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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7: 구리 아차산 제4보루

새샘 2022. 3. 18. 16:54

1990년대 발굴된 구리 아차산 제4보루 유적 위치

 

'보루堡壘'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최후의 보루'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 또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것' 정도로 이해된다.

'보堡'는 '작은 성'이란 뜻이고, '루壘'는 '진이나 성채'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굳이 해석하면 보루란 '일반적인 산성보다 작은 성'을 말하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이라 되어 있다.

 

우리나라 유적 중 유일하게 보루라는 이름이 붙은 유적은 2004년 사적 제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 阿且山 一帶 堡壘群'이다.

아차산 보루, 용마산 보루, 시루봉 보루, 수락산 보루, 망우산 보루 등 아차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보루들의 총칭이다.

이 보루들은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하거나 서로 연접해 있다.

이에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서울 지역의 보루뿐만 아니라 구리시의 보루들도 그 발굴 내용을 함께 정리하였다.

 

아차산 일원의 유적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경이며, 당시 백제나 신라의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다 이후 1994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해 여러 점의 고구려 토기가 수습되면서, 앞서 1977년에 발굴한 고구려 유적인 구의동 유적과 비슷한 성격의 군사 유적으로 추정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이 지표조사에 따라 구리문화원에서는 아차산 일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구의동 유적에 이어 고구려 유적에 대한 두 번째 발굴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고구려 유적으로 이해하고 처음으로 실시된 발굴조사였다.

 

 

아차산 제4보루 발굴 개토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여러 차례 지표조사를 실시한 뒤 1977년에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조사 결과 예상보다 많은 유구들이 복잡한 양상을 이루어 출토되었기 때문에 조사구역의 북쪽 구역만 먼저 조사하고, 그 다음 해인 1978년 2차 조사가 이어졌다.

2차 조사구역은 1차 조사구역보다 훼손이 덜하여 양호한 상태로 유구가 노출되었으며, 유물도 원래 위치에서 이동되지 않은 채로 출토됨으로써 유적의 성격 파악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아차산 제4보루 1호 건물 터 온돌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아차산 제4보루 내부 북쪽 구역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유적 위치는 해발 285.8미터의 작은 봉우리로 남북으로 뻗은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단에 해당한다.

이 봉우리는 남북으로 긴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양쪽 끝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 형태를 띠고 있다.

 

발굴단은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아차산 제4보루의 발굴 결과와 유적의 성격에 대해 정리하였다.

아차산 제4보루는 아차산 일대에 위치한 많은 고구려 보루 중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외곽 석축 성벽과 내부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은 타원형으로 둘레 210미터, 높이 4미터 가량 되며, 내부에는 모두 7기의 건물이 축조되어 있었다.

 

7기의 건물 터 중 가장 남쪽의 1기를 제외하면 모두 남북 방향으로 성벽의 긴축 방향과 일치되도록 축조되었으며, 긴 네모 형태의 평면이다.

 

 

아차산 제4보루에서 출토된 글자가 새겨진 토기들(왼쪽부터 차례로 '후부도O형後部都O兄', '지도형支都兄', '염모형冉牟兄', 위 'O고O告' 아래 '대大'(사진 출처-출처자료1)

1호 건물 터의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지도형支都兄' 글자가 새겨진 접시와 함께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 종류들이 출토되었으며, 8호 온돌 아궁이에서는 철제 투구 1점이 거꾸로 뒤집힌 채 출토되었다.

저수시설은 3호 건물 터 내부에서 2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암반풍화토를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보아 물과 관련된 시설이 분명하다.

 

발굴단은 이 보루에는 10여 명으로 구성된 최소단위 부대 10개가 주둔하였으며, 남하하는 고구려군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초기지이거나 또는 한강을 건너 북상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시설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주로 고구려 토기와 철기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토기류는 모두 실생활에 사용된 것으로 저장용기, 운반용기, 조리용기, 배식용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류는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용기류 등이다.

간이대장간 시설 주변에서는 쇳물이 굳으면서 형성된 슬래그 slag(광재鑛滓)로 보이는 철제 찌꺼기가 출토되어 이곳에서 간단한 철기 제작과 수리가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복원된 아차산 제4보루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단은 이 보루가 구축된 중간 연대를 6세기로 보고, 상한은 5세기 중반, 하한은 6세기 중반으로 추정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475년부터 551~553년까지 80년 가량이지만 이번 제4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의 대부분은 6세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중반경으로 보이는 유적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발굴단은 보고서에서 제4보루 정비와 복원에 대한 계획안을 제시해 놓고 있다.

현재 아차산 제4보루는 복원되었으며, 시민들이 자유롭게 보루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022. 3. 1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