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선지 만이 아니라 이정기도 알자 본문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망한 뒤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서 당나라에서 활약한 두 사람의 유명한 장군이 있다.
이정기李正己 장군(732~781)과 고선지高仙芝 장군(?~755)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서唐書》〈열전列傳〉에 실려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 높이 평가받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고선지 장군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이정기 장군은 그렇지 못하다.
두 사람은 모두 당나라 군대에 들어가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인생행로가 비슷하지만 고위직에 오른 뒤의 당나라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이정기 장군은 독자적인 정권을 세워 당나라에 저항한 반면, 고선지 장군은 철저하게 당나라에 충성하여 많은 은혜를 입었다.
고구려 패망 뒤 당나라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은 군대에 들어가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군졸들의 신망이 매우 높아 그들의 추대로 치청번진淄靑藩鎭의 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이정기 장군은 치청번진이 있었던 산동성 일대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권으로 장악하고 당나라와는 다른 제도와 법을 시행하는가 하면 당나라에 대항하면서 독립왕국처럼 다스렸다.
당시 이정기 장군의 위세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정기 장군이 당나라에는 대항하면서 자신과 같은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와는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매년 사신을 왕래하도록 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발해와는 같은 민족이라는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당나라는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정기 장군은 발해와 힘을 합해 황해를 둘러싼 환황해제국環黃海帝國을 건설해 고구려의 뜻을 실현해야겠다는 큰 꿈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정기 장군이 사망한 뒤에도 그의 아들 이납李納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납은 완전히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제齊라 했다.
그리고 스스로 제왕齊王이라 칭하고 백관을 임명하였다.
이납이 사망한 뒤에는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고, 이사고가 사망한 뒤에는 그의 동생 이사도李師道가 즉위하였다.
그 기간은 이정기 장군이 치청번진의 절도사가 된 뒤부터 55년 동안이었다.
당나라 안에 고구려인이 세운 나라가 55년 동안 당나라에 대항하면서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어 제를 쳤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는 신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으며, 신라는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군사 3만명을 주어 당나라를 돕도록 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역사상 외국의 요청에 의한 첫 번째 해외파병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 파병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뒤에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동아시아의 해상권과 국제무역을 장악했던 장보고張保皐 대사가 이 시기에 당나라의 군대에 있으면서 당나라가 이정기 장군의 나라를 치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점은 장보고 대사에게 귀국을 결심하도록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훗날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세운 뒤 중국에 진출하여 거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이정기 장군의 나라가 있었던 지금의 산동성이라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안서에 있을 때 아버지의 공로 덕택으로 어린 나이에 유격장군이 되었다.
20세에는 그보다 높은 지위의 장군으로 진급하여 아버지와 같은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 등을 지냈다.
또 소발율국小勃律國을 쳐서 멸하고 그 왕과 공주를 붙잡아 온 공로로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으로 특진하였고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에 이어 특진겸좌금오위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衛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또한 석국石國을 멸한 공로로 무위태수武威太守,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를 거쳐 우우림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이 되었으며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고선지 장군이 정복활동을 했던 곳은 서역, 곧 파미르고원 지역으로 그 위엄이 진동하여 그 지역의 많은 나라들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고선지 장군은 화려했던 젊은 날과는 달리 비운의 주인공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안록산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부원수가 되어 출전하였다가 그의 부관인 변령성邊令誠의 모함으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정기 장군은 당나라의 군대에서 출세했지만 절도사가 된 뒤에는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당나라에 대항하였고, 고선지 장군은 비운의 말년을 맞기는 했지만 일생을 당나라에 충성하면서 위업을 세워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에게 이정기 장군은 외면당한 반면, 고선지 장군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중국의 황제를 우리 황제로, 중국을 우리 상국으로 생각했던 유가적 정치논리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정기는 반역자, 고선지는 충신이라는 식의 의식이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당나라 원주민이 아니면서도 서역을 정벌하여 대당大唐을 건설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동서 문화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한 고선지 장군도 위대하지만, 우리 시각에서는 당나라 안에 독립국을 세우고 자신의 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대항했던 이정기 장군도 그에 못지 않게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윤내현 지음,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 2003)'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9. 1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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