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8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8: 전傳 정도전 선생 묘 본문
1980년대의 발굴 대부분이 복원을 위한 국가 차원의 발굴조사였다면, 조선 개국공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묘가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1989년의 발굴조사 내용은 무척 흥미로운 발굴이 아닐 수 없다.
봉화 정씨 문헌공파文憲公派 집안에서는 정도전 선생의 묘로 '전傳'해 오는 묘를 발굴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입으로만 전해오는 정도전의 묘소를 확인하는 동시에, 만약 맞을 경우 이전·복원하는 문제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발굴 당시 유적 바로 앞쪽에 서초구청 청사가 신축되어 우면산의 지맥들이 완전히 절단된 상태이고, 유적이 위치했던 지점은 서초구 교육청사가 신축 중이어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유적은 양재역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우면산의 지맥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 당시 남아 있었던 능선의 중하단 부분에 분묘로 확인할 수 있는 몇 기의 봉분이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 방치된 상태였다.
이번 발굴조사한 유적도 봉분이 훼손되어 겉으로는 봉분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이곳에 제물을 올려 놓는 상돌(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향안석香案石), 장대長臺(장댓돌, 장대석: 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가 남아 있어 봉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대상은 주변에 남아 있는 돌 유구들과 3기의 묘(제1, 2, 3호분)였다.
이 가운데 제1호분이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묘였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제1호분의 하부구조는 회곽묘灰槨墓[무덤구덩이(묘광墓壙) 안에 관과 곽을 보호하기 위한 석회층을 만들어 관과 곽을 안치한 묘]로서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쓰는 전형적인 분묘 양식이나 그 축조된 규모는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지배계층의 묘라고 발굴단은 추측하였다.
제2호분은 남아 있는 사람뼈의 골격으로 보아 제1호분의 부인묘로 추측하였다.
제1호분에는 묻힌 사람의 머리 부분만 남아 있는 것과는 달리 제2호분에 묻힌 사람의 유해는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제3호분은 제1, 2호분에서 산 능선을 따라 아래쪽으로 약 1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는데, 조사 결과 같은 산 능선이고 제1, 2호분과 같은 회곽묘였다는 점에서 같은 가문 사람인 것으로 발굴단은 보았다.
출토유물로는 작은 백자 항아리, 백자 대접, 백자합白磁盒(원통형 몸체와 뚜껑이 있는 백자로 만든 음식 담는 그릇), 백자 반합白磁 飯盒(백자로 만든 밥 그릇), 작은 백자병 등이 나왔다.
주로 1호분과 3호분의 회곽 바깥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제작 수법이나 모양으로 보아 1호분에서 나온 백자들이 아주 정교하였으며, 3호분의 백자들은 제작 시대도 뒤떨어지고 제작 수법 역시 조잡하였다.
또한 1호분의 사방 3미터 지점의 지표 아래 50센티미터에서 출토된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는 정언지鄭彦智(1520~?) 부인 전주 이씨의 백자 지석誌石(묘지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으로 모두 6매枚로 구성되어 있었다.
묘지 내용 중 정언지의 관직 표기로 보아 1575년(선조 6)에 제작된 3매와 1577년에 제작된 3매가 차례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묘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형식이며, 그 내용 또한 묻힌 사람의 출신, 가족관계, 사망, 묘지 등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본인보다는 남편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발굴단은 보고서에서 발굴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첫째, 조사한 묘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봉화 정씨 족보 등의 기록을 볼 때 이 분묘 중에서 정도전 선생의 묘일 가능성은 많으나 확실한 물증은 없었고, 묘지는 이미 도굴된 것으로 보았다.
둘째, 입으로 전해오는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오래전부터 이곳이 정도전의 묘로 전해진 것은 확실하나, 역시 구전口傳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발굴되지 않았다.
셋째, 제1호분 피장자의 유해가 머리 부분만 안장되어 있는데, 이는 피장자가 사망할 당시의 사회적인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피장자가 참수형을 당하여 머리 부분만 매장된 것이다.
이 사실은 ≪태조실록≫에 정도전이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넷째, 제1호분에서 출토된 명기明器(장사 지낼 때 무덤 속에 시체와 함께 묻기 위해 만든 그릇)가 조선 초기 백자라는 점은 피장자가 조선 초기에 생존했던 인물임을 추측할 수 있었으며, 이 그릇들이 조잡하지 않고 주문생산으로 정성 들여 제작되었다는 점은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섯째, 제1호분의 서쪽에서 발견된 정언지 부인 전주 이씨의 묘지墓誌는 원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을 나중에 옮겨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호분의 백자는 조선 초기, 묘지는 조선 선조 때로 시대 차이가 커서 묘지는 다른 곳에서 옮겨진 것이 분명하다고 발굴단은 추측하였다.
마지막으로 발굴단은 피장자의 인물을 추측하였다.
조사 결과 조선 초기의 정승급에 해당하는 신분을 가진 인물의 무덤으로 추측하였을 뿐, 이 묘를 정도전 묘로 단정할 수 있는 지석誌石이 출토되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내릴 수 없었다.
아쉽게도 지석이 묻혔을 것으로 판단되는 상돌 밑의 석실 내부는 이미 도굴되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발굴단은 여러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았다.
사실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는 묘소의 명칭 앞이 '전傳'이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즉 확실하진 않지만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에 있는 견훤의 묘가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맞는지 발굴한 경우는 거의 없다.
아마도 이 정도전 선생 묘에 대한 발굴조사는 서울 지역 발굴 역사에서 가장 이색적인 발굴조사였다 할 수 있다.
묘의 주인을 찾는 발굴은 서울 지역에서는 이 경우 외에는 없었고, 우리나라 발굴 역사에서도 없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이런 후손들의 열정과 노력에도 정도전의 묘소라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피장자의 유해 중 머리 부분만이 확인된 사실은 정도전이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과 일치하여 매우 흥미롭다.
지금 서초구청 옆 양재고등학교 정문 위쪽 공원 안에는 2013년 서초구청이 세운 '삼봉 정도전 산소터(鄭道傳 1342-1398)'라는 자그마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12.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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