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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오원 장승업의 그림 세계

새샘 2020. 8. 6. 22:04

'글 한 줄 읽지 못하는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

 

<장승업, 홍백매 병풍(10폭), 종이에 담채, 90×433.5㎝,호암미술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은 천애의 고아였다.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이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일찍이 부모를 잃고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한성까지 흘러들어온 게 스무 살 무렵이었다.

도성 안에서도 저자거리였다.

공부도 출신도 변변치 못한 그가 잡일을 거드는 일자리를 찾은 종루[지금의 서울 종로 2가 일대] 육의전六矣廛[조선 시대 전매 특권과 국역 부담의 의무를 진 여섯 시전市廛 즉 시장 거리의 가게로서 비단가게인 선전, 무명가게인 면포전, 명주가게인 면주전, 종이가게인 지전, 모시가게인 저포전, 해산물가게인 내외어물전을 말한다]에 발길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이밖에도 육의전에는 갖가지 생활 잡화를 파는 시전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가히 '조선의 만물상'이라 부르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시장이었다.

 

한데 이런 종루 육의전의 바닥에서 장승업이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아 정착한 곳은 '아주개'라는 종이 파는 지전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그리로 발걸음이 향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많은 전방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종이 파는 지전에 머물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운명과 조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종이와 함께 그림을 만나게 된다.

'아주개'라는 지전이 종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일반 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세화歲畵와 문화門畵, 예컨대 정초에 집안이나 대문에 내거는 그림 따위도 함께 팔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개'라는 지전에서 종이와 함께 세화와 같은 그림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장승업은, 그로부터 얼마 뒤 다시금 자리를 옮긴다.

도성 안의 수표교 근처에 있는 이응헌의 집에 머물며 일하게 된다.

이응헌은 당시 중인 계급으로 이른바 비양반 계층의 지식인인 여항문인이었다.

하지만 훗날 정2품 동지중추부 부사를 지낼 만큼 엄청난 재력가였다.

특히 중국의 유명 화가들의 옛 그림과 글씨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려는 사람들이 그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장승업은 그들의 수발을 드는 청지기 일을 맡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승업이 이응헌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은 이응헌의 집에 몇 차례 심부름을 오가면서 목격할 수 있었던, '보다 많은 화려한 옛 그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응헌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먼저 주인집 아이들이 글 읽는 것을 순전히 어깨 너머로 보고 들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글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천자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얼추 그 주변 얼마까지는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약간의 글만 깨우친 게 아니었다.

이응헌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수발하면서 그 자신도 알게 모르게, 아니 장승업의 눈길을 사로잡는 '보다 많은 화려한 옛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화가나 사대부들이 그림 그릴 때 교과서처럼 곁에 두고서 참고하던 그림 교본인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와 <고씨화도顧氏畵譜>를 훤히 깨었다.

더욱이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조맹부를 비롯하여 원말 사대가로 일컬어지는 왕몽, 오진, 황공망, 예찬의 그림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어깨 너머의 스승이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그림에 대한 젊은 그의 열정은 조선의 역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으로까지 그 외연을 넓혀 나갔다.

특히 자신보다 한 세기 먼저 살다간 단원 김홍도의 그림은 장승업에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스승이었다.

 

때문에 젊은 날의 장승업은 행복하기만 했다.

마당의 한쪽 구석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도, 시샘을 부리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앙증맞은 청개구리가 풀잎 위에 위태롭게 앉아있어도, 담장 너머 산자락에 흰 안개가 꿈 속처럼 내려앉아도, 찬바람에 눈보라가 하얗게 내려쌓여도, 사계절 어느 것 하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여항문인 이응헌의 집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수발드는 하찮은 일을 하고 있었으나, 젊은 그의 영혼만은 온통 그림 속에 젖어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인지 아무 까닭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식음마저 물리친 채 처마 밑에 오그리고 앉아 멍하니 먼 산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내면 속의 무엇이 자신을 그토록 자꾸만 먼 산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하는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오직 그림을 그리고 싶은 한 가지 열망에 좀이 쑤셔 생겨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속의 열병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귀를 번쩍 띄게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주인집 아이들이 글공부를 하다 강가에 사는 자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를 보고 물어온 것이었다.

장승업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이 본 자라의 생김새를 그대로 설명했다.

한데 주인집 아이들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얼굴이었다.

몇 번이고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보았으나 아직 본 적이라곤 없는 자라를 설명만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림으로 자라를 그려 보이면 어떻겠냐고 요청하여 주인집 아이들이 내민 붓자루를 집어 들고 널따란 흰 종이 위에 먹선을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종이 위에다 검은 붓을 내려 그림을 그려보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림을 미처 다 완성하기도 전에 지켜보던 주인집 아이들의 입에서 "아, 자라가 이렇게 생겼단 말이냐?"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명료하게 드러난 자라의 생김새도 생김새였으나, 그의 붓자루가 그려낸 예상치 못한 신비로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날 이후 주인집 아이들은 재미를 붙여 번번이 그를 불러 세상의 온갖 동물들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자꾸만 보채곤 했다.

장승업 또한 조금도 성가셔 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주인집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다가가 자신이 본 세상의 온갖 동물들을 하나하나 그려주고는 했다.

그러면서 다시금 그는 행복해지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처마 밑에 오그리고 앉아 먼 산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꿈속이나 마음속의 허공에만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그림이 모두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만 집주인의 눈에 띄고만 건 불행이었다.

집주인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과 어깨 너머로 보게 되면서 그림을 절로 배우게 된 것 같다는 얘기를 장승업에게 듣고서는 장승업에게 더 이상 그림 따위를 함부로 그려서는 안 되며 자신이 시키는 일만 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주인이 하루 종일 집을 비운 날 어느 날 한가한 몸이 된 장승업은 자신이 꼭 찾는 데를 들렀다.

그곳은 안방으로 통하는 작은 골방 사랑채로서 옛 그림을 사들이거나 팔 때 이용하는 비밀의 방으로, 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보다 많은 화려한 옛 그림' 중에서도 보다 진귀한 것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 작은 골방의 방문을 여는 순간, 장승업은 그만 한숨을 포옥하고 내어쉬었다.

어제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던 박 진사가 그리다 만 도화지며, 물감 그릇 따위들이 방안 한 복판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던 것이다.

 

장승업은 습관처럼 도화지며, 물감 그릇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방안을 으레 말끔히 정리 정돈해놔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도화지 앞으로 다가가 앉다말고 그는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도화지 상단 여백에 능란한 필력의 반행半行 흘림체로 화제까지 장황하게 써내려간 그림 위에 그만 눈길이 딱 멈추고 만 것이었다.

 

산수화였다.

천상에서부터 흘러내린 듯한 깎아지른 기암 절벽이 도화지의 한쪽 화면을 거의 메운 가운데, 나머지 한쪽 화면에는 기나긴 강줄기가 아스라이 펼쳐지는 구도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란한 필력으로 화제를 장황하게 써놓은 것에 비하면, 전체 그림은 아무래도 뭔가 빠져있는 듯 미치지 못해 보였다.

'조그만, 붓질을 조금만 더하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으련만....'

밀려드는 아쉬움에 그는 절로 날술을 길게 내쉬었다.

산수화 속에 빠져들어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했다.

'여긴 정자를 그려 넣어야 하고..., 아니 산모퉁이에 좁다란 산길을 내어 동자를 앞세운 선비가 나귀를 타고 가도 어울릴거야...'

 

다음 순간, 그는 움찔하며 산수화 속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으로 그린 자신의 그림이 어느새 산수화 속에 채워진 것을 바라보면 내심 만족한 듯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뿐 만이 아니었다.

마음을 따라 어느새 붓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잠시 갈등에 빠졌다.

'주인님이 아시는 날엔?'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어쩌면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도 마음속의 충동은 자꾸만 불끈불끈 일었다.

아직도 그대로 고여 있는 먹물이며 쪽빛, 주홍 물감의 그릇들이 그의 충동을 더욱 부채질했다.

'아니야. 감쪽같이 그려놓을 수만 있다면 아마 주인님도 못 알아 보실거야...'

 

그는 마침내 붓 끝에 물감을 적셨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산수화 속으로 들어간 그의 붓은 아이들 미끄럼타기였다.

마음속에서 이끄는 대로 기암 절벽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가 산길을 내고, 그 끄트머리 낭떠러지 위에 정자를 세웠다.

기나긴 강에도 생명이 넘쳐났다.

나룻배들이 강물 위에 떠가고,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래가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장승업은 다시 한 번 움찔하고 놀라워했다.

비로소 산수화 속에서 붓을 들어내어 물감 그릇 위에 얹어 놓으면서 또다시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 정말 내가 이걸 그렸단 말인가?'

하지만 언제까지 산수화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황급히 작은 골방을 빠져나왔다.

 

한데 그날 밤 늦게 귀가한 주인이 사랑채 골방에서 그를 찾았다.

어제 늦게까지 머물다 돌아간 박 진사가 오늘도 다녀갔는지를 물었다.

오늘 종일 찾아오신 손님이 없었다는 그의 대답에 주인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부터 방 한복판에 놓여 있는 그림 위에 날카롭게 꽂여 있었다.

 

필력이 이처럼 농후하지 못한 박 진사가 그린 그림이 아닌 것을 눈치챈 주인은 장승업을 추궁하여 사실을 알아내고서는

"이것은 곧 신이 내린 재주이니라. 신필이 아니고서야 네가 어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이냐?"고 말하는 주인의 음성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일찍이 내 사랑채를 드나들었던, 신통하다는 젊은이를 그간 여럿 보아왔으나 그 누구도 이런 그림을 그린 이는 아직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주가 아니냐!"

 

다른 건 몰라도 그림 볼 줄 아는 안목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이응헌이었다.

주인은 다시 한 번 그림을 일별하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손끝에서 나온 재주가 아니라 신기神氣가 결집되어 있는 숨은 힘이 느껴진다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업이 네가 그림 공부를 따로 어디서 받은 것도 아니건만, 네가 이런 그림을 그려낸 건 오직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이다.

앞으로는 이 이응헌이 너를 각별히 돌봐줄 터이니, 아무 걱정일랑 하지 말고 그저 그림에만 전념토록 하거라."

이 말을 들은 장승업은 당황스러웠고 차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응헌은 다음날부터 곧장 약속을 지켰다.

그에게 도화지와 물감을 내어주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을 뿐더러, 화가로서 기초 소양이 될 수 있는 그림 공부도 아울러 가르쳐 주었다.

 

서너 달이 지나 화가로서 어느 정도 기초 소양을 익히자, 이응헌은 박 진사를 사랑채로 따로 불러들였다.

비록 그림 솜씨는 시원치 않았으나, 그림에 대한 준법만은 그를 따를 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진사는 장승업에게 먼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감부터 가르쳤다.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감을 직접 물에 풀어 종이 위에 시연을 보이는 꼼꼼함을 잊지 않았다.

더욱이 그런 물감들은 다시 색도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색채를 얻을 수 있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다양한 색채들을 얻는 방법은 바로 개인의 눈썰미에 달린 것이며, 이는 수많은 붓질을 해서 스스로 터득하는 길밖에 없음을 장승업에게 가르쳤다.

 

그날 이후 장승업의 붓질은 날로 새로움을 더해 갔다.

타고난 그의 천재성이 원석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이응헌과 박 진사의 짧은 가르침은 그런 원석을 보석으로 바꾸어놓은 천둥벼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날이 다르게 몰라보게 변해가는 장승업의 천재성에 이응헌과 박 진사도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승업은 이응헌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살림집을 얻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찾아오는 발걸음이 심심찮게 생겨났다.

입소문을 타고서 벌써 장안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장승업은 찾아오는 이마다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림 값의 많고 적음을 떠나 원하는 그림이면 화조도, 산수화도, 강가의 '일품당조一品當朝'[당대 조정에서 벼슬이 일품이 오르다]인 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데 그의 그림에는 매번 한 가지 비어있는 게 있었다.

그림을 완성한 뒤 그림에 어울리는 그럴싸한 한시를 손수 지어 넣거나, 아니면 어느 시인문객의 한시라도 옮겨 적어야 마땅한데도 번번이 그러한 화제畵題가 빠져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자신이 손수 한시를 지어 넣지 못한다면 어느 시인문객의 한시라도 옮겨 적어야 했으나, 그러려면 웬만큼 글공부가 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승업의 글공부는 이응헌의 집에서 주인집 아이들이 글공부하는 걸 겨우 어깨 너머로 익힌 천자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정도의 수준으로는 자신이 손수 한시를 지어 넣는 것은 고사하고, 다른 이의 한시조차 옮겨 적기가 어려운 노릇이었다.

 

때문에 그의 그림 화제는 대부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림 화제를 써준 이가 그림마다 다 다른 까닭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불평을 말하는 이는 많이 않았다.

도대체 화제도 쓰지 못한다고 통박하는 이는 더욱 드물었다.

그만큼 그의 그림이 빼어났다는 얘기다.

화제가 없는 절름발이 반쪽 그림인데도 장승업의 그림이 당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얘기가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종이 위에 쏟아져 내린 천재성이 발견되면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장승업은, 그날 이후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그런 그의 그림을 구하려고 사람들이 잇달아 찾아들면서 수레의 말들이 그의 집 앞에 늘 북적거렸다.

그러나 장승업이 마치 허기 들린 사람처럼 오직 그림에만 몰두했던 건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 속에 그 이유가 고스란히 배어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그의 그림 속에는 서려있는 어떤 곡진한 그리움 같은 애틋한 감정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깊고 은은한 정서에 사람들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 있는지 모를 부모형제와 고향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 소리죽여 홀로 오열하는 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이면 더욱 미친 듯이 그림에 매달렸다.

모든 것을 잊고서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만 빠져들었다.

가슴속에 맺혀 있는 서러운 한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붓질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장승업의 그림은 사대부의 전유물인 문인화라기보다는 중국 진나라 때의 왕희지나 도연명이 천착했던 자연주의에 더 깊숙이 밀착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장기인 꽃과 동물 그림들 말고도 신선도가 적지 않은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그린 그림은 당시 여항문인들에게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충분한데도 사대부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여항문인들과의 정서가 절묘하게 맞닿은, 비록 현재의 삶은 곤궁하고 궁핍해도 왕희지나 도연명과 같이 삶의 여유를 누리며 살고자 하는 풍류 의식을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모두 다 그러하듯이 장승업의 그것도 결국에는 끝이 있었던 것일까?

허기 들린 사람처럼 수없이 그림을 그려내면서 가슴속에 품은 남모를 격정, 그리움 같은 것도 어느 정도 희석되었던 것일까?

아니 그렇듯 몸부림을 쳐도 끝내 영원히 가닿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부터인지 술 마시기를 마치 목숨처럼 여겼다.

그것도 한번 마시기를 시작했다 하면 언제나 몇 말씩이나 마셨는데,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지 않고는 끝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 한 폭을 그리다가 절반만 그린 채 집어치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단 술잔만 들었다 하면 그 자리에 쓰러지고야 말 때까지 퍼마셔댔던 것이다.

 

또한 그림을 그려 벌어들인 돈은 술집에 모두 맡겨 두고서 술을 찾곤 했는데, 그 술값이 얼마인지는 따로 계산하지도 않았다.

다만 맡겨 놓은 돈이 그만 바닥이 났다고 술집에서 알려주면 장승업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내가 마실 술만 가져다주면 그만이지, 딱히 술값을 또 따져서 뭐하겠는가? 어서 술이나 가져 오시게."

 

그런가하면 여색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성격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반드시 어여쁘게 분단장을 한 여인과 마주앉아 술을 따르게 한 다음에 붓을 들어야만 마음에 드는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데도 그의 명성은 좁처럼 시들 줄을 몰랐다장안의 여항문인들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사대부들에게까지 그 평판이 놓았다.

하기는 무엇인들 그리지 못한 그림이 없었다.

꽃과 동물, 새와 물고기, 산수화는 물론이거니와 신선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종이 위에 붓을 가져가는 순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빼어난 그림이 탄생하곤 했다.

 

이쯤 되자 그에게 찾아와 제자가 되길 원하는 이도 생겨났다. 안중식과 조석진이 그들이다.

특히 이들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스승을 위해 곧잘 그림의 화제를 대신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기보다는 그저 장승업을 흠모하여 자주 찾아와 만나는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한사코 홀로이기만을 원하는 장승업의 성격 때문이었다.

 

한데도 그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가면서 종래에는 그림 잘 그린다는 소문이 사대부들 사이를 넘어 대궐에까지 들렸다.

민영환 대감의 집사가 득달같이 장승업을 찾아와 날이 밝는 대로 의복을 차려입고서 민 대감 집으로 오도록 당부한 것이었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그 소식에 기뻐한 반면 장승업은 제자 둘 가운데 누군가가 대신 궐에 들어가기를 바랬다.

그것은 구중궁궐에서는 술과 계집을 가까이 할 수 없음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부름은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어 날이 밝자 그는 억지 걸음으로 민영환을 따라 입궐했다.

오래지 않아 고종을 알현한 장승업은 궐에서 쓸 열넷 폭자리 병풍 그림을 의뢰받았다.
그날부터 꼼짝없이 궐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만 장승업에게는 그야말로 부족함이라고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술과 계집은 철저히 금지된 생활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궁리 끝에 의심을 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그는 그림물감을 구하러 간다고 수문장을 속여 대궐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하짐나 술과 여색에 빠져 하룻밤도 채 보내지 못하고 기찰포교들에게 붙들려 대궐로 끌려들어 왔다.

장승업은 다시금 탈출을 계획하여 이번에는 자기 옷을 벗어놓고 자신을 지키던 포졸의 옷을 몰래 바꿔 입은 뒤 대궐을 빠져나왔지만, 또다시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대궐로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몇 차례 탈출이 반복되자 마침내 고종이 진노하여 의금부 도사를 시켜 붙잡아오도록 어명을 내린 것이었다.

 

다행히 평소 장승업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민영환이 그를 가까스로 구원해 주었다.

장승업에게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대궐이 아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궁궐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조한 것이다.

민영환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장승업의 옷가지를 모두 감추어버리고 자신의 별당 안에 가두어 놓고서 몸종을 시켜 엄하게 지키도록 했는데, 대신 술만은 날마다 넉넉하게 주되 취해 떨어지지는 않게 했다.

 

그 역시 처음 한동안에는 민영환이 자신을 믿어주는 것에 감격해서 정신을 모두우고 그림에만 정진했다.

그러면서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는 버릇을 이제는 그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마 아니 되어 엉뚱한 생각을 키우고는 청계천 가 주점으로 달아나 숨었다.

민영환은 그럴 때마다 사람을 시켜 장승업을 붙잡아왔다.

 

장승업의 나이 마흔 살이 되던 해 민영환은 결혼을 권했고, 기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 좋겠다고 생각한 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단 하룻밤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난 아내가 뜬금없이 닭이 먹고 싶다고 하자 장승업은 곧바로 자리를 잡고 앉아 종이 위에 닭 한 마리를 단숨에 그려놓았다.

그 닭 그림을 본 아내가 먹을 수 있는 닭을 내놓으라고 하자 장승업은 결혼집 마련하느라 가진 돈을 다 써 버렸으니 나중에 사 주겠다고 아내를 달랬지만,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철없는 어린 아내는 그만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장승업은 괴이하게 생긴 괴석 옆에 맨드라미 두 송이가 붉게 피어 있고, 괴석 아래에는 화려한 깃털을 한 장닭과 검은 암탉이 정답게 모이를 쪼고 있었으며, 한 쌍의 닭 옆에는 푸른 대나무가 청정하게 서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에 없이 밝은 눈빛과 진지한 붓놀림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스승의 모습을 본 안중식과 조석진은 어느 대감 댁에서 의뢰받은 것이냐고 물었으나 장승업은 아무 답변 없이 다만 시 한수를 독백처럼 입안에서 중얼거렸을 따름이었다.

 

생야일편부운기 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그 뜬구름이 없어짐이라

부운자체본무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으니

생사거래역여연 生死去來亦如然 태어남과 죽음, 오고 감도 또한 이와 같은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노래하는, 무학대사가 지었다는 '부운浮雲'이란 시였다.

그런 뒤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난 어느 새 온 세상의 것을 다 그리고 만 것 같네. 그러니 이젠 천상의 것이나 그릴 걸세."

"무슨 말씀인신지 저희는...."

 

안중식과 조석진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스승의 이상한 태도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내가 이 그림을 다 그리거든, 자네들 가운데 누가 가겠는가? 자하문 바깥 주막집엘 말이네?"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석진이 선뜻 대답하고 나섰다. 자하문 바깥 주막집이라면 필시 그녀가 틀림없었다.

사십 줄에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하룻밤으로 끝나고 만 장승업의 옛 아내를 두고 이른 말이었다.

"그럼 자네는 이 그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주게."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조석진은 좀 더 나중에 물으려 했었다.

하지만 왠지 오늘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장승업을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얼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스승은 조석진에게 관심을 보였다.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부님께 꼭 묻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무얼 말인가?"

"그냥 단도직입으로 묻겠습니다."

"암. 어디 우리 사이가 십년, 이십년인가?"

"사부님께서도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글도 알지 못한 가운데,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스승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그리 알고 싶었는가?"

조석진은 머리를 수그렸다. 안중식 또한 스승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승업은 그런 그들에게 창문을 열게 했다. 창문 너머 펼쳐지는 먼 산을 바라보도록 했다.

"이제 보이는가?"

"무얼 말입니까?"
"저 재 너머 솔바람 소리가 말일세..."

"...?"

"저 재 너머 솔바람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기 저 보이는 것 말이네."

"저희는...?"
"자세히 보게. 저기 저..."

"저희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자세히 보라니까, 자세히. 그럼 자네들의 눈에도 반드시 보일 것이니."

 

장승업은 순전히 재 너머 솔바람 소리를 보고 따라 그렸을 뿐이라고 했다. 오직.

 

※이 글은 박상하 지음, '조선의 3원3재 이야기'(2011, 일송북)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20. 8. 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