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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1: 머리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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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1: 머리말

새샘 2021. 10. 30. 16:30

사진 출처-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793096

 

서양문명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3천 년 전 근동에서 시작되었다.

빙하가 서서히 물러가면서 습지, 초지, 가축 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생태계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나타났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인류는 소규모 수렵·채취집단에서 대규모 농업 기반사회로 탈바꿈하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두 번째 거대한 진보는 약 5천 년 전에 이루어졌는데, 최초의 도시들이 처음에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다음에는 근동 전역에서 등장했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도시의 전통은 곧 규모가 큰 정치 단위로 대치되었다.

고왕국 시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나일강 물줄기를 따라 수백 마일에 달하는 영역을 지배했다.

메소포타미아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대왕(재위 서기전 2333~2279)은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 후 1,500년 동안 이 제국을 모방하는 지배자들이 잇달아 출현했다.

서기전 1500년경에 이르러 지중해 동부 전역을 아우르는 국제적 경제 및 외교 체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서기전 1200년경 이 국제 체계가 급속히 붕괴하면서 기존 제국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뒤이은 권력 공백으로 중동 지역에는 신흥 국가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제국이 사라진 공백기는 길지 않았다.

청동을 대신해 철이 도구와 무기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면서, 새롭고 좀 더 강력한 근동의 제국들이 등장했다.

철기 제국들은 이전의 청동기 제국들보다 더 크고 우수한 성능의 무기를 갖췄으며, 잘 조직화되었고, 훨씬 공격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구사했다.

서기전 500년경에 이르러 이 제국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제국인 페르시아가 근동 세계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

 

종교와 문화 또한 극적으로 발전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길가메시 서사시, 호메로스의 서사시,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의 종교 전통은 모두 이 시기가 종말을 고하던 서기전 500년경 형성되었다.
후대에 등장한 서양 즉 지중해 세계의 문명은 바로 이런 토대 위에 서 있었다.

 

 

1장 서양문명의 기원

 

<차탈휘위크에서 발굴된 여신상(사진 출처-file:///C:/Users/Home/Documents/Downloads/1523234478_201804091.pdf)>

 

 

지중해 세계의 역사는 현생인류인 슬기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Homo sapiens sapiens]의 진화 완성과 더불어 빨라야 약 4만 년 전에 출발했다.

문명은 그보다 더 늦게 시작되었다.

고대 문명의 특징인 국가, 문자, 과학, 예술 등은 도시생활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도시는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3천 년 전과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진정한 도시가 등장한 약 5천 년 전 사이에 농업과 기술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서양문명의 역사는 시간적 길이가 매우 짧다.

지질학적 시간으로 보면 그야말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왜 오늘날 이라크가 위치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황량한 지역에서 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현대 역사학자들은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어쨌든 일단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자 도시생활의 기본 패턴은 급속하게 근동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초기 도시들 사이에 교역 네트워크가 서서히 확장되었고, 그와 더불어 인간과 자원을 지배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서기전 3천년기에는 독립적 도시들을 영속적 제국으로 통합시키는 작업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서기전 2천년기 중반(서기전 1500년경)에 이르면 고대 근동近東 Ancient Near East[유럽에서 봤을 때 동쪽에 위치한 유럽에 가까운 동양의 서아시아 지역을 말하는데,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로서 오늘날의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의 미래가 메소포타미아 도시들 사이의 필사적인 투쟁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Anatolia[지금의 터키]와 이집트의 신흥 제국들 사이의 경쟁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지금으로부터 9천여 년 전 터키 중남부 차탈휘위크 Çatalhöyük[터키어 çatal은 '갈퀴, 쇠스랑'을, höyük는 '토루, 제방, 방죽'을 뜻함]에서 역사상 최초의 작은 촌락인 소읍小邑 town이 발달했다.

그 후 2천 년 동안 이 도시는 축구장 30개를 합친 넓이[약 4만 평]만큼 커졌다.

이 도시에는 8천 명가량의 주민이 2천여 채의 독립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차탈휘위크에는 도로가 거의 없었다.

모든 주택은 이웃집에 바짝 붙여서 지어졌는데, 대부분은 기존 주택의 폐허 위에 건축되었다.

사람들은 옆집 지붕 위를 걸어 자기 집으로 들어갔고, 자기 집 지붕의 구멍으로 사다리를 타고 집 안으로 내려갔다.

 

벌집 같은 주택에서 살았지만 차탈휘위크 주민의 사회는 정교하게 조직되었고 기술 수준도 높았다.

그들은 모직 천을 짰고 도기를 가마에 구었으며 주택의 회반죽벽에 정교한 사냥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인근 카파도키아 Cappadocia 산에서 가져온 예리한 흑요석으로 낫, 칼, 창, 화살 등의 도구를 만들었다.

그들은 종교의식을 거행해 조상에게 경의를 표했고, 시신을 주택 마루 밑에 매장했다.

그들은 또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그들이 조각한 전신 여성상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석기 시대의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정착 농경민인 차탈휘위크 주민은 곡식·완두콩·렌즈콩 따위를 재배했고, 양과 염소를 가축으로 길렀다.

유목민이었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과일과 견과류를 채취했고, 야생 상태의 소·말·돼지 등을 사냥했다.

남성과 여성의 유골을 비교 조사한 결과, 하는 일과 먹는 음식이 남녀 간에 거의 차이가 없음이 밝혀졌다.

차탈휘위크 주민은 비교적 건강한 식단과 풍부한 소유물을 가졌지만 주변의 수렵채취집보다 수명이 더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차탈휘위크 남성의 평균수명은 34세였다.

여성은 출산의 위험과 더불어 일상적인 돌발 사고, 연기 흡입, 전염성 질병 등에 취약해 약 30세밖에 살지 못했다.

 

차탈휘위크 같은 소읍은 인류 역사상 비교적 최근에 발달된 것이지만, 후대에 발달된 모든 인류 문명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소읍은 언제, 어떻게, 왜 등장하게 되었을까?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1. 10. 3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