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2: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혁명 본문
1. 구석기시대
선사시대 prehistory란 기록된 문자가 등장항 서기전 3천 년 즈음 이전 시대를 말하며, 이 시기에 일어난 모든 것은 오직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사람을 비롯하여 사람 비슷한 모습을 한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등 대형 유인원 great apes을 말하는 영장목靈長目 Primates은 400만~5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여기서 사람속屬 genus Homo 가운데서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손쓴사람[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이 200만 년 전 최초로 진화했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한다.
초기 사람속 인류는 대부분의 도구를 돌로 만들어 썼기 때문에 200만 년 전부터 서기전 4천년까지 모든 인류 문화는 석기시대 stone age에 속한다.
석기시대는 서기전 11000년을 경계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한다.
현생인류 modern humans는 아프리카에서 약 10만 년 전부터 5만 년 사이에 처음 출현했지만, 인간 고유의 특징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점진적으로 진화되고 있었다.
그 예는 50만 년 전에 살았던 하이델베르크인(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 Homo heidelbergensis ) 무덤에서 출토된 값진 부장품과 20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omo neanderthalensis)이 남긴 동굴 벽화와 그들이 만든 타원형 무덤에서 출토된 염소 뿔과 꽃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서기전 4만 년경 후기 구석기시대가 시작될 무렵 인간의 발전 속도는 극적으로 빨라졌다.
현존 인류인 '슬기로운 사람'을 뜻하는 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Homo sapiens sapiens)은 나무, 뿔, 뼈 같은 유기물로 만든 낚싯바늘, 화살촉, 재봉바늘 등 좀 더 효과적이고 정교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증거물은 1940년대에 발견된 유명한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 Lascaux Caves paintings이다.
소리의 공명이 가장 큰 동굴 속 깊고 어두운 곳에 벽화가 그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그림들은 소리나 음악이 수반되는 의식의 일부였음이 틀임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라스코 동굴 벽화는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예술적·종교적 개념뿐만 아니라 언어도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후기 구석기시대의 생활 방식은 수렵과 채취였기 때문에 수십 명 남짓한 소규모 집단이 식량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다.
간단한 도구만 가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에서 부의 불평등 및 그에 따르는 지위와 신분의 차이가 생길 수 없어 계급구조는 등장하지 않았다.
2. 신석기 혁명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 |
조형 예술품의 등장 빙하시대의 끝 정착 농업사회의 시작 촌락의 등장 문자의 발달 도시의 등장 |
서기전 40000년 서기전 11000년 서기전 9000년 서기전 6500~3000년 서기전 3300~2500년 서기전 3100년 |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 변화는 신석기시대의 여명기인 서기전 11000년경에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때의 혁신이란 인위적 식량 생산, 반영구적·영구적 정착생활, 근거리·원거리 무역의 활성화 등이었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보를 대규모로 축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공동체는 좀 더 안정되었고 인간 사회는 복잡해졌다.
전문화가 진행되면서 지위와 계급이 구분되었다.
신석기 혁명은 서기전 4천년 말에 진정한 의미의 도시가 등장하기 위한 필수 단계였다.
1) 고대 근동 식랑 생산의 기원
구석기 빙하시대(서기전 4만 년~서기전 1만1천 년)에 지중해에 인접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낮 평균기온은 여름 16도, 겨울 영하 1도이었다.
추위를 좋아하는 사냥감 동물인 순록, 엘크사슴, 멧돼지, 들소, 산양 등이 언덕과 계곡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후 빙하가 북쪽으로 물러가면서 이 동물들은 빙하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고, 몇몇 인류 집단은 사냥감을 따라 북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나머지 인류는 따뜻해진 기후의 지중해 인접 지역에 그대로 남아 전혀 다른 세상과 직면했고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빙하기가 끝난 뒤 3천~4천 년 동안 지중해 동부 연안 주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 중 하나를 이루어냈다.
그 변화는 바로 식량 채취에서 식량 생산으로 전환한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을 사육하고 곡물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주거방식을 더욱 영속적·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안정적 주거는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다음 단계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았다.
도시의 등장, 문자의 발명, 사회적 역할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이 과정은 몇 천 년에 걸쳐 일어났기에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변화는 진정 '혁명적'인 것이었다.
근동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몇 백 년 동안 이어오던 생활방식을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획기적 변화는 이렇게 일어났다.
서기전 1만1천 년 즈음 몸집이 큰 사냥감 동물은 대부분 근동 지역을 떠났다.
그러나 오늘날의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서부 이란 등지에 살던 사람들은 번영을 누렸다.
종전보다 따뜻하고 습한 기후 덕분에 야생 곡물이 더욱 잘 자랄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풍부한 식량 공급과 높은 농업생산성으로 흔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 부르는 이 지역[맨 위 지도 참조]에서 사람들은 계절 거주 때로는 영구 거주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농작물을 향유했기 때문에 정주생활로의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급속한 인구 증가로서, 정주 공동체에 거주하는 여성은 수렵·채취 공동체 여성보다 더 많은 자녀를 출산했기 때문이다.
곡물 의존적 공동체로의 전환에 따른 위험부담 또한 없지 않았는데, 그것은 빈번한 전염병 발생과 지나친 탄수화물 의존 식단으로 인해 수렵·채취 집단보다 유아 사망률이 높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출산율 증가는 이런 불리한 요인을 뛰어넘게 되어, 그 결과 서기전 8천 년에 이르면 인구가 수렵·채취 식량 공급 시절로다 많아지게 되었다.
이들은 곡물을 수확할 수 없는 겨울철을 대비하여 곡물 저장법을 고안했다.
서기전 9500년에 이르러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에 살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저장구덩이에 곡물을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그들은 곡물이 수확되지 않는 시기에도 더 이상 정주지를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맨 처음 곡물 저장법은 자연 상태에서 식량이 부족해질 때를 대비하는 방편으로 고안되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듬해에 더 많은 곡물을 수확하기 위해 따로 종자를 보관하기도 했다.
이 종자 보관법 발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계획적인 종자 파종을 시작하면서부터 좀 더 집약적으로 곡물을 경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곡물 수확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종자용 보관 곡물은 홍수나 화재 때문에 얻지 못하는 들판의 야생 곡물을 어느 정도 보상해준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집약적 파종과 곡물 저장법으로 가축 사육에 필요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잉여농산물을 확보해 가축을 일 년 내내 기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석기시대에 완전한 정주 농업이 행해졌다는 첫 고고학 증거는 서기전 8500년에서 7000년 사이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기전 6000년에 이르면 근동 지역 대부분에서 농업—양, 염소, 소, 돼지 같은 가축 사육도 겸했다—을 1차 생존수단으로 택했다.
동물성 단백질은 고대 인류의 식단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가축 사육은 여러 가지 부가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육류, 우유, 가죽, 양모, 뼈, 뿔 등을 좀 더 안정적으로 공급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레와 쟁기를 끌고 곡물을 가루로 빻기 위한 동력을 제공했다.
농업 및 가육 사육으로의 전환이 정확히 어떤 경로를 통해 그토록 빠르고도 넓게 퍼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이 지역의 정주 집단들은 같은 자연 조건에 서로 비슷한 집단 규모였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전파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농사 지식을 가진 인구의 대규모 이주도 새로운 기술을 널리 전파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농경 지식이 그 지역 전체로 확산되는 데 교역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다른 학자들은 새로운 농업 기반 공동체의 성장이 '모母'정주지를 시발점으로 한 계획적인 식민화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 무렵 농업기술 발전을 통해 토지 생산력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인류 역사의 심대하고도 근본적인 변화는 어떤 단일 요인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서기전 5000년에 이르러 농업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거쳐 이집트와 발칸 반도까지 확산되는 데는 여러 요인들이 각각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지만, 그중 어느 요인이 더 많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2) 소읍과 촌락의 등장
근동의 가속화된 사회 진보의 다음 단계는 차탈휘위크 Çatalhöyük 같은 소읍小邑 small town과 촌락村落 village의 등장, 그와 동시에 나타난 수공업, 교역, 전쟁 등—이것은 모두 경제적 전문화의 징후다—이었다.
몇 백 또는 (아마도) 몇 천에 달하는 소읍과 촌락이 서기전 7500년에서 서기전 3500~3000년 사이 근동에서 발달했는데, 그 무렵 일부 소읍은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정주지는 규모가 작았지만 인구는 정주지마다 크게 달랐고[전형적인 소읍에는 약 1천 명의 주민이 거주], 작은 정주지에서 큰 정주지로의 일관된 성장 같은 것을 없었다.
처음에는 활동 가능한 대부분의 남녀가 들판에서 일했으며, 여성은 직조나 자녀 양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일이 흐르면서 풀타임 수공업 전문과와 풀타임 상인이 등장했다.
최초의 신석기 소읍 중 하나였던 예리코 Jericho(해수면 아래 250미터에 위치)는 오늘날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에 자리 잡았다.
예리코는 서기전 9000년경 풍부한 맑은 샘물 덕분에 계절적 곡물 생산 정주지로 등장했다.
그러다 서기전 8000년경 예리코 주민은 어마어마한 건축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수많은 주택이 암반 토대 위에 새로 지어졌고, 솜씨 있게 장식된 대규모 석조 성벽이 주거지 서쪽에 건축되었다.
성벽 둘레에는 원기둥형 탑이 축조되었는데, 발굴된 잔존물은 높이가 9미터에 달한다.
이 성벽이 왜 건축되었는지, 그리고 탑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벽은 갑작스러운 홍수나 적의 기습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은 파수대였거나 어떤 종교적 이유에서 하늘로 높이 치솟은 것일 수도 있다.
그 기능이 무엇이든 간에 성벽과 탑이 주민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은 틀림없다.
예리코의 초기 정주지는 그 면적이 약 3.2헥타르(약 1만 평)에 달했으며 약 3천 명의 인구가 살았다.
이들은 최근 들어 경작물로 순화된 밀과 보리 등을 집약적으로 경작—인근 샘터에서 끌어온 물을 관개용수로 사용—해 식량으로 충당했다.
서기전 8000년경부터 예리코 주민은 최초의 도기를 제작했다.
도기를 이용해 그들은 곡물, 포도주, 기름 등을 전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저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기의 가장 큰 이점은 요리였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죽과 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도기 생산은 급속히 근동 전역에 걸쳐 주요 산업이 되었는데, 전파 과정에서 그 양식이 빠르게 변화되었기에 우리는 지역별로 나타난 고유한 특징을 식별할 수 있다.
서기전 6500년경부터 도기 파편은 주거 유적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흔한 고고학 인공물이 되었다.
도기 양식의 변화를 연구함으로써 고고학자들은 문자 사용 이전 시대의 연대기를 상당히 정확하게 [물론 상대적이고 대략적인 것이지만]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예리코와 차탈휘위크는 저장 가능한 잉여농산물이 인간의 사회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준다.
역사상 최초로 개인이 자신과 후손을 위해 획득하고 축적할 수 있는 부의 크기에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농업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사회·경제적 차별의 결과가 억압적인 것일지라도 개인이 공동체에서 빠져나오기는 한층 어려워졌다.
그 결과 과거에 비해 사회적 역할이 한층 전문화되었고 훨씬 더 계층적인 인간 사회가 출현했다.
예리코와 차탈휘위크의 주민은 세계를 지배하는 초자연적 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그 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해서 사색했다.
이 또한 인류 문화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더욱이 그 힘이 의식과 희생의 형식을 갖춘 각별한 전례典禮[종교에서 행해지는 공식 예배]를 요구한다고 믿게 되자, 공동체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초자연적 힘과 소통할 수 있는 집단인 사제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런 종교적 리더십은 정치적 형태의 권력—군대 통솔, 방어시설 구축, 피지배자로부터의 재원 조달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공동체의 종교적·군사적·경제적 지원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함으로써 촌락의 엘리트들은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역은 초기 신석기 촌락에서 이루어진 또 다른 중요한 발전이었다.
서기전 5000년에 이르면 원거리 교역망이 근동 전역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물론 지방 교역로는 그보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고고학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실상을 추적하기 어렵다.
이국적 상품은 원거리 교역의 통상 거래품목이었다.
차탈휘위크에서 흑요석과 바다조개는 중요한 상품이었고, 터키석·청금석·비치 같은 준보석류도 주요 거래품목이었다.
원거리 교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전체에서 상품과 사상이 교류를 촉진시켰다.
그것은 또한 이들 촌락 공동체 내의 사회계층화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높은 사회적 지위는 고급 사치품의 독점을 통해 강화되는 것이었기에, 지역 엘리트들은 공동체 내에서 시장성 있는 상품의 생산을 조직화하고 통제함으로써 원거리 교역을 독점하려 했다.
그리하여 신석기 촌락공동체의 상층 엘리트들은 전문서 있는 숙련공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사회경제 변화는 잉여농산물을 통해 전문화가 점점 더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식량 획득이라는 기본 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나 잘 조직된 농업공동체에서는 일부 주민이 노동력의 일부를 농업 이외 분야—도기나 옷감 만들기, 무기나 도구의 제작, 주택이나 요색의 건설, 교역의 촉진 등—에 투입할 수 있었다.
잉여와 전문화는 또한 사회 엘리트의 등장을 초래했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조직화함으로써 지배 행위 그 자체를 또 하나의 전문 분야로 변화시켰다.
촌락이 점점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전문화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인구 상당수는 영구적인 비농업 종사자가 되었다.
잉여와 전문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도시기반 문명으로 나아가는 핵심적 단계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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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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