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4: 메소포타미아 사회 2-역사 속으로 들어간 수메르인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4: 메소포타미아 사회 2-역사 속으로 들어간 수메르인
새샘 2021. 12. 1. 23:02
서기전 2500년 무렵 이후 수메르인 Sumerian은 경제, 정치, 문학, 종교 등 다양한 목적으로 문자를 사용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의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수메르 Sumer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정치, 신의 개념, 사회·경제구조 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수메르 사회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진입한 최초의 사회였다.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우루크 Uruk, 우르 Ur, 라가시 Lagash, 에리두 Eridu, 키시 Kish 등의 도시국가—는 공통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메르어 Sumerian는 전 세계 다른 어떤 언어와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다른 지역 출신인 수메르인—주변 민족이 붙여준 이름이다—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수메르인의 독특한 문화(언어를 포함)가 우바이드 문화 Ubaid culture를 계승·발전시킨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종교의 연속성을 감안하면 후자의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외부에서의 침입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 문제에 대해 확정적인 답을 제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종교는 수메르 문화권이 공유하고 있던 또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공통의 종교가 수메르 도시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각각의 수메르 공동체는 수메를 종교의 1,500개에 달하는 모든 신을 인정했지만, 개별 도시국가의 주민은 자기 도시를 특정한 신의 소유물로 간주했고, 그들의 도시이자 신의 도시의 명예를 드높임으로써 그 신을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도시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여졌고 종종 전쟁으로 이어졌다.
물론 수메르 도시국가들 간의 긴장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다.
예를 들어 물을 사용하는 용수권用水權 문제 또는 경작지나 교역로에 대한 접근 문제 등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메르 사회에서 신전의 중요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경제적 갈등은 불가피하게 종교적 차원으로 비화되었다.
어떤 도시가 다른 도시에 항복해 독립성을 잃는다는 것은 정복당한 도시의 신에 대한 처절한 응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수메르인에게 공통의 문화와 종교는 있었지만 공통의 정부는 불가능했다.
각 도시에 딸린 경작 가능 토지의 상당 부분은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에 속해 있었다.
도시의 생산물 대부분이 거대한 신전 창고로 들어갔고, 이를 사제와 신전 관리가 주민에게 재분배했다.
서기전 3천년기 동안 거대 신전은 직물업을 통제했고 수천 명의 노예 여성과 아동을 고용한 원시적 형태의 공장을 설립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신전은 상품의 구매자이자 판매자로서 원거리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각 수메르 도시국가에는 지배 귀족계급이 있었고 이들이 신전의 사제와 주요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고도의 신정神政 사회에서 최고 지위에 오른 것은 사제였다.
수메르 문명 초기에 인구의 절반가량이 평민이었다.
작은 농지를 소유한 평민은 자유민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전에 공납을 바쳤다.
또한 신전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의 하인을 다수 거느리고 있었고, 직공 또는 신전 토지의 농업노동자인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다.
수메르 사회에는 많은 노예가 있었다.
고대 세계가 으레 그렇듯이 수메르 사회의 노예는 대부분 전쟁포로였다.
노예가 수메르 출신일 경우 주인의 노예[대부분의 노예는 여성]에 대한 소유권은 엄격히 제한되어서 3년이 지난 후에는 해방시켜야만 했다.
수메르인이 아닌 노예는 무기한 소유할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 노예 스스로 돈을 주고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이런 안전장치기 있기 했지만, 수메르의 노예가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인은 노예를 때리거나 벌을 주고, 동물처럼 낙인을 찍었으며, 마음대로 사고팔았다.
고대 노예제가 신대륙에서 행해진 근대 노예제처럼 잔혹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노예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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