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4: 후기 청동기시대의 국제체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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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4: 후기 청동기시대의 국제체제

새샘 2022. 3. 16. 12:10

후기 청동기시대인 서기 1400년 무렵의 근동

 

서기전 1500년 이후 이집트를 포함한 많은 나라의 운명은 폭넓은 국제관계의 맥락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이다음 300년 동안 근동 왕국들의 운명은 지중해 동·중부 전역에 걸쳐 형성된 단일 국제체제와 뒤얽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기 청동기시대는 초강대국의 시대였다.

앞서 보았듯 제18왕조의 위대한 파라오들은 신왕국 이집트 New Kingdom of Egypt를 정복 국가로 변모시켰고, 근동 전역에서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미탄니 왕국 Mitanni Kingdom에 대한 그들의 압박 전략은 서기전 1450년 이후 히타이트 제국 Hittite Empire의 부흥을 초래했다.

미탄니 왕국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히타이트인 Hittite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이 지역 북부의 패권을 다시 장악했다.

아시리아인 Assyrian도 재기했고, 바빌로니아 Babylonia의 카시테 왕조 Kassite Dynasty는 당대의 경제적·군사적 국제관계에서 주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 강력한 제국 사이에 규모는 작지만 중요성이 큰 수많은 국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리아 해안과 하천 계곡을 따라 집결되어 있었고, 서쪽으로 키프로스 Cyprus와 에게해 Aegean Sea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다.

 

 

국제 외교

 

국제관계에서 전쟁은 여전히 대표적인 현상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후기 청동기시대의 강대국들은 시일이 지나면서 교역과 외교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세력균형을 발전시켰다.

국제주의는 함무라비 Hammurabi 시대 이후 이미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전 14세기(서기전 1400~1301까지)에 이르면서 하나의 국제적 규범이 발달했다.

이 규범 속에서 많은 국가의 지배자들은 보호와 안정이 교역을 번영케 하는 반면, 전쟁은 파괴적일 뿐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케나텐 Akhenaten이 수도로 삼았던 엘-아마르나 el-Amarna에서 현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기록들은 이런 국제 외교 규범의 전모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중대 현안을 놓고 각국 지도자들 사이에 때로 의사소통의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대체로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는 외교 언어가 발달해서 유력 지배자들이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고, 군소국 군주들은 파라오와 히타이트 왕 같은 막강한 지배자들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하면서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런 의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에게 커다란 실례를 범하는 일이었다.

서기전 13세기의 어느 아시리아 Assyria 왕은 히타이트 지배자 하투실리스(하투실리) 3세 Hattusilis(Hattusili) III에게 '형제'란 칭호를 썼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이 시기 지배자들은 푸짐한 선물을 서로 돌렸고 결혼 동맹을 맺기도 했다.

전문 외교 사절들이 근동의 세력 중심지들을 오가며 값진 선물을 실어 나르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었다.

이집트에서는 그 사절들이 상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외교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파라오를 상대로 교역 가능성을 탐문하기도 했다.

 

 

국제 교역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교역이 국제 관계의 중요한 요소였다.

지중해 동부 해안을 오르내리는 해상무역이 번창하면서, 우가리트 Ugarit와 비블로스 Byblos 같은 소규모 해안 중심지가 강력한 상업 도시국가로 탈바꿈했다.

울루 부룬 Ulu Burun에서 발굴된 대형 난파선에서도 나타났듯이, 상선 한 척의 화물칸 내부에도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서 발트해 Baltic Sea 연안에 이르는 온갖 지역에서 생상된 수십 종의 물품이 가득 차 있었다.

강대국들은 국제 시장에서의 물품 유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기존 육상 교역로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활용했다.

상업은 급속히 후기 청동기 모든 제국의 생명줄이 되어가고 있었다.

 

풍요롭고 수익성 높은 교역로들은 예술의 모티프 motif(모티브 motive: 예술 작품을 표현하는 동기가 된 작가의 중심 사상), 문학·종교 사상, 건축 양식의 발전, 그리고 도구와 무기의 제작 기법 발전 등에게 기여했다.

과거에는 그와 같은 영향력이 완만하고 불규칙하게 확산되었지만,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의도적·계획적으로 세계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다.

이집트인은 가나안인의 유리 제품을 즐겼고, 청동기시대 그리스인은 이집트의 부적을 높이 평가했으며, 우가리트의 상인은 그리스의 도기와 양모 제품을 극구 찬양하고 선망했다.

다른 문화권 물품에 대한 이와 같은 적극적인 갈망의 사례는 끝도 없이 열거할 수 있다.

 

이런 세계주의는 특히 상업도시에서 두드러졌다.

우가리트의 예를 들어보자.

복잡한 상거래와 다양한 언어 때문에 도시 상인들은 근동 대부분 지역에서 통용되던 쐐기문자보다 단순한 형태의 문자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말기에 우가리트 알파벳이 등장했다.

약 30개의 자음만으로 이루어진 우가리트 알파벳은 읽는 사람이 그 모음을 추측해야만 했으므로 전달의 명료성은 일부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우가리트 알파벳 체계는 쐐기문자에 비해 배우기 쉽고 융통성도 있어서 항구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긴박한 거래 내역을 기록하는 용도로 적합했다.

 

시장, 자원, 교역로의 탐색은 국제적인 경제경쟁을 가속화시킨 한편 각 문화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성과도 가져왔다.

카데시 부근에서 치러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카데시 전투 Battle of Kadesh(서기전 1275년경) 이후 막강한 신왕국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 Ramesses II는 끝없는 전쟁보다는 북방 인접국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히타이트인과 체결한 조약은 서기전 13세기 이 지역의 지정학적 안정에 밑거름이 되었고 경제적 통합을 촉진시켰다.

하지만 더 큰 규모의 통합은 동시에 더 큰 상호의존을 의미했다.

이 국제체제에서 어느 한쪽이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영향은 반드시 다른 지역에까지 미칠 것이었다.

 

 

팽창과 취약성

 

몇 백 년이 지난 뒤 동부 지중해 전역에 걸쳐 교역 및 외교 시스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멀리 확장될수록 취약해졌다.

이런 취약성은 새로 편입된 시장이 낮은 수준의 문명을 지닌 사회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거칠고 호전적인 정신을 지닌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였고, 하나로 통합된 후기 청동기시대 세게에서는 한층 더 위험한 상대였다.

다음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3. 1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