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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신화' 이용해 이미지 조작에 성공한 히틀러

새샘 2020. 8. 4. 17:22

<1933년 우편엽서에 나타난 나치의 영웅계보-"왕(프리드리히 2세)이 획득하고, 수상(비스마르크)이 틀을 잡고, 장군(힌덴부르트)이 방어한 것을, 병사(히틀러)가 구원하고 통합한다"고 씌어 있다. 나치는 18세기에 프로이센을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만든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달성한 비스마르크, 1차 세계대전의 영웅 힌덴부르크 등의 이미지를 교묘히 이용했다. 출처: https://www.lookandlearn.com/history-images/M359726/Nazi-propaganda-postcard-1933>

 

1933년 4월 1일은 나치 제3제국 출범 후 처음 맞이한 비스마르크 Bisamarck(1815~1898)의 생일이었다.

나치는 모든 매체를 동원해 이날을 경축했고, 선전장관 괴벨스는 라디오을 통해 독일 민족의 놀라운 재탄생을 역설했다.

그는 "비스마르크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국정의 혁명가였고, 히틀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국정의 혁명가"라면서 히틀러 Adolf Hitler(1889~1945)를 비스마르크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4월 20일에는 히틀러의 44세 생일을 맞아 전국적 축하행렬이 벌어졌다.

수많은 도시의 거리와 광장은 생일축하 플래카드와 화환으로 뒤덮였고, 국민들은 마치 전통적 축제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날을 축하했다.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오랫동안 고대해오던 강력한 지도자가 마침내 등장한 것 같았다.

이런 국민적 열광은 한 나라의 수상에 대한 의례적인 축하의 수준을 크게 넘어선 것이다.

베를린의 한 신문은 "비스마르크의 업적은 히틀러에 의해 완성되었다. 독일의 통일 국가는 현실이 되었다"고 썼다.

 

1933년 4월 12일, 보훔 시는 히틀러에 대한 보훔 시 명예시민권 수여를 제안하면서 그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

"현재 수상 히틀러는 비스마르크 이후 독일의 그 어떤 수상에게도 붙일 수 없었던 '민족의 수상' 호칭으로 불러 마땅하다.

그는 비스마르크 업적의 완성을 처음으로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의식적으로 비스마르크와 비슷한 포즈를 취했고, 자신을 그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제껏 주변적 인물에 불과했던 히틀러는 비스마르크 숭배를 통해 스스로를 철혈 재상의 상속자로 매김함으로써 정통성을 얻고 독일 보수 세력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집권 초기 아직 지도자로서 정치적 기반도 카리스마도 없었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이끌었던 상징적 지도자들인 프리드리히 2세,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과 정통성에 기대야만 했다.

히틀러의 성공 비결은 독일 역사상 강력한 지도자들의 정치적 신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데 있었다.

호전적 군국주의자들이었던 이들의 영웅주의와 희생정신은 궁극적으로 히틀러의 정복전쟁을 정당화시켜 주었고,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비스마르크 제국은 무질서, 혼란, 경제적 파산 등으로 점철된 바이마르 공화국과 대비되면서 독일 보수 세력에게 권위, 질서, 군국주의 등을 떠올리게끔 했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이 같은 프로이센 전통 수호자로 연출함으로써 자신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던 보수적 시민계급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치는 그 후 끊임없이 비스마르크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선전에 끌어들였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나치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춰진 이미지였을 뿐이다.

 

독일에 비스마르크 신화가 있다면 한국은 박정희 신화가 있다.

2013년 10월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소생하게 하려는 애절한 초혼가가 울려 퍼졌다.

손병두 박정희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이 먼저 나섰다.

손 이사장은 "아직도 5·16과 유신을 폄훼하는 소리에 각하의 심기가 조금은 불편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태산 같은 각하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질세라 새누리당 심학봉 의원은 추도사에서 "아버지 대통령 각하"라고 말한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4년이 되었다.

아버지의 딸이 이 나라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박 전대통령이 구국의 결단을 할 때 나는 교사여서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 대단한 어른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하며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경북도지사 경선에 출마한 박승호 전 포항시장은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고 '김천구미역'을 '박정희역'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정희 사망 후 한 세대를 훌쩍 넘긴 시점에서 이렇듯 '박정희 신드롬'이 강고하게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는 등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와 민주화 과정은 국민 대다수의 실질적 삶의 조건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자의 절반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는다 하더라도 그 중 절반은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안정된 일자리를 얻더라도 나이 40에 이미 퇴직을 준비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경험한 민주화 과정은 자기 모순에 놓이게 된다.

 

국민 다수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지 못함으로써 민주화는 상당수 대중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정치적 수사를 믿지 못하며,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민주화의 성과와 전망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이 같은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실패야말로 일부 기득권 세력과 대중 사이에 퍼지고 있는 '박정희 신드롬'의 진원지일지도 모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기화로 히틀러가 비스마르크 신화를 이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8. 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