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화원의 전성시대 본문
화원의 전성시대는 정조 후반부터 순조 초반이었다.
이 시기의 사회 배경은 이전과는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조선시대 미술의 전성기는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세종 때부터 성종 연간으로 한 80년 동안으로 조선시대 미술의 산맥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때는 우리나라 미술이 국수적인 풍조에서 중국적인 방향으로 옮겨가는 시기다.
말하자면 국내적 화풍에서 국제적 화풍으로 변화되는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두 번째 전성기는 영조 중기부터 순조 초까지 약 80년 가까이 이른다.
사회의 부와 미술의 수요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문에 영조 후반서부터 정조 때까지 민도가 높아지면서 좋은 그림이 많이 나왔던 것이다.
정조시대에는 육의전六矣廛(육주비전六注比廛) 이외에 난전亂廛[난가게: 나라에서 허가한 가게인 시전市廛 상인 이외의 상인이 하던 불법적인 가게]이라 불리는 사사로운 장사꾼들이 생겨서 장사치들이 돈을 많이 모았다.
그래서 별안간 양반노릇 하느라고 족보를 사 들이고, 족보에 있는 양반의 간독簡牘[편지: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 같은 것을 요구하고 해서 우리나라 옛날 명인의 간찰簡札[간지簡紙(두껍고 품질이 좋은 편지지)에 쓴 편지]에 대한 위조가 상당히 많았다.
우리나라에선 고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림이 가짜라는 건 거의 드문 일이었으나 글씨는 가짜가 제법 많았다.
영조 말부터 정조 연간에는 소위 속화俗畫[속되거나 저속한 그림으로서 당시 풍속화를 뜻함]라는 것이 많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시정의 벼락부자들이 중국식 이념산수를 봤자 의미를 알 리가 없고, 게다가 삼절三絶[세 수首의 절구絕句]이라고 해서 중국 시를 써 봤자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기 있는 것은 자기 주변의 풍속, 근처의 산수 같은 것이 되었다.
사실 이런 사회의 새로운 거부巨富 계층의 형성과 거기에 연루된 서민 경제의 향상이 풍속화의 대유행을 초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사회의 미술품 수요의 방향과 공급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요새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설도 있지만,
이때의 엄청난 수요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소유자가 아닌 서민들의 수요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대가다 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첫째가 개성 김씨 문중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응환金應煥(1742~1789)과 그 아래 긍재 김득신, 초원 김석신, 김응환의 사위인 화산관 이명기, 옥산 장한종 등이 개성 김씨 문중과 연관 있는 화가들로서 이들이 아주 강력한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개성 김씨 무리는, 김응환의 외가가 유명한 화원 한씨 집안과 연관이 되기 때문에 전통적인 화원 집안과 연결이 되어서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두 번째 대가 단원 김홍도(1745~1806)가 화원 집안이란 점은 명백하지 않다.
내[출처1의 저자 이용희] 연구로 보면 김홍도 역시 외가쪽으로 화원 집안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대가는 고송유수관 이인문(1745~1824 이후)이다.
나는 고송유수관도 김해 김씨 집안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네 번째 당대를 대표하는 풍속화가는 혜원 신윤복(1758~1817?)이다.
그의 아버지 신한평이 화원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한평의 그림으로는 이광사라는 유명한 학자를 그린 것이 있고, 또 화조가 하나 남아 있는데 다 그다지 대수롭지는 않다.
내가 위창 오세창 선생에게 혜원이 춘의도春意圖(춘화春畵)로 유명한 이유와 그 사람에 대한 얘기가 후에 없어진 이유에 대해 물어봤더니, 위창 선생의 대답은 전해 들은 말이라면서 신윤복은 너무 외도를 많이 하고 여색 그림을 많이 그리다가 나중에는 쫓겨나고 따라서 집도 몰락하여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혜원이 그렇게 춘화를 잘 그렸으면 단원도 그렇지 않았겠느냐 하여 단원 춘화도라는 것이 시중에 떠돌아다니는데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단원 춘화는 내가 본 적이 없을 뿐더러 단원의 인품으로 봐서 춘화를 그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개성 김씨 집안, 김홍도, 이인문, 신윤복의 네 대가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는 모두 군소 작가들이다.
그런데 왜 정조 연간을 전후해서 화가들이 이렇게 굉장해졌으며, 인기가 높아지고 했는가?
이는 중인中人 계층과 관계가 있다.
이 중인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관의 벼슬이 있는 있는 양반과 벼슬이 없는 상놈이 있고, 그 중간에 기능적인 공무원들이 있는데 중인은 이들로 예를 들면 의료, 천문 등을 하는 기술자를 중인이라 부른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양반과 서민 사이에 있어서 중인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북촌, 남촌을 논하기도 한다.
서울의 북촌은 안국동부터 종로 북쪽을 일컬으며, 남촌은 원래는 종로 남쪽이지만 대개 청계천 남쪽을 말한다.
그런데 이 중인 집안이라는 기술관들은 북촌과 남쪽의 가운데인 청계천 근처에 많이 살아서 중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아마도 양반과 서민 사이의 중인이란 말이 옳을 것이다.
정조 때는 중인들이 문집을 사오십 권이나 낼 만큼 시문활동을 했고, 송석원시사, 옥계시사 같은 시사詩社[시인들이 조직한 문학 단체]들도 했다.
단원도 그 속에 있었고, 고송유수관도 다녔고, 최북은 여기서 시까지 썼다.
뿐만 아니라 우봉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 겸산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또는 이경민의 ≪희조일사熙朝軼事≫와 같은 전기, 또 중인 중에 재주가 특별난 문인, 시인, 화가, 노래 잘 부르는 가수 같은 사람들의 전기를 쓴 책들이 나왔다.
모두 정조 연간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현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정조 때에 들어오면 중인들이, 우리도 문화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라 자각하고, 문화활동을 한다는 것을 의식해서 자기들끼지 모임을 만들고, 문집을 내고, 저희들의 시집을 모아서 내곤 했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중인 계층이 다만 계층으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계층의식을 가지고 단결하기 시작하여 자기들의 문화적 활동을 내세우기 시작하고 또 그 사람들의 전기까지도 편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지금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성원록姓源錄≫이란 책은 일종의 중인들의 대동족보大同族譜다.
그리고 하버드대학교에는 ≪성원록속姓源錄續≫이라고 하는 속편도 있다.
이것은 이명희라는 사람이 정조 때 편찬하기 시작해서 그 손자인 이창현의 아들 이순명이 만든 ≪성원록姓源錄≫의 속편이다.
이 두 책은 업적을 냈던 중인들의 족보를 모두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활동은 철종,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장지연 선생의 ≪일사유사逸士遺事≫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정조 전후 시기의 미술 활동을 볼 때는 이런 화원들을 포함한 중인 계층의 새로운 대두가 중요하다.
이런 상황이 풍속을 그렸다 또는 사경산수를 그렸다 하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1. 12.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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