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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전쟁에도 고조선 국경선은 변하지 않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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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전쟁에도 고조선 국경선은 변하지 않았다

새샘 2018. 12. 10. 11:46

한국고대사신론 표지(사진 출처-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91195872343)

 

 

『사기』「조선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의 왕인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가 전성기에 진번·선을 침략해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해 장새를 축조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킴에 따라 그것이 요동외요에 속하게 되었다.

(서)한이 흥기했으나 그것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했고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서한후국]에 속하게 했.

연왕 노관이 (서)한에 반항해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도 망명했는데,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머리에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도주해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

(그는) 진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겨우 변방을 지키며 진번·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만이 및 옛 연나라·제나라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왕험에 도읍했다."

 

우리 주류 고대사학계에서는 이 기록에 나오는 조선을 고조선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기록 해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실은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의 하나였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삼국지』「동이전」의 주석으로 실린 『위략』 내용을 보면,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파견해 그 (고조선) 서방을 공략해 2,000여 리의 땅을 얻고 만滿·번한番汗까지로 경계를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약화되었다."고 했다.

이 기록은 앞의 『사기』「조선열전」에서 소개된 전국시대(서기전 403~서기전 221)의 연나라가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략해 복속시켰다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기』「조선열전」에는 조선이 연나라에 공략당해 복속된 것으로 나타난 반면, 『위략에는 조선이 그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연나라에 복속된 조선과 서방의 땅 2,000여 리를 빼앗긴 조선이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기』「조선열전」의 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의 한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고, 『위략의 조선은 고조선인 것이다. 

『한서「서남이양오조선전西南夷兩奧朝鮮傳」에서 안사고는 조선에 대해 주석하기를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공략해 이곳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안사고가 말한 조선은 『사기』「조선열전」 첫머리에 진번과 나란히 기록된 조선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조선 전 지역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조선이 전국시대에 완전히 연나라에 병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이 『염철론』「주진」편에서도 발견된다.

거기에는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한 후에 동쪽으로 패수沛水浿水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도 고조선 전 지역일 수가 없다.

고조선이 진나라에 멸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조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선이 언급된 사건을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서』에서 안사고가 주석한 '조선'이 나오는 본문은 『사기』「조선열전」을 옮겨온 것으로 전국시대의 연나라가 전성기에 고조선을 침략했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이것이 『위략이 전하는 '진개 전쟁'을 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진개는 고조선의 서부를 침략한 사실은 있지만 고조선을 복속시킨 일은 없다.

종래에는 진개가 고조선의 서부 2,000여 리를 침략했다는 『위략의 기록에 따라 이 시기에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크게 후퇴했을 것으로 보았다.

러나 윤내현 교수는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크게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오래지 않아 진개는 후퇴를 했고 국경선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윤교수는 『위략의 내용을 우리의 한국 6·25전쟁에서 "남한이 북한군의 침공을 물리치고 북한의 압록강 근처까지 점령함으로써 거의 전 영토를 얻고 판문 지역을 경계로 삼으니한은 약화되었다."라는 기록에 비하였다.

판문점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압록강 근처에 있는 판문점 지역이 경계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개의 침략전쟁 후에도 국경선에 별로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위략』에 따르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전쟁이 있은 후에 연나라는 고조선과의 국경을 만·번한까지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만·번한의 위치가 확인되면 국경선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만·번한의 위치는 『한서』「지리지」『수경주』 기록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 <요동군>조에는 문文·번한番汗의 2개 현의 명칭이 보인다.

·번한이 『위략에 보이는 만·번한이라는 데 이론이 없는데, 동한시대에 이르면 문현文縣은 문현汶縣으로 바뀐다.

문文·문汶·만滿은 중국의 동남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오음吳音으로 동일한 음이 된다.

고음古音이 주로 변경 지역에서 오래 보존되어 내려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세 문자는 고대에 동일한 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과 번한현이 항상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연접한 지역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서』「지리지」 번한현의 반고 주석에는 그곳에 패수沛水浿水가 있다고 했으며, 응소의 주석에는 한수汗水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경주』「유수」조를 보면 유수의 지류로 한수가 있다.

그런데 유수는 오늘날 난하의 옛 명칭이므로 결국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번한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반고와 응소는 패수와 한수의 흐르는 방향에 대해서 "새塞 밖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것은 동쪽 또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요수의 흐르는 방향과 다르다.
만약 고조선에서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서쪽 경계였던 요수와 패수가 동일하게 오늘날 난하였다면, 그 흐르는 방향이 왜 다르게 기록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난하는 매우 긴 강이므로 부분에 따라 흐르는 방향과 명칭이 다르게 되는데, 요수의 경우는 난하 하류 방향을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번한과 관계된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이므로 흐르는 방향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난하의 지류로서 서남으로 흐르는 강은 폭하, 청룡하 등이 있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후퇴했음은 당시 연나라의 정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위략』의 기록을 『사기』「조선열전」과 연결시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시기는 연나라의 전성기였음을 알 수 있다.

연나라 전성기는 소왕 때로 서기전 311년부터 서기전 279년 사이였으니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이 기간에 있었을 것이다.

연나라는 서기전 284년 진나라, 초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과 연합해 강국인 제나라를 치고 70여 개의 성과 제나라의 도읍인 임치까지 점령했다.

이 시기에 진개가 기자국과 고조선을 친 것인데 당시 연나라의 국력으로 보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5년 후인 서기전 279년 연나라 소왕이 사망하고 혜왕이 즉위했는데 혜왕은 옹졸한 군주여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연군은 제군에게 크게 패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기전 273년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가 연합해 연나라를 정벌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 후 연나라는 멸망될 때까지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연나라는 전성기를 맞은 후 불과 5년이 지나 국력이 크게 쇠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을 친 진개만이 그 지역을 계속해서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하기 힘들다.

진개도 어쩔 수 없이 후퇴했을 이다.

『위략』의 기록에 진개가 기자국과 고조선의 땅 2,000여 리를 빼앗고 그 다음에 국경을 만·번한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번한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진개의 침략 후에도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그 이전과 크게 차이가 없이 오늘날 난하 유역이었던 것이니, 이는 진개가 후퇴했음을 입증해 준다.

진개가 침략했다는 2,000여 리는 실제 거리라기보다는 많은 땅을 침략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고조선은 진개의 침력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 않아 영토가 거의 회복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전국시대에 연나라만 일방적으로 고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도 연나라를 침공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염철론』「비호」편을 보면, 고조선이 요동에 있던 연나라의 요[국경 초소]를 넘어 연나라의 동부 지역을 탈취한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동에 있었던 연나라의 요는 『사기』「조선열전」에 나오는 요동외요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요동외요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염철론』「비호」편 기록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에 고조선도 연나라를 침공한 사실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고조선과 연나라는 때때로 상호 침공이 있었으나 국경선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염철론』「벌공」편에서는 "연나라는 동호를 물리치고 1,000리의 땅을 넓혔으며 요동을 지나 조선을 침공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사기』「흉노열전」『위략』에 보이는 진개의 침략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침공해 그것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연나라 국경은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철론』「험고편에서 연나라 국경은 갈석·사곡· 요수였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개의 전쟁이 일시적인 침략행위에 불과했고 다시 후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에 연나라보다는 제나라가 강대국이었는데 제나라는 오늘날 산동성 지역에 터를 잡았다.

그런데 종래의 통설처럼 연나라가 압록강을 고조선과의 국경으로 삼고 있었다면 연나라는 제나라의 두 배 정도의 대국이어야 하는데,이는 전국시대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이 『사기』 "연나라는 북쪽으로는 만맥의 압력을 받았고, 안으로는 제나라·진나라와 국경을 함께하여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변방의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로서 여러 번 멸망할 위험을 겪었다"면서 연나라를 약소국으로만 표현하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참고되어야 한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고대사 신론'(만권당, 2017)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8. 12.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