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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7: 한강변 문화유적

새샘 2021. 11. 24. 21:49

198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1987년 발간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는 동국대 한강변문화유적발굴조사단과 서울특별시가 함께 낸 발굴보고서이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간단하고, 보고서 발간 형식 역시 간이용 책자라서 다른 보고서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발굴조사 보고서이지만 먼저 한강변 문화유적 고증조사에 대한 개요가 나와 있다.

즉 이 조사의 목적은 한강종합개발사업의 마무리를 계기로 한강 연안의 문화유적을 고증 조사하여 보존과 복원을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고증위원회를 구성하여 1986년 3월 10일부터 6월 30일까지 현지답사와 주민 의견 수렴, 관련문헌 고증, 조사내용 분석 등을 통해 1987년 1월부터 복원 가능한 유적을 선정,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보고서에는 복원 가능 유적이자 발굴조사 대상으로 바위절터(암사지岩寺址), 낙천정樂天亭 터, 제천정濟川亭 터, 망원정望遠亭 터, 양천陽川 진산鎭山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발굴조사 대상을 선정하기까지의 과정, 그러니까 현지답사 지역 범위는 어디이며, 관련 문헌조사 내용은 어떤 내용인지, 왜 이 유적들을 발굴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발굴보고서로서의 기본 요건이 전혀 갖추어 있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각 유적들의 발굴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바위절터에 대한 발굴 결과다.

 

발굴 당시 바위절터(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단은 먼저 바위절터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4월 19일부터 5월 말까지 발굴했는데, 금당지金堂址[절의 본당 터]로 추정되는 최상층 주춧돌은 조선시대이거나 조선 초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었고, 앞면 4칸, 옆면 2칸의 작은 규모의 건물로 파악하였다.

 

주춧돌 부위를 제외하고 맨 마닥층까지 건물 중심부에 시굴 구덩이를 넣어 보았지만 초창기 유구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발굴단은 전면 발굴을 하지 않는 이상 자세히 알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고려시대 이전 유구는 전혀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발굴단은 바위절터의 복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지금의 바위절터(사진 출처-출처자료1)
지금의 바위절터 표석(사진 출처-https://ncms.nculture.org/story-of-our-hometown/story/7033?jsi=)

이렇게 발굴이 끝난 뒤 암사동 유적 근처에 있는 바위절터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

발굴단의 의견에 따라 건물이 세워지는 등 정비가 이루어졌을까?

한강변에 있는 바위절터 유적은 올림픽도로와 근접해 있고, 현재 한강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시민들이 직접 찾아가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직접 현장을 찾기보단 위에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보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

 

 

다음은 낙천정樂天亭 터에 대한 발굴조사 내용이다.

 

발굴 당시 낙천정 터(사진 출처-출처자료1)

낙천정은 조선 태종의 별장이라 할 수 있는데,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살곶이벌[지금의 한양대 남쪽 중랑천 살곶이다리 일대]에 있는 대산臺山이란 언덕에 이궁離宮(행궁行宮: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을 지었는데, 이 언덕 위에 지은 정자가 바로 낙천정이다.

 

낙천정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7년 5월 15일부터 5일간 이루어졌으며, 유구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단은 조사 지역 주변에서 조선시대 기와가 채집되었기 때문에 낙천정 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복원 대책을 제시하였다.

발굴단은 정자 터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매우 구체적인 복원 방향을 제시하였다.

 

지금의 낙천정 모습(사진 출처-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1025/103611622/1)

조사 이후 낙천정은 복원되었고, 1993년 복원된 낙천정은 서울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지만 이렇게 복원된 낙천정은 2009년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2008년 정밀조사 결과 원래 위치에서 200미터나 떨어져 있고, 정자 형식도 조선 전기 양식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낙천정 터 표석(사진 출처-https://yacho2040.tistory.com/35)

지금 낙천정은 찾는 이 하나 없는 쓸모없는 건축물이 되었고, 원래 낙천정이 있던 자리에는 홀로 표석만이 남아 있다.

복원만이 발굴조사의 결과는 아니다.

그대로 발굴 결과만을 기록하는 것도 때로는 유적을 이해하기 좋은 방법이 된다.

낙천정 터 복원이 유적 복원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길 바란다.

 

 

왕실 소유 정자인 제천정濟川亭은 외국사신들이 한강 경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던 곳이다.

 

제천정 터 표석(사진 출처-https://history.seoul.go.kr/nuri/bbs/bbs.php?sub_type=view&b_idx=966&pidx=&didx=114&bs_idx=114&s_where=&s_text=&search_status=all&s_cate=&s_recom=&s_year=&s_month=&s_day=&page_num=54)

고려시대부터 기록이 보이며, 원래 이름은 한강정이던 것이 조선시대인 1456년(세조 2년)부터 제천정으로 바뀌었다.

청일전쟁 때까지는 남아 있었던 듯하며, 연세대의 전신이었던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가 불하받은 이후 어느 땐가 사라져버렸다.

이후 지형도 많이 바뀌고 발굴 당시에도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어 본래 모습은 흔적도 없다.

지금은 제천정 터에 거대한 복합주상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표석만이 유일한 흔적이다.

 

제천정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7년 4월 27일부터 5월 2일까지 실시되었다.

돌 유구인 주춧돌이 확인되는 지역과 그 주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주춧돌의 시대 확인은 없었다.

단지 중간 흙층에서 발견한 기와 조각을 조선 중기 이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 정도의 결과만으로 낙천정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복원 방안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제천정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망원정望遠亭은 1424년(세종 6년) 태종 둘째 아들이자 세종 형인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로 제천정과 함께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원래 이름은 희우정喜雨亭이던 것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1484년(성종 15년) 망원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발굴 당시 망원정 터(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 당시엔 망원정이 있던 마포구 합정동 언덕만 남아 있었는데, 남쪽 언덕을 깎아 강변도로가 나면서 한강과 차단되었고, 나머지 지역에도 집들이 들어서면서 원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발굴조사는 1987년 5월 20일부터 5일간 이루어졌으며, 유구나 유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발굴 당시 남아 있는 언덕 동쪽으로 괴석怪石의 정원석이 산재하고 있었는데, 발굴단은 이것이 망원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발굴단은 망원정의 복원 방안을 보고서에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복원된 망원정(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후 1989년 망원정은 복원되었다.

그러나 발굴단이 제시했던 앞면 4칸, 옆면 2칸의 건물이 아닌 앞면 3칸, 옆면 1칸의 작은 정자로 복원되었다.

아마도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희우정으로 추정되는 부채그림을 바탕으로 복원이 이루어진 듯하다.

 

1987년 4월 17일 자 경향신문에 '한강 최고의 명승지 희우정 자태를 찾았다'는 기사가 났다.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희우정의 구조나 형태를 알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은 없었다.

그런데 희우정이 그려진 부채그림이 발견된 것이다.

서울 사는 김모(당시 36세)씨가 소장한 비단부채에 '한수서강漢水西江 희우정喜雨亭'이란 글씨와 함께 춘색이 만연한 절경의 정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부채의 제작 연대나 화가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실제 희우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 자체는 근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전문가들은 비록 부채가 만들어진 역사는 짧더라도 추억을 더듬어 근세인들이 희우정을 그려서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때 부채그림 속에 있는 희우정의 규모가 바로 앞면 3칸에 측면 1칸의 건물이었다.

 

 

 

양천陽川  진산鎭山은 강변에 위치한 산치고는 꽤 높은 편이다.

 

궁산 전망대가 있는 양천 진산인 궁산의 지금 모습(사진 출처-https://invitetour.tistory.com/1401)

특히 강쪽의 북면은 가파르고 높아서 성을 쌓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양천 진산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궁산宮山을 말하는 것으로 해발고도는 76미터다.

 

발굴 당시에는 둑이 산에서 강쪽으로 들어가 쌓여있고, 이 둑을 강변로로 이용하기 때문에 강물과는 꽤 떨어져 옛 경관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산 자체는 많이 변하지 않아 원래 모습은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유구와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아무튼 발굴보고서 제목이 '한강변 문화유적'이라 하여 상당한 내용이 포함된 보고서라 생각하였으나, 막상 들여다보니 발굴조사 내용은 매우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무분별한 복원 방안이 제시되어 있어 큰 실망감을 남겨주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11. 2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