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6: 경희궁 터 본문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자.
어린 시절, 우리 기억 속에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은 어디어디인가?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이렇게 4곳의 궁궐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경희궁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예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조선시대 궁궐로서 경희궁이란 이름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예전 기억은 궁궐로서의 모습이 많이 훼손된 경복궁이나 창경궁과는 달리 경희궁은 훼손이 아닌 폐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희궁慶熙宮은 광해군 9년인 1617년 경덕궁慶德宮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어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화재로 대부분 타 버린 것을 1831년(순조 31년)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경성중학교로 변하면서 이곳은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발굴 당시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은 동국대의 정각원이 되어 있었고, 궁궐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호텔신라의 출입문으로, 그리고 궁중 활터였던 황학정黃鶴亭은 사직공원의 활터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에도 이 자리에는 경성중학교를 이어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발굴 당시에는 대기업인 현대의 인력개발원이 들어서 있었다[새샘이 1980년대 이곳에서 근무하던 당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국가에서는 늦게나마 이곳 경희궁 터의 보존을 위해 1980년 9월 16일에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고,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건립안에 따라 단국대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발굴 기간은 1985년 8월 7일부터 11월 20일까지인데, 발굴단은 이번 조사는 앞으로의 본격 발굴을 위한 시굴임을 밝히고 있어 이후 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하였다.
발굴 범위는 A에서 G까지 7개 지구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A 지구는 발굴 당시 식당과 강당 사이의 빈 땅, B 지구는 강당과 후관 사이의 빈 땅, C 지구는 후관과 본관 사이의 빈 땅, D 지구는 발굴 당시 교육위원회 동쪽 지역, E 지구는 현대건설 정문 동쪽의 화단 지역, F 지구는 대운동장 북쪽 스탠드 지역, G 지구는 대운동장에 있는 우물터인 용비천 위이다.
이번 조사는 대상 범위가 총 98,478제곱미터(29,787평)로 넓은데 53개의 트렌치 trench[바닥을 파서 설치한 도랑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를 설정하여 단기간 동안 진행하여 무리가 있었으며, 특히 발굴 당시 현존하는 시설물을 그대로 두고 빈 땅에만 조사 범위를 한정하여 파낸 흙을 처리할 수 없었음은 큰 애로점이었다고 발굴단은 소감을 피력했다.
발굴 결과를 조사 지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지구의 조사에서는 발굴 당시 있던 식당 건물과 강당 사이에는 숭정전과 그 부속건물이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확인된 중요한 유구로는 어계御階[왕이 다니는 계단]와 함께 있는 돌계단인 월대越臺[궁궐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로서, 이것은 2층 기단 중 아랫단으로 생각되며, 발굴 당시의 전체 길이와 폭은 후대에 증축되면서 원형과는 다른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박석薄石[얇고 넓적한 돌] 통로의 다짐돌의 폭은 약 25센티미터 정도였고, 그 길이는 강당 속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11미터까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월랑月廊(행랑: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터 원형 주춧돌 2점이 드러나 있었고, 여기서 월랑 터의 지반도 확인되었다.
또 2곳에서 암거暗渠(속도랑: 땅속에 있는 도랑) 배수구가 노출되기도 하였다.
B 지구에서는 발굴 당시의 강당과 후관 사이의 언덕에서 숭정문 터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주춧돌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 여섯 군데가 노출되었고, 그 아래로 숭정문 계단 터도 확인되었다.
한편 자연암반을 이용한 작은 연못 터와 배수구가 노출되었는데, 일제강점기의 것으로 추측하였다.
C, D, E 지구는 교란 상태가 심하여 의미 없는 잡석과 시멘트 기초가 드러났다.
F 지구에서는 건물 터의 석렬石列[비슷한 간격으로 길게 줄지어 늘어선 돌 무리]이 노출되었으며, 출토유물의 연대가 다른 지구에 비해 상한인 유물이 노출되었다.
G 지구에서는 판축의 토층이 노출되었으나 용비천龍飛泉 우물과의 연관성은 확인하지 못했다.
출토유물은 기와와 자기 파편이 주종을 이루고, 철기, 석기, 토기 등도 조금씩 출토되어 모두 1천여 점이 수습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이며, 17세기 때 유물이 가장 많았다.
발굴단은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비·복원을 위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발굴단은 경희궁이 일제강점기에 철저하게 궁터가 파괴되어 주춧돌마저 거의 없기 때문에 궁궐 터의 전면적인 원위치 및 상태 파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발굴단은 몇 가지 의견만을 제시하여 나중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비·복원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미 이때 발굴단은 경희궁 복원에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 조사 결과 중요한 유구가 발굴 당시 존재하는 건물로 이어지고 있어서 본격적인 전면 발굴은 불가피하며, 발굴 당시 현존하는 건물의 철거를 전제로 해야 한다.
둘째, 나중에 본격 조사가 진행되면 정전인 숭정전은 원래 위치로 복원 가능성이 있으나 흥화문과 황학정의 원래 위치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발굴단은 경희궁 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새로운 것들이고 다양하므로 출토품은 보존책이 시급한 바, 관계기관의 협의와 검토를 거쳐 경희궁 터 박물관을 세워 일반에게 공개하고 아울러 영구보존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런 발굴단의 견해는 이후에 채택되어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된다.
물론 발굴단은 복원에 한계를 느끼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곳에 박물관을 세우는 것이 차선책이라 판단한 듯하다.
과연 복원이 힘들면 궁궐 터에 현대 건축물인 박물관을 세우는 것이 차선책일까?
이어 1987년에 2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번 조사의 발굴 범위는 1985년 1차 발굴 지역을 제외한 경희궁 터 전체 약 3만 평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에 조선시대 자료를 바탕으로 7개 지역에 90여 개의 트렌치 조사를 하였다.
발굴 범위가 넓어 1차 조사 때처럼 시굴조사의 성격을 지녔다.
발굴 결과를 조사 지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개 지역 중 발굴조사는 대운동장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운동장 지역은 H~N 지구로 나누어 조사했는데, 2개의 건물 터를 비롯하여 담장 터, 배수구 등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건물 터의 상부 구조는 대운동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모두 제거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발굴 당시에는 적심, 신방석信防石(신방돌)[일각 대문一角大門(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의 신방(대문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각 대문의 기둥 밑에 좌우 양쪽으로 받친 짧은 침목)을 받치는 돌], 기와 파편 등이 불완전하게 남아 있었는데, 발굴단은 ≪서궐도안西闕圖案≫의 전각 배치도와 비교한 결과 발굴된 건물 터는 현모문顯謨門 일원으로 추측하였다.
그밖에 대운동장의 N 구역에서 우물자리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대운동장 지역 외에 시청축구단 숙소 서쪽(Q 지구)에서는 숭정전 동쪽 행각의 담장 터로 추정되는 유구가 노출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돌벽 사이의 일부에는 회를 발랐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출토 유물은 1차 조사 때와 비교될 만큼 풍부하였다.
대부분이 기와 파편이며, 자기 파편도 적잖게 출토되었다.
확인된 유물은 기와 262점, 벽돌 18점, 도자기 217점, 기타 유물 11점 등 모두 508점이다.
발굴단은 보고서 끝에 장비·복원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경희궁 내 전각의 위치와 규모 등의 고증과 관련해서는 경희궁의 모든 전각들이 철저히 파괴되어 완전무결한 원래 위치의 고증은 실지로 불가능하며, 단지 이번 조사를 통해 숭정전 터, 월대, 숭정문 터, 동쪽 행각 터 일부와 행각 동쪽 담장 터, 현모문 일대의 건물 터, 담장 터 및 배수구 등은 확인되었다고 했다.
정비·복원 방향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첫째, 이전이 가능한 건물로는 숭정전[동국대 안의 정각원], 흥화문[발굴 당시 신라호텔 출입문], 황학정[발굴 당시 사직공원 안]이 있다.
이 가운데 원래 위치가 확인된 숭정전의 복원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둘째, 숭정전 복원 때 주변 지역의 정비가 필요하다.
단, 강당과 식당 일대는 숭정전의 정전 안에 포함된 지역이므로 이들에 대한 정비 때에는 발굴조사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숭정전 이외 대운동장의 건물 터, 담장 터, 배수구 등은 후세의 교육자료로 활용한다.
마지막 다섯 째, 경희궁의 궁성 범위를 알려주는 유일한 직접 증거는 신문로2가와 당주동의 경계 지점, 그리고 신문로2가와 내수동의 경계 지점에서 조사된 궁성의 일부뿐이다.
이의 훼손을 막기 위해 주변 지역을 정화하고 인근 주민에게 귀중한 문화재임을 인식시키는 방안이 수립되어야 하며, 파괴된 일부 궁성은 보수작업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발굴단은 사적지로서의 조성 방향과 시립박물관 및 미술관의 건립 지역 선정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박물관 부지로 유적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 대운동장 남쪽 지역과 유구가 거의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영장 일대를 제시하였다.
반면 경희궁 터에 '현대적인 색채의 미술관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재고를 요한다고 하였다.
결국 발굴단의 의견은 경희궁 터에 박물관은 가능하고 미술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미술관 건립에 대한 부정적 이유가 '현대적인 색채의 미술관'이라고만 되어 있어 그 배경이 의문이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이 과연 조선 궁궐과 어울리고 '현대적인 색채가 없는' 고색창연한 건물인가?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계속 되어 1989년에는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조사의 목적은 숭정전 복원에 필요한 원래 위치를 확인하여 숭정전의 복원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발굴단은 숭정전 복원을 위한 제자리를 확인하는 유구가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발굴을 시작하였지만, 상하 월대 일부와 박석이 제 상태에서 출토됨으로써 숭정전을 제자리에 앉힐 수 있었음은 물론 추가로 숭정문과 월랑을 복원하기 위한 확대 발굴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첫 번째 발굴에서 의외의 좋은 성과를 얻은 것이다.
1989년의 두 번째 발굴조사의 목적은 숭정전 일원을 복원 설계하는 데 있어서 동서 월랑과 숭정문 및 상하 월랑의 유구를 조사하는 데 두었다.
발굴 범위는 이전 조사에서 앞선 첫 번째 조사에서 숭정전 터로 추정한 지점이며, 2회에 걸쳐 조사하였다.
2회째 발굴조사에서 숭정전 상하 월대의 일부분과 동서 월랑의 기둥 칸 및 칸 사이를 알 수 있는 주춧돌을 발견하였고, 숭정전 터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물론 이 위치는 이전 단국대 발굴단이 확인된 위치와 같았다.
발굴단은 월랑은 복랑複廊[들보(보 beam) 사이가 두 칸으로 된 회랑]으로 되었으며, 좌우 거리가 다르고 회랑의 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추측하였다.
또한 숭정문은 앞면 기둥 3칸이 각각 14자, 15자, 14자이고, 옆면 2칸이 모두 13자이었다.
동서 월랑은 칸 사이가 10.3자, 보칸이 9자로 되어서 남쪽 월랑은 동이 9칸, 서가 8칸이고, 동서 월랑은 모두 22칸의 복랑인 반면 북쪽 월랑은 단랑으로 추측하였다.
발굴단은 기존 강당 건물을 철거하여 보다 정밀한 발굴과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1990년의 발굴조사는 1989년에 실시한 두 번째 조사를 보완하는 의미로 시행되었다.
왜냐하면 이번 조사 때는 1989년에 있던 강당 건물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기존 강당을 헐어내고 그 아래 묻혀 있을 숭정문 및 주위 기단, 상하 월대 및 계단지의 발굴과 동쪽 회랑과 남쪽 회랑을 발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조사 범위는 1989년 두 번째 발굴조사 때 노출되었던 숭정문 터의 적심을 중심으로 전면 발굴을 실시하였고, 그 외 아래쪽 월대와 계단 터, 동쪽 회랑 등은 시굴 정도로 이루어졌다.
시굴은 모두 4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쪽 회랑 터에 3개, 동쪽 회랑과 남쪽 회랑이 만나는 곳에 1개의 트렌치를 설정하여 발굴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출토된 유물도 없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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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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