샘 2018. 12. 31. 21:13

전傳 이상좌, 송하보월도 , 비단에 엷은 채색(견본담채), 197x82.2㎝, 국립중앙박물관

 

예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고수에게는 '오도자吳子가 살아나온 듯하다'고 비유한다.

오도자 당나라 현종(652~762) 시대에 활동한 화가로 화성畵聖이라 불리던 그림의 명수다.

그런데 살아 생전에 오도자에 비유된 화가가 바로 학포 이상좌이다.

이름은 이처럼 높지만 아쉽게도 그의 그림 중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불과 서너 점에 그친다.

인물화 솜씨를 보여 주는 것은 더더욱 없어 불화 밑그림이 전할 뿐이다.

 

인적이 드문 바위산 모퉁이를 돌아가는 인물을 그린 이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그가 남긴 산수화의 하나이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흠이지만 조선 초기 그림으로는 보기 드문 대작에 해당한다.

화면 아랫부분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검은 바위 절벽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시선을 끄는 것은 인물인데 절벽 반대쪽에 고사高士 한 사람과 동자가 보인다.

동자는 지팡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이를 보면 길을 가기보다는 머물러 서서 무엇인가를 지켜보는 것 같다.

 

그런데 날씨가 보통이 아니다.

고사의 옷자락이 뒤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한껏 앞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절벽 중간의 소나무도 바람을 견디기 힘든지 한쪽으로 심하게 꺾여 있다.

잔가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간부터 심하게 굽었다.

 

가만히 보면 절벽에 붙어 뿌리를 내린 것은 소나무만이 아니다.

나무 옆으로 앙상한 가지가 보이는 것은 매화나무이다.

지팡이를 동자에게 맡기고 세찬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는 고사는 실은 이 매화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옛 그림으로 그려진 매화 관련 일화는 여럿 있지만 그림 속에서 이렇다 할 단서가 보이지 않으므로 어느 누구에 관련된 일화를 그린 것인지는 특정하기가 힘들다.

매화 역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소나무에 가려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정도이다.

매화 이야기는 쏙 빼고 <송화보월도>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이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제 그림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검은 먹으로 짙게 칠해진 절벽과 철사처럼 꺾인 소나무이다.

이 그림은 대자연을 스펙터클하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닌 절벽을 중심으로 먼 산을 살짝 그렸을 뿐이다.

말하자면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사각 프레임으로 만들고 팔을 뻗어서 그 안을 들여다본 것과 같다.

자연의 일부만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일부만을 잘라 그리게 된 것은 남송시대(1127~1279)부터다.

이런 새로운 스타일을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또 잘 소화해낸 화가가 바로 남송의 궁중 화가 마원馬(1140?~11225이후)이었다.

 

그는 자연의 일부만 그리면서 특별한 구도를 썼다.

그림을 대각선으로 양분한 것처럼 위쪽은 텅 비우고 아래쪽에만 그림을 집중한 것이다.

<송하보월도>는 이런 구도다.

소나무를 무시하고 절벽 언덕을 따라 선을 그으면 위쪽은 텅 빈 것이 된다.

이런 구도를 흔히 변각邊角 구도 또는 일각一角 구도라고 부른다.

또 마원이 잘 구사했다고 해서 '마일각馬一角'이란 말도 쓴다.

그는 산을 이렇게 그리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진 나무, 그 가운데 특히 소나무를 철사가 꺾인 것처럼 비뚤비뚤하게 그렸는데, 이것이 마원 소나무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이상좌가 마원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기에는 시대 차이가 너무 크다.

그보다 명나라 중기에 절강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직업 화가들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직업 화가였던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을 선호했는데, 남송시대에 마원이 선보였던 화풍을 가져다 쓰면서 더욱 악센트를 주었다.

자연의 일부를 그리되, 그런 배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클로즈업해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그렸다.

또 가까운 쪽 바위에는 먹을 많이 써서 시각적인 호소력을 최대한 높였다.

그래서 이들을 한데 묶어 절파계 화가라 하고, 그들 공통의 스타일을 절파 화풍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조선시대 중기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새샘블로그에 2번이나 소개된 인재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역시 절파의 영향이 보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바위 표현법이다.

이는 현동자 안견이 <몽유도원도>에서 쓴 표현법과 같다.

따라서 이상좌 그림에 대해서는 안견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위에 당시 외국의 최신 경향을 받아들여 자기식 화풍으로 그려 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좌李上佐(1465~?)는 조선 초기의 도화서 화원이며, 자는 공우公祐,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원래 한 선비 집의 노비였다가 그의 그림 재주를 알아본 당시 대군으로 있던 중종이 사비를 들여 면천해주고 도화서에 알선, 화원이 되게 해 주었다. 이후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당연히 궁중의 크고 작은 그림 일은 주로 이상좌가 맡게 되었다. 이상좌는 산수화는 물론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특히 궁중 불사에 필요한 불화佛畵를 많이 그린 것으로 전한다. 그가 그린 불화로 현재 전하는 나한도 초본은 보물 제593호. 그의 탁월한 인물화 솜씨에 대한 일화는 당시 한양 기생으로서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했던 상림춘이 일흔 나이로 은퇴하면서 특별히 이상좌에게 초상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지만...이상좌의 아들 숭효와 흥효 역시 화원이 되어 이름을 떨쳤고, 손자이자 숭효 아들인 나옹 이정李楨(1578~1607)[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탄은 이정李霆(1554~1626)과는 다른 사람]은 조선 중기의 산수화 대가로 손꼽힐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다.

 

※이 글은 윤철규 지음,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컬처북스,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12.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