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3: 메소포타미아 사회 1-도시문명의 발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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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3: 메소포타미아 사회 1-도시문명의 발달

새샘 2021. 11. 17. 20:25

<비옥한 초승달 지역: 수메르 도시들이 강에 근접해 있음을 주목하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은 메소포타미아 도시문명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또한 수메르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문명 발달 과정에서 상승효과를 발휘했다.>

 

 

촌락에서 도시로, 그리고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전환이 처음 이루어진 곳이 지극히 척박한 환경인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남부 사막이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 지역을 그리스인은 '강 사이의 땅'[메소 meso는 '사이', 포탐 potam은 '강'을 뜻한다]이라 불렀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수메르 Sumer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이라크에 자리 잡은 수메르는 한해 강수량이 액 200밀리미터에 불과하고, 여름 기온은 보통 섭씨 44도를 넘는다.

이 지역은 모래땅이어서 관개를 하지 않으면 농사가 불가능하다.

이 평평하고 특색 없는 평야에 물을 공급해주는 티그리스강 Tigris River과 유프라테스강 Euphrates River은 거센 물살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유명하다.

두 강은 얼핏하면 홍수가 났고, 특히 고대의 티그리스강은 강물이 자주 범람하는 바람에 해마다 물줄기가 바뀌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도 최초의 도시는 이런 불리한 환경에서 출발했다.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다음과 같은 다섯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우바이드 시대 Ubide period: 서기전 5900~4300년

 -우루크 시대 Uruk period: 서기전 4300~2900년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서기전 2900~2500년

 -아카드 제국 Akkadian Empire: 서기전 2350~2160년

 -우르 왕조 Ur Dynasty: 서기전 2100~2000년

 

 

1. 우바이드 문화 Ubaid culture(서기전 5900~서기전 4300)

 

우바이드 문화[오늘날 이라크의 알 우바이드에 있는 유적지에서 따온 이름]의 건설자들은 서기전 5900년 즈음 수메르 사막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까닭으로 여건도 별로 좋지 않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으로 이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서기전 6천년기의 페르시아만 북부는 지금보다 내륙 쪽으로 160킬로미터가량 더 들어와 있었다.

따라서 우바이드 정주지 일부는 불모의 사막뿐만 아니라 비옥한 늪지대와도 접경하고 있었다.

수메르에 이주한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우바이드인은 이주하기 전에 이미 그들만의 독특한 촌락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운 나쁘게 어려운 환경에 굴러떨어진 수렵·채취 집단이 아니었다.

 

수메르 농업 정주지에서 우리는 관개체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바이드 농민들은 처음에는 비교적 간단한 수로와 저수지를 만들었지만 이내 돌로 쌓은 정교한 수로와 저수지를 건설해 계절이 바뀌어도 기능이 유지되도록 했다.

또 그들은 제방을 쌓아 강의 주기적 범람을 막았고 넘치는 물을 관개수로로 돌렸다.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바이드 농업공동체는 직조, 도기 제작, 금속 가공, 교역, 건설 등의 전문가를 지원할 정도로 충분한 잉여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신석기 촌락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수메르 농업 정주지에서는 종교적 기능을 맡은 구조물의 흔적도 발견된다.

단순하고 소박한 신전에서 그 건물들은 곧 마른 진흙벽돌[이 지역에는 돌이 귀했으므로 우바이드 건축가들은 석재를 사용하기 어려웠다]로 지어진 장엄한 신전으로 발전되었다.

규모가 큰 정주지마다 이런 건축물이 하나씩 있었고, 시간이 흐른 뒤 재건축 과정에서 그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들 건축물에서 사제계급은 종교의식의 집전자이자 공동체 경제의 관리자로서 활동했다.

그들은 대규모의 신전 건축을 주관했고, 복잡한 관개체계를 관리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사막에서 촌락생활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2. 우루크 시대 Uruk period의 도시생활(서기전 4300~서기전 2900)

 

서기전 4300년경부터 우바이드 정주지는 고도로 조직화된 대규모 공동체로 번창했다.

새로운 우루크[오늘날의 와르카 Warka에 있는 유적지 이름] 시대는 신석기 우바이드 촌락에서 수메르 도시국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루크야말로 지중해 세계 최초의 도시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루크 시대의 백색 신전을 세웠던 진흙 벽돌 기단인 지구라트(왼쪽)와 지구라트 위에 세운 백색 신전 모형도(오른쪽)(사진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Uruk)>

우루크 시대에는 신전 건축이 더욱 정교해지고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우루크의 백색 신전 White Temple은 이런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기전 3500~서기전 3300년 무렵 우루크의 건축가들은 펑탄한 대지 위에 12미터 높이로 웅대하게 솟은 경사진 기단인 지구라트 ziggurat를 축조했다.

기단의 네 모서리는 동서남북을 향했고 표면은 진흙 벽돌로 장식되었다.

기단 위에는 별개의 구조물인 신전이 세워졌는데, 벽돌로 쌓은 신전 건물의 표면을 화려한 백색으로 칠했다.

 

신전은 수메르 전역에 건설되었는데, 그것은 종교가 도시생활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루크가 급속하게 도시로 성장한 이유는 그곳이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기전 3100년에 이르면 이 도시는 면적이 수백 에이커 acre[1 에이크는 약 4000제곱미터=약 1200평]에 달할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거대한 벽돌 성벽 안에는 4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도시만 성장한 것은 아니라 수메르의 대규모 촌락 역시 급성장했다.

대도시가 그랬던 것처럼, 활발한 경제활동은 촌락으로 이주자가 모여들게 된 요인이었다.

급속히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의해 수메르의 곡물과 직물 생산량은 우루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무려 열 배나 늘어났다.

교역로 역시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나날이 복잡해지고 중앙 집중화되는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수메르인은 새로운 소통 기술을 발전시키기 시작함으로써 바야흐로 역사시대에 진입했다.

그 소통 기술은 바로 문자였다.

 

 

3. 문자의 발달(서기전 3300년 무렵부터)

 

&amp;amp;amp;amp;amp;amp;amp;amp;lt;서기전 2500년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쐐기문자 진흙 판(사진 출처-https://www.yna.co.kr/view/AKR20190208075900009)&amp;amp;amp;amp;amp;amp;amp;amp;gt;

 

우리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우루크 시대의 수많은 혁신과 마찬가지로 문자 발명 역시 하루아침에 갑자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기전 4000년에 이르러 근동의 촌락 주민은 물품 명세목록의 작성과 교역의 편의를 위해 다양한 모양의 진흙 토큰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새로운 관행이 발달했다.

어떤 거래에 사용된 같은 모양의 토큰을 한데 모아 진흙 단지에 넣고 안에 담긴 토큰 모양을 일일이 단지 바깥 면에 새겨 넣는 관행이었다.

서기전 3300년에 이르면 사제계급은 볼썽사나운 '토큰 단지 체계'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평평한 진흙 판에 기호를 새겨 필요한 정보를 기록했다.

 

이렇듯 초기 단계의 문자는 경제적 이유에서 기록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했다.

따라서 한동안 문자는 순수한 그림 형태였다.

각각의 기호는 표시하고자 하는 물건을 닮은 모습으로 진흙에 새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문자의 사용이 진전되면서 기호는 물체의 형상뿐만 아니라 그 물체에 연관된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음식 한 그릇'을 나타내는 기호인 명사 '닌다 ninda'는 '식량'이나 '영양' 같은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시일이 흐르면서 그 기호는 특정 발음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수메르의 서기는 '닌다'라는 발음을 사용할 필요가 있으면 '음식 한 그릇'에 해당하는 기호를 가져다 썼다.

나중에는 그 기호에 특수부호를 덧붙여 읽는 이로 하여금 그 기호가 상형문자인지 아니면 표음문자[기호가 나타내는 발음]인지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서기전 3100년에 이르러 수메르의 서기들은 뾰족한 나뭇가지 대신 내구성이 있는 갈대 첨필을 사용했는데, 이 첨필이 쐐기 모양의 자국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자를 쐐기문자(설형문자楔形文字)라고 부른다.

쐐기 기호는 진흙 서판에 신속하게 쓸 수 있었고, 갈대는 나뭇가지처럼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진흙 서판을 불에 구워서 영구 기록물로 만들었다.

지금도 수만 점의 진흙 서판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뭇가지보다 훨씬 유연한 갈대 첨필로는 그들이 표시하고자 했던 물체의 원래 모습[예를 들면 '음식 한 그릇'의 형상]을 정확하게 그리기 어려웠다.

그 결과 쐐기문자는 급속히 추상화 경향을 보였고, 급기야 원래의 상형문자와는 거의 닮은 데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궁극적으로 수메르어의 모음과 자음 조합을 가능케 하기 위한 기호가 고안되었고, 그 결과 수메르어 기록에 필요한 기호는 1,200개에서 600개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쐐기문자를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오직 소수만이 그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쐐기문자의 읽고 쓰기를 배운 수메르인들은 수메르 사회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서기전 3천년기 전 기간 동안 서기 양성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대부분 엘리트 집안의 아들이었다.

기호가 그토록 다양하고 문자가 그토록 복잡했지만 쐐기문자는 매우 오랜 세월 존속했다.

쐐기문자는 그 후 2,000년이 넘도록 고대 근동의 주요 문자체계로서 존속했고, 심지어 수메르어를 더 이상 구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 문학의 걸작은 한결같이 쐐기문자로 기록·보존되었으며, 서기 1세기에도 쐐기문자로 문서가 기록될 정도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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