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능호관 이인상 "설송도" "송하관폭도" "수석도" "송하수업도" 본문
자를 원령元靈이라고 했던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은 두 책으로 된 문집이 전하고 있어서 사람의 됨됨이나 교유 관계 등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또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던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능호관의 가계, 인물, 작품 등 생애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이인상은 소위 삼절三絶로 불린다.
시도 잘 하고, 글씨–전서–도 잘 쓰고. 그림도 아주 독특하다.
이인상의 그림은 실재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그림인 사실寫實이 아닌
자기 마음이 가지고 있는 뜻을 표현하는 그림인 사의寫意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사의 그림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인상에 와서 사람의 뜻을 그리는 사의 그림이 많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능호관은 꽤 까다로웠던 사람이었다.
효종의 뜻을 받아서 북벌론에 찬성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청나라에 대해서 아주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청조 문화 유입에 대해서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의 초상화가 있는데, 눈 맵시가 아주 까다로와서 세상을 상당히 백안시하고 살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일반 사대부들은 이 사람의 배청 사상, 그 지조를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추사 김정희도 이 사람의 이런 면을 인정했었다.
또한 추사는 이 사람의 예서법과 화법에 대해 문기文氣(문장의 기세) 충만한 문인화가라고 해서 높이 평가했다.
대개 문인화라고 하는 것에는 사의적인 요소가 꽤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화원이나 전문가의 그림들은 주로 사실적이다.
훤칠하게 뻗은 낙락장송落落長松(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이 눈앞을 턱 막고 섰다.
그 소나무 참으로 반듯하구나.
곧기가 전봇대 같은 것이 기개가 치솟아 화폭을 뚫었다.
나무 윗부분이 화면 너머로 툭 잘렸으니 그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심산인가.
나무 위로 소복소복 눈이 내렸건만 추운 기색은커녕 늠름하기만 하다.
옅고 맑은 먹으로 그린 데다 눈 내린 설경이지만, 독야청청 푸르른 잎은 망설임이 없다.
실제 푸른 색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 매서운 바람이 나무의 푸른 서슬을 더 돋군다.
사찰 입구를 지키는 일주문 기둥처럼 나무 줄기는 듬직하고 곧으나 성긴 그 가지는 굵은 뼈마디처럼 울룩불룩하다.
그린 이의 곧은 심성과 삼엄한 골기骨氣(뼈대와 기질)를 보여주는 나무다.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는 자극적인 볼거리도 숨은 꼼수도 없는 그림이다.
여명도 석양도 아닌 때 모를 시간에, 햇빛과 달빛 중간쯤인 듯 주변은 어슴푸레하다.
살짝 일어난 바람이 내려앉았던 눈발을 안개처럼 흩어놓아 주변을 자욱하게 덮었다.
그럼에도 두 그루 소나무는 독야청청 산을 지킨다.
어쩌면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려 그린 그림이 아니라 혼자 보면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듣는 이 없어도 홀로 연주하는 음악처럼 보는 이 없어도 자기 수양을 위해 그린 그림은, 거울처럼 작가를 곧추 세웠다.
그렇게 떡하니 버틴 대찬 소나무 기세 뒤로 노송은 허리가 휘듯 드러누웠다.
긴 세월 모진 풍상 겪으면서도 버티고 또 견뎠다.
곧은 나무의 누운 나무가 거의 열 '십十' 자 구도를 이룬다.
기묘하다.
결코 부러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휜 나무의 등걸 위로도 눈이 쌓였다.
비애감을 느끼게 하는 굽은 줄기지만 가지 끝 이파리만은 총총하니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작품이 곧 인품이라 했다.
능호관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절로 이 기묘한 그림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의정까지 지낸 그의 고조부는 병자로한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인조를 호위했고, 무력으로 세워진 청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를 받들어 '천하의 큰 의리'를 강조한 인물이다.
이후 줄줄이 3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하며 조선 4대 명문가로 꼽힌 집안에서 이인상은 태어났다.
그러나 증조부가 서자였다.
출세의 한계가 있는 데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가난하게 살았다.
그럼에도 학문에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고 명문가 후손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그 성실함과 우수함, 굽힐 줄 모르는 지조가 사대부들의 존경을 샀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 이인상의 전세살이가 안타까웠던 친구 몇이 서울 남산 기슭에 집을 마련해줬다.
그는 대문 위 편액에 '능호凌壺'라 적었고 능호관이란 호를 사용했다.
비록 서출이지만 노론의 골수였던 가문의 영향은 그의 뼛속 깊이 자리잡았다.
능호관의 <설송도>가 보여주는 꼿꼿한 소나무는 이런 그의 신념에서 움텄다.
그러면 이번에는 사람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자.
<설송도>의 두 소나무는 이인상 자신이다.
올곧은 성품은 대쪽보다 더 꼿꼿한 소나무요, 신분의 제약이나 이념적 핍박에도 부러지지 않고 견딘 허리 휜 노송이기도 했다.
그는 담백함과 담담함이 특색인 그림을 그리기 전, 쌀가루를 탄 물에 종이를 적셔 다듬이질해 종이 빛을 맑고 깨끗하게 했다고 한다.
그 효과 때문인지 그저 하얗지만은 않은 눈 색깔이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
담담함 속에 완고함이 혼재하고 옅은 분위기 속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느껴지니 이인상 맛이 가장 많이 나는 그림인 동시에 마치 추사의 세한도를 보는 듯하다.
잎사귀는 까칠까칠하고 뿌리가 박힌 바위는 깨진 얼음처럼 예리하다.
흙 한 줌 없이 척박한 바위 무더기라 그 속에서 자라난 소나무가 더 장하게 여겨진다.
'설송도' 못지않게 기이한 능호관의 그림으로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를 꼽는다.
이것은 제법 짜임새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인상 답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바위와 폭포를 배경으로 오랜 세월을 지켜온 낙락장송이 눕듯이 기울어 폭포를 내려다본다.
휘어진 등걸은 늙은 용의 등껍질 같고 가지는 이러저리 굽었도 솔잎만은 선명한 푸른빛이다.
능호관은 잎줄기의 유려함이 제맛인 묵란을 꼿꼿한 수직으로 세워 그리는가 하면, 겨울까지 버티다 야위고 병든 병국도病菊圖를 그리기도 했다.
하나같이 독특한 이들 그림은 모두 작가 자신을 빗대 보여준다.
나무와 바위를 그린 그림 <수석도樹石圖>는 종이 위에 수묵으로만 그린 그림으로서 역시 담담하고 담백하여 이인상 맛이 나는 그림이다.
그런데 능호관의 그림 가운데 미스테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위에 있는 <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라는 그림이다.
그림 왼쪽 위에는 '능호凌壺'란 낙관落款(글씨는 그림 따위에 작가의 이름이나 호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 또는 그 호나 도장이 찍힌 것)과 도서圖署(책, 그림, 글씨 따위에 찍는 일정한 격식을 갖춘 도장)가 있고, 오른쪽 나무의 중간 오른쪽을 보면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1822)의 도서만 찍혀있다.
이 그림이 미스테리인 것은, 틀림없이 능호관 이인상의 필치라고 생각되는 소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무 앞 인물들은 거의 긍재가 그린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능호관이 좀 심심하게 그린 소나무 바위 같은 그림에다가 몇 십 년 후 긍재가 보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이 그림은 짜임새도 있고, 풍속으로서도 독특한 속화에 속한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서울경제 인터넷판 2018-01-12 입력 '조상인의 예'(https://sedaily.com/NewsVIew/1RUEEULIVK)(설송도, 송하관폭도)
3. 구글 관련 자료
2021. 8. 1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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