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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 발굴 양상

새샘 2021. 8. 15. 08:12

<198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복원을 위한 발굴 시대

 

1980년대 실시된 궁궐 들의 서울 발굴은 유적 자체를 복원하기 위한 목적의 조사라 할 수 있다.

이 발굴조사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발굴과 복원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복원을 위한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로서, 경희궁 발굴이 대표적이다.

발굴보고서에서 확인되는 경희궁의 발굴조사와 복원 공사의 동시 진행, 거기에 경희궁 터에서 서울역사박물관의 건축공사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은 이 발굴조사의 목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발굴 양상

 

1970년대에 잠실지구 등 이른바 '강남 개발'을 위한 광범위한 지역의 도시화를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면, 1980년대는 이전과는 달리 조선시대 궁궐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지역을 보면 이전까지 이른바 한강 남쪽 지역인 강남 지역에 대한 발굴에서 강북으로 발굴 장소가 확대된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에 파괴되고 훼손되어 원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된 궁궐들을 복원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궁궐에 대한 복원 사업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도 관련이 있다.

 

1980년대에 가장 먼저 실시된 발굴조사는 석촌동 고분군이었다.

석촌동 3호분은 1974년에 이미 부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83년과 1984년에 2차에 걸쳐 다시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의 목적은 서울시가 백제유적 정화·보존사업을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석촌동 고분군을 백제고분공원으로 복원하려는 계획을 갖고 1986년 석촌동 3호분 동쪽 지역 고분군을 조사하여 다양한 형태의 묘들을 확인하였다.

1987년에도 석촌동 고분군 일대에 대한 조사가 마지막으로 실시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석촌동 고분군의 모습은 이때 발굴한 결과물이다.

 

1960년대와 1970년에 꾸준히 발굴이 진행된 암사동 유적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983년에는 암사동 유적의 선사유적 공원화를 추진하기 위한 야외전시관 건립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1984년에는 1970년대에 발굴한 집터를 복원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얻고자 다시 발굴이 이루어졌다.

현재 우리가 암사동 유적에 가서 볼 수 있는 움집은 이때의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한 체육시설 건립이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확정되었다.

이때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은 몽촌토성을 유적공원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983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위한 예비조사를 시작으로 1984년에 몽촌토성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4개 대학이 지역을 나누어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발굴이 끝난 후 몽촌토성의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복원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1985년부터는 토성 내부 등에 대한 발굴도 꾸준히 진행되어 1989년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몽촌토성은 그동안 논쟁점이었던 한성백제의 유력한 도성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창경궁 발굴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유원지인 창경원으로 몰락하고 1983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이름을 되찾았다.

1984년 서울대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창경원의 동물원이 이전하였고, 궁궐 안의 동물원·식물원·놀이터의 시설들을 철거하면서 궁궐의 복원·정비를 위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중건重建[보수하거나 고쳐 지음]을 위한 조사였다.

조선시대 궁궐의 복원사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이후 1985년에는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사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거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고, 광복 이후에도 민간기업[현대건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늦었지만 서울시에서는 경희궁 복원사업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한 발굴조사가 1985년, 1987년, 1989년. 1990년에 실시되었다.

경희궁 복원을 위한 발굴은 1990년대에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경희궁에 이어 경복궁에 대한 발굴조사도 1990년에 시작하였다.

경복궁도 잘 알다시피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훼손·변형되었다.

조선시대 법궁法宮[정궁正宮, 제1궁궐 즉 으뜸 궁궐]이었던 경복궁에 대한 복원·정비가 광복 후 45년만에 시작된 것이다.

처음 조사한 지역은 침전 지역으로 경회루 동쪽이자 사정전에서 아미산까지였다.

침전 지역에 대한 조사는 1991년까지 총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987년에는 한강 주변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낙천정 등 5개 유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복원 내용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발굴보고서의 형식이나 내용이 매우 간단하고 구체적이지 않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조사였다.

 

1989년에는 봉화 정씨 문중의 요청으로 정도전 관련 묘로 추정되는 묘역들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총 3기의 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정도전의 묘임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도전의 죽음과 관련하여 발굴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1990년에는 통일신라 산성으로 추정되는 호암산성과 산성 안의 한우물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이는 서울시가 한우물을 정비·복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서울 지역의 고대사는 주로 백제사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서울 고대사를 이해하는 다양한 자료들이 발굴되어 서울 고대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 조사였다.

 

현저동의 옛 서울구치소에 대한 발굴조사도 1990년에 실시하였다.

이는 서울구치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다음 활용 방안을 위한 조사로, 조사 범위는 전체가 아닌 유관순 열사가 옥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여사女舍[여자 죄수가 있는 건물] 일부였다.

지금까지의 조사 유적들이 주로 근대 이전의 유적들이라면 이 발굴은 반가운 조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서울 지역의 발굴 대상이 근대 유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1980년대 서울 지역 발굴조사는 1970년대 개발을 위한 발굴에서 복원을 위한 발굴로 그 조사 방향의 전환점이 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발굴 지역의 확대

 

1980년대 국가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가장 큰 사건은 '88 서울올림픽' 개최였다.

올림픽 개최는 서울이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된 국제적 행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발굴조사에도 어는 정도 영향을 준 듯하다.

이는 복원을 위한 발굴이 주로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구제발굴은 사업을 시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조사인 반면, 구제발굴은 사업 성격과 그 목적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을 위한 발굴 목적이 지역 구획 정리를 위한, 즉 사업 자체를 수행하기 위한 조사였다면, 1980년대 실시된 궁궐 등의 유적 발굴은 유적 자체를 복원하기 위한 목적의 조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조사의 성격은 1980년대 발굴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서울의 중요 유적 가운데 상당히 많다.

석촌동 고분군, 암사동 유적, 그리고 조선 궁궐인 창경궁과 경복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이전에 발굴이 실시되지 않았던 조선 궁궐들과 몽촌토성은 1980년대의 발굴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즉 파괴된 궁궐을 복원하고, 그동안 방치되었던 몽촌토성을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발굴조사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발굴과 복원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즉 '복원을 위한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희궁 터 발굴이다.

발굴보고서에 확인되는 경희궁의 발굴조사와 복원 공사의 공사의 동시 진행, 거기에 경희궁 터에서 서울역사박물관의 건축공사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은 이 발굴조사의 목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치 1970년대 강남 개발을 위한 발굴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1980년대 발굴 이후 복원된 유적들이 과연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었는가 하는 의심이다.

즉 복원을 통해 그 유적의 원형을 구현하거나 그 유적만의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각 유적별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많은 연구자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유적은 경희궁일 것이다.

경희궁은 1990년대까지 발굴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금 경희궁은 복원되었다.

과연 지금 우리가 보는 경희궁은 제대로 된 모습일까?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런 경희궁 복원을 1980년에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복원된 경희궁에서 다른 궁궐과 같이 조선 궁궐로서의 품위와 위엄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정문마저도 다른 곳에 엉뚱하게 세워놓았고, 현대식 서울역사박물관이 궁궐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안 하느니 못하다는 말은 경희궁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안 하느니 못한 유적 복원이었다.

 

암사동 유적 또한 아쉬움은 남는다.

사실 암사동 유적은 6천 년 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여주는 서울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신석기시대 움집을 복원해놓아 당시 집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문제는 복원된 집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다.

신석기 문화의 특징은 강가 생활이다.

그러나 암사동 유적에 가면 한강과의 친밀성은 전혀 못 느낀다.

올림픽대로 때문에 암사동 유적과 한강이 서로 분리되어 있어 아쉽기만 하다.

 

몽촌토성 발굴은 몽촌토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올림픽 체육시설이 이 지역에 건립되고, 올림픽공원이 들어서면서 유적을 보존하기로 결정한 결과였다.

이것은 발굴조사가 체육시설을 포함하여 올림픽공원 조성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복원된 지금의 몽촌토성이 토성만의 특징적인 모습을 잃어버리고 공원에 어울리는 예쁜 유적으로 조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물론 1970년대 잠실지역 개발 때 매립용 흙이 부족하여 몽촌토성을 굴착하여 사용하려고 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정도로 보존된 것은 당시 문화 인식 수준에서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학술적으로 발굴보고서에 몽촌토성을 유력한 한성백제 도성으로 성급하게 비정比定[비교하여 그 성질을 정함]함으로써, 이후 풍납토성을 백제 도성에서 배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다.

 

1980년대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한강변의 누정樓亭[누각과 정자]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발굴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누정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가 부족하고 복원 방안도 무분별하다시피 할 정도로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낙천정樂天亭으로서 발굴단의 복원 방안에 따라 복원되었고, 서울시 기념물로도 지정되었지만 2009년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조사 결과 원래 위치도 아니었고, 건축 양식 또한 조선 전기 양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복원을 위한 복원의 한 예다.

 

이렇듯 아쉬움도 많지만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유적들은 대부분 1980년대에 발굴조사하고 복원된 결과임은 분명하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8.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