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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대부벽준산수도" 본문

글과 그림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대부벽준산수도"

새샘 2022. 3. 22. 10:28

이인문, 대부벽준산수도, 1816년, 종이에 담채, 98x54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2)

 

이인문이 72세 때인 1816년에 그린 <대부벽준산수도大斧劈山水圖>아주 독특한 중국풍인 정형산수定型山水(일정한 양식에 따라 상상하여 그린 산수화)이다.

화면 왼쪽 위에 '고송유수관도인칠십이세사古松流水觀道人七十二歲寫'라고 쓰여있어 이 그림을 그린 해를 알 수 있다.

 

구도와 화법에서 파격이 넘쳐흐르는 이 그림은, 작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큰 도끼로 쪼갠 단면처럼 붓을 삐쳐 바위나 벼랑 따위의 험준한 모양을 표현하는' 대부벽준으로 그려졌다.

그래서인지 선이 매우 호방하여 마치 말이 내달리는 기세를 뿜는 듯하다.

마른 묵을 묻힌 붓을 옆으로 기울여 수직으로 빠르게 긋는 이 준법皴法은 험준한 산세와 갈라진 나무의 결 따위에 대한 입체감을 표현하는데 두루 쓰여왔다.

 

<대부벽준산수도>바위산이 첩첩이 펼쳐진 모습을 아주 능하게 잘 묘사한 역작이다.

계곡 사이에 몸이 비틀렸으면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노송은 그 기개가 자못 볼만하다.

높게 솟은 바위는 대담하면서도 세련된 발묵潑墨(먹물이 번져 퍼지는 하는 기법)으로 묘사되어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화면 가운데에는 소나무 사이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바깥 경치를 완상玩賞(즐겨 구경함)하면서 강호한정江湖閑情(자연을 예찬하며 한가로이 즐김)을 나누는 두 인물은 매우 여유로워 보인다.

정자로 나아가는 험한 산길에 사람들이 보이며, 화면 왼쪽 맨 아래에 지팡이를 짚고 정자를 바라보는 노인과 몇 발자국 앞선 동자의 모습에서 곧 정자에서 맞게 될 반가운 모임이 떠올려진다.

 

육중한 바위와 대조적으로 넓게 표현된 물은 계곡 사이로 끊임없이 흐른다.

암산 너머로 담채淡彩(엷은 채색)로 표현된 산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숲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큰 나무 한 그루가 그림의 공간감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림에 여러 다채로운 면모가 있어 감상하는데 즐거움이 있다.

 

이인문은 자신의 해석과 감흥을 중시하여 사의적寫意的(외형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을 표현하는)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실제 풍광이 아닌 상상해서 그린 산수화)를 즐겨 그린 화가였으므로, 이 그림은 만년의 가 이상적으로 여긴 산수 풍광을 그린 것일 테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기량이 줄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이 그린 종래 작품을 뛰어넘는 파격을 보인 이인문의 경지는 예사 화원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당대에 김홍도와 더불어 대표적인 화원으로 꼽혔던 이인문은 문인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으며, 조선 후기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조와 순조 때 삼정승을 지낸 남공철은 ≪금릉집金陵集≫에서 이인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생은 생김이 깡말랐지만 그 마음은 기특하다. 하지만 그의 의관은 남루하니 이는 때를 잘못 만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생의 두 눈동자에 서린 형형한 빛은 늙어도 쇠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람이 아닌 자연을 그림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창작 활동을 하는 역관·서리와 같은 중인을 통칭하는 '위항인委巷仁'의 전기를 수집했던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불구불 치솟은 가지와 시원하고 짙푸른 잎은 기세가 당당하여 정말 소나무와 같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인문을 신필神筆이라 하였다."

 

※출처

1. http://www.ansa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476

2.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3. 구글 관련 자료

 

2022. 3.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