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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연담 김명국 "수로예구"

새샘 2018. 6. 6. 08:54

최소한의 획으로 끌어낸 마음속 선심禪

<김명국, 수로예구壽老曳龜, 조선 17세기, 종이에 담채, 173.0×94.0㎝, 간송미술관>

 

조선 중기 인조대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화가 두 명을 들라면 단연 허주虛舟 이징李澄(1581~?)과 연담蓮 김명국金明國(1600~1662년 이후)이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출신이나 추구하는 지향과 화풍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종종 비교한다. 시대나 감상자의 주관에 따라 평가는 엇갈리지만, 두 사람 모두 명가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이루었다. 다만 각자 추구하는 지향과 풀어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이징과 김명국을 보면, 당나라 때 활동했던 화가인 사훈李思訓과 오도자吳道子가 떠오른다.

 

"대동전大同殿에 촉도 가릉강 3백 리를 그리라는 당 현종의 명을 받고 이사훈은 수 개월간 공력을 들여 그렸고, 오도자는 단 하루 만에 그렸다"는 '역대명화기'에 실린 두 사람의 장점과 차이를 짐작케 한다. 정교한 필치로 전통의 권위와 찬연함을 보여 주었던 이사훈성글고 분방한 필치로 수묵화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오도자. 두 사람은 이징과 김명국의 경우와 무척 비슷하다. 심지어 출신까지 비슷하다. 이사훈은 종실 출신, 오도자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수개월 동안 공력을 들인 이사훈의 그림과 하루 만에 그린 오도자의 그림을 보고 주문자인 현종은 "모두 묘리가 지극하다"라고 표현했다. 이징과 김명국 역시 그렇다. 다만 자신의 지향에 따라 추구하는 화풍이 달랐을 뿐이다. 이징이 단정하고 세련된 화풍이었다면, 김명국은 거칠고 호방한 필치의 개성 있는 화풍을 구사했다.

 

그런데 현종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왕실이나 권문세족들은 김명국보다 이징을 훨씬 더 좋아했다. 김명국의 진가는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빛났다.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일본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다녀왔는데, 밤낮으로 밀려드는 일본인들의 그림 요청을 감당하느라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고 한다.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인 필치의 화풍이 일본인들의 취향에 잘 맞았던 탓이다.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 몇몇이 일본에 전해져 그때의 인기와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전의 화가들 대개가 그렇듯이 김명국의 작품도 명성에 비해 현존하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김명국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이 30여 점을 헤아리지만 작품의 양식과 수준의 편차가 심하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작품은 불과 10여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김명국은 화원화가답게 다양한 화가를 다루었지만 그의 특기는 역시 도교의 신선, 불교의 불보살, 고승 등을 소재로 하는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였다. 조선시대 도석화의 특징은 예배를 위한 종교화이기보다 구복적인 감상화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법은 진채眞彩가 아닌 수묵이나 담채淡彩가 주를 이루며, 필치도 최소한의 필묘로 인물의 특성을 담아내는 감필減筆을 주로 쓴다. '수노인이 거북이를 끌다' 라는 뜻의 <수로예구壽老曳龜>도 도교의 신을 감필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달마도>와 더불어 김명국의 장기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몸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길고 성성한 수염을 달고 있는 대머리 노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수노인壽老人이다. 수노인은 남극 노인으로도 불리는데, 인간의 수명을 맡고 있다는 남극성의 화신으로, 노인성老人星, 수성壽星, 수요壽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장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경외와 숭배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중국에서도 종교화와 감상화로 자주 그려졌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초기부터 도교신선화의 소재로 가장 널리 애용되곤 했다. <수로예구> 역시 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어느 대갓집 수연壽宴에 축수를 위한 그림으로 그려진 듯하다.

 

<수로예구 부분-처진 눈매와 주먹코가 맘씨 넉넉한 촌가의 노인을 떠올리게 한다. 초인적인 권위와 신성을 강조하여 괴기스럽게 과장 표현한 중국의 수노인과는 확연히 다른다. 어쩌면 연담의 생김새와 성정이 이처럼 소탈하고 푸근했을지도 모르겠다>

 

속도와 강약, 향배와 굵기의 변화를 주며 쳐낸 도포의 옷자락은 거칠고 소략하지만, 속세를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도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얼굴 묘사는 옷자락에 비해 맑고 가는 필선으로 처리했는데, 수노인의 단아하고 맑은 성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전체적인 기운은 청징하지만 지나치게 근엄해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처진 눈매와 주먹코가 주는 푸근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초인적인 권위를 강조하여 괴기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표현을 하는 중국의 수노인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어쩌면 김명국의 생김새와 성정이 이처럼 소탈하고 푸근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로예구 부분-시원스럽게 휘갈겨 쓴 '연담'이란 호 아래 거북이 한 마리를 그려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한층 강조했다. 두어 개의 점과 몇 가닥의 선뿐이지만 거북이의 형상은 충분히 드러났다. 감필법의 달인이었던 연담이 아니라면 흉내 내기 어려운 필치와 감각이다>

  

수노인의 왼쪽 소매 밑에는 거북이를 그려 무병장수의 의미를 한층 강조했다. 두어 개의 점과 몇 가닥 선뿐이지만 거북이의 형상을 표현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김명국이 아니라면 흉내 내기 어려운 필치와 감각이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필神筆로 불렀던 이유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 위에 청아하고 완숙한 필치로 시원스럽게 휘갈겨 '연담蓮潭'이라 쓴 관서, 두 방의 주문방형朱文方形 인장은 수노인의 옷자락과 어울려 균형을 잡아 주며 운율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숙종 때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1668~1715)는 김명국에 대해 "기질이 거칠고 호방하여 마침내 환쟁이의 나쁜 버릇을 떨쳐 버렸으니 이야말로 화단의 이단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영조대의 선비로 화론에 밝았던 남태응(1687~1740)은 한걸음 더 나갔다.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내키는 대로 하여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이 <수로예구>와 같은 상승上乘의 그림은 그저 거칠고 호방한 기운만으로는 그려낼 수 없다. 작가 자신이 곧 신선의 초탈함과 선승의 불기不羈(얽매이기나 구속받지 않음)함을 맛보아야만 가능하다. 화원화가로 평생을 보냈던 김명국의 학문이 높았다거나 수행이 깊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학문과 수행 대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 없는 천부의 자질과 이를 끌어내 주는 술이 있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질 않았고, 또 술에 만취하면 만취해서 잘 그릴 수가 없었다"라는 그에 대한 평가는 언뜻 난해해 보일 수 있는 김명국과 그의 작품을 가장 잘 풀어낼 수 있는 열쇠이다.

 

그러나 어찌 술로만 김명국의 내면과 그림세계를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술이 그를 지극한 경지로 이끈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던 도심道心과 선심禪心이 술에 의지해 잠시 흘러넘쳤을 뿐이다. 이 그림도 도와 속, 선과 속이 교차하는 짧은 순간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소략하고 거칠지만 진솔하고 명쾌하다. 그리는 데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겠지만, 3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감동을 준다. 명작이란 이렇듯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1662년 이후)은 취옹醉翁이란 호도 있다. 화원으로서 술을 매우 좋아했고 성격도 호방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명작들은 모두 술을 마신 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그린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같은 성격에 어울리게 그의 그림은 대담하고 시원시원하다. 대표작인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 외에도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잘 그렸다. 1636년과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쓰시마와 오사카 등지에 도착하자 김명국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있는 일본학자와 문인들이 몰려나와 그의 그림을 구하고자 했다. 김명국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일본인도 많았고 심지어 통신사의 숙소 밖에 줄지어 밤을 세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8세기의 화론가인 남태웅(1687~1740)은 <청죽화사聽竹畵史>란 저서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했다.

 

 

2018. 6. 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