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5: 메소포타미아 사회 3-초기 왕조 시대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5: 메소포타미아 사회 3-초기 왕조 시대
새샘 2021. 12. 11. 18:16
1. 초기 왕조 시대의 출발(서기전 2900~2500년)
서기전 2900년 즈음 수메르 도시국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희소자원을 둘러싸고 도시국가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 갈등의 시기에 새로운 전쟁 리더십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기존 우루크 시대의 수메르 도시국가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왕권의 확립으로 귀결되었다.
역사가들은 수메르 문명의 이 단계를 초기 왕조 시대라 부른다.
성공한 전쟁 지도자들은 엄청난 지위와 권력을 얻으면서 새로운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루갈 Lugal(거인)'이란 새로운 호칭을 썼다.
우루크 시대 Uruk period의 왕과는 달리 초기 왕조 시대의 루갈은 도시의 신을 섬기는 겸손한 종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루갈은 지상에서의 신의 대변자로 자처하면서 신과 자신의 공동 영광을 위해 신의 군대를 이끌며 도시의 가용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여겼다.
이런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도시국가에서 실로 가공할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 새로운 권력이 수메르 사회에 미친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례가 ≪길가메시 서서시 Epic of Gilgamesh≫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문학작품인 이 서사시는 실존했던 길가메시란 우루크 왕의 전설적 업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작품이 처음 완성된 뒤 2천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번역되고 필사될 정도로 이 서사시는 근동 전역에 걸쳐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현존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 우리가 읽는 이야기는 고대 수메르인이 알고 있던 내용 그대로가 아니다.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서사시가 대체로 서기전 3천년기 전반 수메르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길가메시는 도시문명을 갖지 못한 야만인을 상대해 군사적 정복과 영웅적 위업을 쌓아 명성을 얻은 강력한 루갈이었다.
그는 쌓아올린 명성과 지위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면서 일반인에게 통용되는 행동 규범을 무시했고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하면서 시민들을 실망시켰다.
그래서 백성들은 위로를 구하며 신들에게 기도했고, 마침내 신들은 들사람 엔키두 Enkidu로 하여금 길가메시에게 도전하게 만들었다.
이런 길가메시와 엔키두 사이의 대립 이야기에는 유용한 역사적 정보가 가득하다.
길가메시는 도시의 창조자인 반면, 들사람 엔키두는 도시의 신전 매춘부와의 성적 접촉을 통해 문명화 되기 전까지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화된 엔키두는 더 이상 소박한 생활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서 도시화되면서 문자 그대로 인간이 되었다.
길가메시 이야기는 도시와 광야, 문명과 야만에 대한 수메르인의 이분법적 사고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수렵·채취 생활로 자연에 가까운 야만인 엔키두가 도시 인간으로 변하여 처음에는 도시문명을 대표하는 우루크 왕 길가메시와 싸우면서 나중에는 그와 친구가 된다.
도시화·문명화된 인간들이 야만인에 대해 취하는 경멸적 태도는 거의 모든 고대문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인간은 자연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살아야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길가메시와 엔키두 사이의 우정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수메르인이 광야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적대감이다.
두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자연을 대표하는 반신반인과 싸워 처음엔 반신반인이 이기지만 결국 두 사람이 승리를 거둔다.
이는 문명화된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거둔 또 하나의 승리란 의미다.
만일 자연이 승리했다면 그것은 인간과 그 창조물을 멸망시켰을 것이다.
서기전 3천년경의 ≪길가메시 서서시≫에는 신들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 보낸 대홍수에 대한 전통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보다 적어도 1,500년 전의 일이다.
두 이야기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은 고대 근동 문명이 초기 히브리인에게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2. 초기 왕조 시대의 종교
우루크 시대의 수메르인은 신은 적대적이고 변덕스런 자연의 힘과 동일시한 반면 초기 왕조 시대 중반에 이르러 수메르인은 신을 한층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았다.
즉, 신들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의논하기 위해 서로 모임을 가졌으며, 정의를 위해 신의 종인 인간에게 멋대로 잔인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신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갖다 바치는 존재로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 인간 사이에는 호혜 관계가 성립되어, 신은 자신을 경배하고 부양해줄 인간이 필요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은 탐탁지 않더라고 인간의 탄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신의 손안에 있었고, 수메르인은 점과 점성술로 미래의 일을 알아내려고 힘썼다.
그러나 모든 지배자가 그러하듯, 신 역시 변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점이나 별을 통해 자기 운명을 알아낸 인간들은 신에게 정성스런 기도와 예배를 올림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왕은 신 앞에서 특별한 의무가 있었다.
초기 왕조시대가 진전되면서 이런 밀접한 관계는 더욱 강조되었다.
왕은 신의 재가를 얻어 지배했으므로 모든 다른 사람 심지어는 사제와도 분리되었다.
하지만 왕 역시 신을 영화롭게 할 의무가 있었고, 권력이 큰 만큼 의무 또한 많았다.
또한 제아무리 왕일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우루크 시대의 전설적 왕 길가메시도 신이 모든 인간에게 정해준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그의 친구 엔키두는 여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는데, 이를 본 길가메시는 겁에 질려 불사不死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영생의 풀을 찾아 연못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뱀에게 빼앗기면서 비로소 우루크의 위대한 마지막 왕 길가메시는 인간만사 부질함을 깨닫는다.
"어쩌자고 나는 이리도 헛된 일로 노심초사하는가? 내가 하는 일에 누군들 관심이나 있을까?"
3. 초기 왕조 시대의 과학, 기술, 교역
수메르인은 신들과의 복잡한 관계와 적대적 자연 환경 때문에 높은 수준의 독립성과 창의성을 발휘했다.
이런 자질 덕분에 수메르인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창의력 높은 기술자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안에는 광물자원이 없었지만 우루크 시대(서기전 4300~서기전 2900년)에 교역로를 따라 구리 원광석이 유입되자 수메르인은 이를 가공해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당대 최고 수준의 야금기술자가 되었다.
이어 서기전 3000년이 되기 전 아나톨리아 동부 수메르인은 구리를 비소(나중에는 주석)와 합금해 청동을 만들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수메르와 인근 문화권이 청동기를 이토록 광범위하게 사용했으므로 우리는 청동기시대가 서기전 3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인류 기술발달사에서 획을 그은 발명품 가운데 문자와 더불어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바퀴다.
서기전 4천년기 중반에 이르러 수메르인은 물레를 사용했고, 덕분에 품질 좋은 그릇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또한 서기전 3200년경에는 당나귀가 끄는 바퀴 달린 전차와 수레를 사용했다[서아시아인은 서기전 2000~1700년 사이 동쪽 침략자들이 들어오기 전까진 말의 존재를 몰랐다].
바퀴 달린 전차는 주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킨 바퀴 달린 수레는 전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발전이었다.
수메르인이 직접 바퀴를 발명한 것은 아니고, 러시아 남부 스텝에 거주하는 유목민에게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메르인은 바퀴를 매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함으로써 기술 가능성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다.
수메르인은 수학에서도 선구자였다.
즉 관개수로, 제방, 저수지 등의 건설을 위해 정밀한 계산·측량 기법과 지도 제작법을 발전시켰다.
농사를 위해 음력을 발명한 것도 수메르인이다.
수메르의 달력은 12달로, 6개월은 30일, 나머지 6개월은 29일로 한 해가 354일이었지만, 계절의 순환을 정확히 예측하여 몇 년에 한 번씩 1개월을 보태어 지금의 한 해 365일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30일을 한 달로, 시간을 60 배수로 나누는 관습은 수메르인의 유산이다.
수학은 수메르 건축에도 적용되어 돔 dome과 아치 arch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몇 천 년 뒤 로마인은 수메르인의 업적을 받아들여 돔과 아치의 건축 양식을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이렇듯 수메르인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교역을 통해 원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자원이 거의 없었던 수메르인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와 하류, 그리고 거대한 두 강의 지류를 따라 메소포타미아 구릉 기슭에 교역로를 개척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을 개척했고, 그곳에서 이집트인과 교류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상품을 운반하던 신석기시대 상인처럼 수메르인은 상품, 문화, 예술, 문자 등 자신의 도시생활에서 만든 다양한 문화적 결과물을 전파했고, 더불어 자신의 사상도 곳곳에 확산시켰다.
수메르에 뿌리내린 문명은 이렇듯 고대 근동 세계 전역으로 줄기와 가지를 뻗쳐나갔다.
4. 초기 왕조 시대의 종말(서기전 25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3기로 일컬어지는 시기에 수메르 도시국가들의 지위, 권력, 재산을 향한 경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야심에 찬 루갈들이 자신과 도시 명성을 도높이려 도시들 간의 전쟁은 극심해졌다.
신전 귀족계급과 왕권과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지배 엘리트 계급은 이전보다 더 통합되어 강화된 반면 평민 지위는 더욱 추락했다.
서기전 2550~2450년 사이에 만들어진 우르 Ur 왕(우르 제1, 2왕조)의 무덤은 수메르 엘리트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수메르인의 개념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수메르 사회의 엘리트 일부는 축복받은 내세를 누릴 수 있으며, 무덤이 이런 목적에 기여한다고 믿었다.
이집트 파라오 Pharaoh에서 배운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관행을 통해 루갈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해졌으며 수메르 사회에서 지배자와 평민 사이 간극이 얼마나 크게 벌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를 기록한 문헌 자료를 보면 주로 루갈의 군사적 업적으로서, 주요 도시국가들 사이에 치러진 잔인한 전쟁에서 패배한 도시에 대해 조공 납부를 강요함으로써 지배권을 확립하는 내용이다.
이런 양상은 수메르의 인구 증가에 따른 필요한 자원과 교역로 장악을 위해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배권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정복당한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쟁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수메르의 루갈 중 정보한 도시에 중앙집권적 지배권을 관철시켜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결과 수메르는 주기적으로 어느 특정한 루갈의 패권 인정만을 강요당할 뿐, 개별 도시국가와 그 수호신의 범주를 뛰어넘는 강력한 권위를 갖는 지속적 조직체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독립 도시국가들의 군집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메르는 아카드 Akkad의 지도자 사르곤 Sargon이 구축한 새로운 형식의 황제 지배권에 직면하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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