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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때 조선인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새샘 2022. 3. 14. 14:56

전북대 교수 이의주 화백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를 상상해 그린 기록화(사진 출처-서울신문 온라인판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1125021004)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훈련도감에서 해고된 조선의 구식 군인들의  체불 임금을 조선 조정이 저급 불량쌀로 지급함으로써 구식 군대가 별기군別技軍(신식 군대)과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며 일으킨 난]을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게 진압을 요청하여 조선 땅에 들어온 청군이 진압한 것이 결국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 이유는 임오군란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이 조선 조정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면서 자국 영사관 보호 명목으로 군대 주둔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2년 뒤인 1884년에는 조선이 청나라에게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일본 지원을 받고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가 또다시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청군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구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여 압도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듬해인 1885년 청나라 북양통상대신(북양대신)北洋通商大臣 이홍장李鴻章(리훙장)은 일본 전권대사全權大使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와 텐진조약(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게 된다.

 

이 텐진조약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것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우위 없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애매한 조문 때문이다.

3개조로 된 조문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청과 일본은 조선 반도에서 즉시 철군을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제2조. 조선 정부가 군대를 교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지키며, 외국인 교련관을 고용할 때는 청국인과 일본인 무관을 파견하지 않는다.

 제3조. 조선에 중대 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양국 또는 어느 한쪽이 파병하게 될 때는 우선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리고[행문지조行文知照],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고 주둔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3조의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리는(行文知照)' 조문에 대한 해석에서 '청은  양국이 협상하고 청 황제의 추인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 '일본은 단순히 조약 내용을 서로 대조하고 공문으로 확인하는 것'이란 사전적 의미로 이해한 것이었다.

이 해석의 차이로 청일 양국은 계속 외교 분쟁을 겪다가 결국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1894년 7월 25일에 시작하여 1895년 4월까지 계속된 청일전쟁淸日戰爭의 특징은 청일양국의 땅이 아닌 조선 땅에서 일어난 전쟁이며, 사망자도 두 나라 군인보다 조선인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일어난 이유는 바로 앞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두 차례 저질렀던 조선 조정의 외국 군대 진입 요청이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때 또 다시 있었기 때문이다.

 

1894년 2월 고부군의 동학도와 농민들이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에서 1894년 6월에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되자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의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사태 진압을 요청하여 6월 청군이 조선 땅에 들어왔고 텐진조약에 따라 곧 바로 일본도 조선 조정의 허가도 받지 않고 조선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은 안산 풍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풍도해전이었다.

당시 청군은 동학혁명군을 저지하기 위해 소규모가 아산 땅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더 많은 지원군을 태운 배가 아산 앞바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군이 전함을 풍도 앞바다로 진출시켜 청군을 태운 배를 기다리고 있다가 선전포고 없이 1894년 7월 25일 공격하여 침몰시켜 버린 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공식 선전포고는 1894년 8월 1일]

이어 천안 지역인 성환전투에서도 바다로부터의 군대 수송이 차단된 청군을 일본이 몰아부쳐 승리를 거두었고 청군은 북쪽 평양으로 후퇴함으로써 중부 이남은 일본군만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 관군 및 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조일 연합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1894년 11월 조일연합군과 공주에서 맞붙은 1차전부터 현저한 일본군 화력에 밀려 동학농민군은 크게 패배했고, 이어 우금치를 비롯한 모든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청일전쟁 기간 중에 있었던 동학농민운동 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청일전쟁 때 조선의 사망자 수가 청나라와 일본 전사자보다 더 많게 된 이유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에서 최태성 강사는 청일전쟁 기간 중에 3국의 사망자 수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관련 연구 기록에 '일본 군 약 1만 3천 명, 청군 약 3만 명이었고, 조선은 주로 농민군과 일부 관군을 포함하여 3만~5만 명 수준이며, 심지어 20만~30만 명이라는 일부 기록도 있다'라고 했다(출처자료1). 

 

이에 대한 관련 기록은 바로 2013년 매스컴에 보도된 자료에 들어 있는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출처자료2).

 

1995년 일본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신문지에 싸인 채 발견된 6구의 유골 가운데는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고 한다는 일본어 글씨가 쓰인 유골(앞줄 맨 왼쪽)이 포함돼 있었다. 삿포로 농학교 출신 사토 마사지로가 동학혁명 당시 수집했던 이 유골 발견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동학농민혁명 공동연구가 시작됐으며,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이란 책도 그 성과 가운데 하나다(사진 출처-출처자료2).

 

다음은 청일전쟁기인 1895년 1월 일본 진압군이 전남 나주, 해남, 장흥 일대의 동학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했던 당시, 후비後備[후방 예비부대]인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에 배속돼 있던 한 일본인 병사가 남긴 ‘진중일지陳中日誌’에 있는 당시 참상이다.  

 

“그곳(나주)에 도착했다. 남문 바깥에 작은 산이 있었고 거기에 주검들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민병 또는 우리 부대 병사에게 붙잡힌 자는 심문한 뒤 중죄인은 죽였다.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해남의) 잔존 동학 무리 일부인 7명을 붙잡아와 오늘(1월31일) 성 바깥 밭 가운데에 일렬로 세워 놓고 총검을 부착한 뒤 모리타 일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찔러 죽였다. 이를 구경한 한인韓人들과 조선 병사들이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1995년 7월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효수당한 동학 농민군 해골이 발견됐고, 일본군의 공식보고서도 일부 남아 전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당시 상황이 담긴 개인의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례적이다.

'진중일지'는 이노우에 가쓰오(정상승생井上勝生) 홋카이도대학(북해도대학北海道大学) 명예교수가 2012년 봄 일본의 한 향토사학자의 소개로 도쿠시마현(덕도현徳島県) 출신 병사의 후손에게서 입수하였다.

이노우에 교수는 나카쓰카 아키라(중총명中塚明) 나라여자대학(나랑여자대학奈良女子大学) 명예교수, 박맹수(58) 원광대 교수와 함께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또 하나의 청일전쟁>(고분켄 펴냄)에서 이 일지의 상세한 내용을 밝혀놓았다.

 

미나미 고시로(남소서랑南小西郞) 대대장이 이끈 후비군 제19대대는 “남김없이 죽여라”는 당시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농민혁명군 ‘삼로포위섬멸작전’에 나선 부대였다.

미나미 대대장이 이노우에 가오루(정상형井上馨) 당시 주한 일본공사에게 올린 공식보고서에선 나주 처형자 수를 230명이라 밝혔지만, 이 진중일지는 그 수가 3배 가까이 되는 680명이라 적시하고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붙잡아서 총살' '심하게 고문' '모조리 총살' '민가를 모두 불태워라' '불태워 죽여라[소살燒殺]' '고문하고 총살한 뒤 주검은 불태워라' 같은 말들이 곳곳에 나오는 이번 일지가 “일본군 학살에 따른 지옥도를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최근 동학농민운동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숨진 동학 농민들은 3만~5만명에 이른다.

3인 공동연구의 좌장인 나카쓰카 교수는 이 일지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나 연구자들의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문부성은 일본 고교 일본사 교과서 집필자였던 이에나가 사부로(가영삼랑家永三郎) 교수가 1965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유명한 ‘교과서 재판’에서 이에나가 교수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청일전쟁 때의 조선인민의 반일저항'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했고, 1997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문부성 손을 들어주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들의 저항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학 ‘토벌’ 과정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청국(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날조해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올린 사실도 밝혀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동학농민운동 학살을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genocide(대량학살)'로 규정했다.

청일전쟁 때 뤼순학살과 2차대전 때의 난징학살 등 일본군이 20세기에 저지른 집단 인종학살의 시초가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다.

역사가 하라다 게이이치(원전경일原田敬一)는 최근 저서 <일청전쟁>에서 청일전쟁 당시 전사자를 '일본인 약 2만 명, 중국(청)인 약 3만 명, 조선인(동학농민전쟁 전사자) 3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청일전쟁’이라는 이름을 단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실은 한반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후비 제19대대의 경우 전사자는 단 1명,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진 자는 36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서방의 최신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한 일본 진압군(최대 4000명으로 추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깃발을 흔들면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순식간에 언덕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일본군을 향해 쇄도하던’ 농민들을 손쉽게 제압했다.

 

청일전쟁 당시 발행된 <우와지마(우화도宇和島) 신문>에 실렸던 홍주(충남 홍성군)에 투입된 제2중대 배속 일등군조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고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은 전한다.

“적(농민군)이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적은 앞다퉈 어지러이 진격해 왔다. 400m까지 다가오자 세 방면에 포진한 우리 부대가 먼저 저격을 시작했다. 백발백중, 실로 유쾌했다. 적은 오합지졸의 주민. 공포감으로 전진해 오지 못하고.(이날 3100여발을 쏘았다)”

 

당시 동학농민군 학살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육오종광陸奥宗光)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 등의 직접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발로 청나라가 파병하자 톈진조약을 핑계로 건너와 경복궁을 점령했다.

‘척양척왜’를 내세운 동학 2차 봉기는 이런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컸다.

당시 대량학살을 저질렀던 일본 후비병은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28~32살의 기혼남성들로 구성돼 있었으며, 명성황후 시해를 현장에서 자행한 것도 바로 이 후비병이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개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참패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동학농민군의 장기 게릴라전이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이는 '나중의 중국 공산군이나 베트콩의 게릴라전 같은, 강자인 서방 침략에 맞서 약자인 아시아인들이 전통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의 선구를 이룬 것'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1. tvN 벌거벗은 세계사 2021. 2. 27 방송 '일본 제국주의 시작의 비밀 – 왜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일어났나?' https://www.youtube.com/watch?v=etn02fvdYNo

2. 한겨레신문 온라인판 2013-07-23 기사, '한줄로 세워 놓고 일제히 총검으로···'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596767.html

3. 위키백과 동학농민혁명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_%EB%86%8D%EB%AF%BC_%ED%98%81%EB%AA%85

4. 구글 관련 자료

 

2022. 3.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