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5: 에게 문명 - 미노아와 미케네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5: 에게 문명 - 미노아와 미케네

새샘 2022. 3. 22. 22:56

에게 문명(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tion8531&logNo=221208561589)

 

○후기 청동기 시대의 문명

 

 후기 청동기 시대의 문명
 미노아 문명  서기전 1900~1500년
 미케네 문명  서기전 1600~1200년
 근동 국제체제  서기전 1550~1200년
 신왕국 이집트  서기전 1550~1075년

고대 그리스인 Ancient Greek[서기전 1500~300년의 고대 그리스 Ancient Greece 시대 사람]은 영웅적 과거에 대한 수많은 전설을 소중히 간직했다.

머나먼 그 시절에 거인들은 신과 서로 어울렸고, 강력한 왕국들—후대의 고전 그리스 Classical Greece[서기전 5세기~서기전 323년] 세계에 알려진 그 어떤 왕국보다도 크고 강력했다—은 힘과 영광을 얻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학자들은 그리스 역사에 선사 시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트로이 전쟁 Trojan War, 테세우스 Theseus와 미노타우로스 Minotaur, 오디세우스 Odysseus의 모험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는 그리스인의 상상력의 산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그리스 역사는 최초의 올림픽 경기가 열렸다고 기록된 해인 서기전 776년에 시작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그리스 Greece는 지중해 세계 또는 후대의 영광스러운 고전 그리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 말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Heinrich Schliemannn은 이 신화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호메로스 Homeros 서사시를 길잡이 삼아 그는 아나톨리아 Anaotolia 서북 해안 부근에서 트로이 Troy 유적지를 찾아냈다.

그는 또 그리스 본토에서 한때 강력했던 수많은 요새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미케네 Mycenae의 전설적인 왕 아가멤논 Agamemnon의 고향도 있었다.

그 후 아서 에번스 경 Sir Arthur Evnas은 크레타 섬 Crete Island의 크노소스 Knossos에서 거대한 궁전宮殿(궁정宮廷, 궁궐宮闕)을 찾아냈다.
에번스는 이 부유하고 장엄한 문명을 미노스 왕 King Minos—한때 크레타를 거점으로 삼아 에게해 Aegean Sea를 지배했다고 후대 그리스인이 믿었던 막강한 지배자—의 이름을 따 미노아 문명 Minoan Civilization이라고 불렀다.

 

초기에 결론에 많은 오류가 있긴 했지만, 슐리만과 에번스의 발견은 그리스 문명 Greek Civilization과 그 뿌리에 대한 재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청동기 그리스'(그리스 신화 속 미케네에 토대를 둔 강력한 왕국 이름을 따서 '미케네 그리스 Mycenaean Greece'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가 서기전 2천년기 지중해 세계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고전 그리스 문화의 기초가 이 시기에 수립되었다는 점이 확실시되고 있다.

역사적 증거의 한계 때문에 이 문화의 많은 부분은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지만, 미노아 문명의 중요성만은 더 이상 부정되지 않는다.

 

 

미노아 해양 제국 Minoan Thalassocracy

 

서기전 5세기에 아테네 Athens의 역사가 투키디데스 Thucydides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 King Minos이 '해양제국 thalassocracy'을 지배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에번스가 크노소스를 발견하기 전까지 투키디데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오늘날에는 에번스의 주장이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미노아 문명은 서기전 1900년에서 1500년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집트 중왕국, 히타이트 고왕국과 같은 시기였다.

그러나 크레타에서 문명의 흔적은 서기전 2500년에도 찾아볼 수 있다.

서기전 1900년에 이르러 이 문화는 고도의 물질적 수준에 도달했고 세련된 건축 기술을 발달시켰다.

그 결과 서기전 1900년에서 1500년까지의 미노아 문명은 '궁정 시대 Palace Age'라고도 불린다.

근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미노아 궁정에서는 배급 경제가 핵심 역할을 했다.

거두어 모은 재원을 궁정 관료가 적정성을 판단해 배급했던 것이다.

또한 궁정은 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 등의 생산 중심지였다.

인상적인 궁전 건축물이 이 시기부터 크레타에서 출현했다.

훌륭한 벽화와 실내 배관이 구비된 크노소스의 화려한 궁전은 면적이 몇 만 제곱미터(몇 천 평)에 달했고, 몇 백 개의 방과 구불구불한 복도가 있었다.

발굴자들은 바로 이 궁전이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 Theseus가 무시무시한 미노타우로스 Minotaurus(Minotaur)를 죽인 저 유명한 '라비린토스 Labyrinthos(미궁迷宮, Labyrinth)' 이야기의 소재임을 알아챘다.

 

미노아의 성공 요인은 해외무역에 있었다.

그들은 이국적인 상품을 대량으로 이집트, 서남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등과 거래했다.

미노아인 Minoan은 키프로스를 경유해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에 해당하는 지중해 동부 해안지역과도 거래했다.

이들 교역로를 따라 예술도 함께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이 때부터 미노아 양식 미술 Minoan art이 나일 Nile 삼각주와 지중해 동부 해안지역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미노아의 궁전은 요새화되어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미노아 프레스코화 fresco[덜 마른 석회 벽면에 수용성 물감으로 그린 벽화]에 묘사된 쾌활하고 목가적인 장면과 겹쳐져 20세기 초 학자들로 하여금 미노아인이 평화를 사랑하며 상업에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결론짓도록 만들었다.

두 손에 뱀을 쥐고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모습으로 그려진 미노아 모신母神 Minoan Goddess에 대한 미노아인의 숭배는, 미노아인의 삶이 평화로웠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자 미노아 문화의 강력한 모계제도적 요소를 보여주는 흔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낭만적 상상은 오늘날에 이르러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크레타는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상 방어의 필요성이 적었지만, 미노아인의 광범위한 무역망을 고려할 때 그들이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적대세력이 크레타 해안에 접근하기도 전에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미노아 문명에서 황소 숭배—근동의 부계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특징이다—에 관한 증거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신 희생이 미노아 종교의 공식적인 부분이었다는 증거도 나온다.

미노아 문화에서 여성은 저 유명한 미노아 직물—크레타 섬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의 생산자로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미노아 사회는 평화적인 사회도 아니었고 모계제도적 사회도 아니었다.

 

미노아인에 대해 많은 부분이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에번스는 비슷하지만 훨씬 명료하고 표현력이 좋은 또 다른 문자인 선문자 B—이 또한 에번스가 발견하고 이름 붙였다—와 구분하기 위해 이것엔 선문자 A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선문자 A로 기록된 언어가 인도-유럽어가 아니라는 점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직도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미노아 상업 활동의 한 축은 그리스 본토였다.

도자기, 금속세공품, 직물 등 그리스 본토에 남아 있는 다양한 유물은 미노아의 기술 및 수공업자들이 크레타에서 본토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노아 크레타와 미케네 그리스의 관계가 정확히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서기전 1600년 이전의 미노아인은 본토 그리스인보다 훨씬 세련되었으며, 그 결과 그리스 산악지대의 주민을 적어도 상업적으로—아마도 정치적으로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웅 테세우스와 라비린토스의 신화에 따르면, 영웅은 미노스 왕이 부과한 무거운 조공으로부터 아테네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볼모로 크레타에 갔다.

이 이야기는 크레타가 본토 그리스인을 지배했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노아인과 그리스 본토의 긴밀한 접촉은 미케네 그리스에 다양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즉, 그리스 본토는 물질문화 수준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이 시기 근동 지역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국제적 상업·외교 관계의 네트워크에 점점 더 긴밀하게 끌려들어갔다.

본토 주민은 요새화된 거대한 궁전 건축기법을 익혔는데, 그것은 미노아의 궁전과 히타이트인이 선호한 위압적인 성채의 건축 양식을 혼합한 건축물이었다.

그리스인은 미노아인에게서 글 쓰는 법도 배웠다.

그들은 선문자 A를 받아들여 자신의 언어에 잘 맞도록 변형시켰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에번스가 선문자 B라고 이름붙인 문자였다.

선문자 B는 그리스 최초의 문자였다.

 

 

미케네인 Mycenaean

 

미케네 그리스: 그리스는 산악 지형과 특이 지형이 만들어낸 몇 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을 갖고 있다. 그리고 큰 강이 거의 없으며 그나마 있는 강들마저 먼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 지도에는 언제나 소아시아 서부 해안과 에게해 섬들이 포함되어 있다. 바다로 에워싸인 이 건조하고 산이 많은 지역은 그리스 문명의 성격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과연 근동 모델은 그리스에도 적합했을까?(사진 출처-출처자료1)

1950년대의 선문자 B 해독은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청동기시대 연구에 몰입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슐리만과 에번스 등이 발굴한 감명 깊은 유적지들이 고전기 그리스 문명과 연관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문자 B가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이라는 사실은 그리스 역사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확증해주었다.

과연 미케네 그리스 Mycenaean Greece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

 

그리스어를 사용한 인도-유럽어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파상적으로 그리스에 이주해 들어갔다.

이주 초기는 서기전 2천년기 초입에 발생한 수많은 그리스 중요 유적의 파괴 및 새로운 건축 양식과 도자기 양식의 등장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요한 주민과 물자의 이동은 서기전 1600년 즈음에 일어났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집단은 그들끼리도 섞였고, 펠라스기인 Pelasgians[서기전 12세기에 그리스에 살던 종족을 말하며 펠라스기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인들만 사용했다]이라고 알려진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주민과도 섞였다.

그러나 '그리스인 Greek'이 탄생한 결정적인 단일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탁월한 미케네 연구자 존 채드윅 John Chadwick이 말했듯이, 청동기 중기와 후기의 그리스 주민은 언제나 그리스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미케네 문명 Mycenaean Civilization은 그 과정의 절정을 보여준다.

서기전 1500년에 이르러 전사들이 지배하는 막강한 궁정 요새들이 그리스 곳곳에 등장했다.

이 전사들은 묘비에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는 기록을 남겼고 전쟁 도구를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로 함께 묻었다.

이들 초기 지배자의 권력은 전투에서의 지휘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얼마만큼이나 약탈물로 보상을 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그들 중 강력한 지배자들은 그리스를 경유하는 주요 항로의 전략 거점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그들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머물며 상업 및 해적 활동에 종사했다.

고대 세계에서 상업 활동과 해적 행위의 구분은 모호했고, 그것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고대와 근대의 다른 수많은 해상 민족과 마찬가지로 미케네인은 할 수만 있으면 약탈을 했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교역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아마도 미노아 문화의 영향로미케네의 궁정 요새들은 한층 복잡한 사회로 발전했다.

요새는 정치 중심지이자 경제 잉여물의 비축과 분배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서기전 13세기에 이르러 몇몇 미케네 지배자들은 인구 10만에 달하는 왕국을 건설했는데, 이는 고전기 전형적인 그리스 도시국가를 무색하게 하는 규모였다.

왕국의 궁전은 근동의 모델을 차용해 건축되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가 그리스의 풍경에 썩 잘 어울러지는 않았다.

전쟁에서도 미케네인이 근동의 예를 모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미케네의 왕들은 동시대 근동의 왕들이 애용하던 전차를 소중히 여겼지만, 실제로 전차는 그리스의 바위투성이 지형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미케네 그리스인 Mycenaean Greek은 근동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기전 1400년경 그들은 크레타 섬을 정복하고 크노소스를 점거해 미케네인의 중심지로 활용했다.

만일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3세 Amenhotep III가 언급한 케프티우 Keftiu가 크레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파라오는 크레타의 미케네 정복자들과도 협상을 했을 것이다.

서부 아나톨리아에서는 적어도 한 명의 미케네 왕이 히타이트 왕을 '나의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케네인은 근동에서도 전사와 용병으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미케네인이 요새에 거주하는 엄청난 수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있던 것은 상업과 약탈 덕분이었다.

주변 배후지만으로는 그 많은 인구를 유지할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사령관인 왕을 우두머리로 한 미케네 그리스의 강력한 궁정, 전사 귀족, 지방 관료, 국가의 토지 보유 규제, 경제적 재분배, 거대한 영토의 왕국 등 미케네 세계의 정치적·상업적 기반은 고전기 그리스보다는 동시대 근동 세계와 더 닮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대에 등장하는 그리스 문명의 중요한 특징—그리스어도 포함—의 기원을 미케네로 소급할  수 있다.

선문자 B 서판에는 상당한 경제적·정치적 권리를 지닌 사회집단 '다모스 damos'가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후대의 많은 그리스 도시에서 정치권력의 완전한 위임을 요구한 대중 집단 '데모스 demos'의 선구일 것이다.

서판에는 제우스 Zeus, 포세이돈 Poseidon, 디오니소스 Dionisos, 데메테르 Demeter 등 고전 시대부터 친근했던 그리스 신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신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이름이 붙여진 채 정체성이 모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전기 그리스인들이 초인적 업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전설적인 미케네 선조들의 후예로 자처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후대 그리스인은 미케네 선조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선조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리스인의 상상력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케네 세계 Mycenaean World는 서기전 13세기(서기전 1300~1201년) 말경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붕괴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자연재해, 한발, 기근, 질병, 사회불안 등 갖가지 원인들이 제기되었다.

오늘날 우리 지식으로는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입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미케네 붕괴가 초래한 결과는 한층 명료하다.

미케네는 상업·정치·군사적 관계의 국제 네트워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일부분이었고, 따라서 미케네 세계의 붕괴는 근동 세계 전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바다 민족과 청동기시대의 종말

 

미케네 세계가 붕괴되자 근동 전 지역에 파괴의 물결이 북에서 남으로 휩쓸고 지나갔다.

이 참화의 본질은 모호하다.

왜냐면 이 사건은 파괴를 자행하면서 이집트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들이 통과한 경로의 모든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한 민족의 소행이기 때문이다.

서기전 1176년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3세 Ramses III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그토록 신속히 후기 청동기시대의 국제 체계를 무너뜨린 침입자들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침입자들을 물리친 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람세스 3세가 조성한 메디네트 하부 Medinet Habu 신전의 비문과 돋을새김(부조浮彫)에서 람세스 3세는 그들을 '바다 민족 Sea Peoples'[청동기시대 말경인 서기전 13세기에 근동을 침략한 공격적인 선원 집단으로 히타이트 제국 같은 고대 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여겨진다]이라고 불렀다.

바다 민족의 여러 집단들은 이집트인에게 낯익은 존재였다.

이집트인은 한때 바다 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적이 있었고, 때로는 적국의 왕에게 고용된 바다 민족에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

그들의 무기와 의상에 대한 람세스의 묘사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다 민족이 대부분 에게해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집단은 펠레세트 Peleset였는데, 그들은 이집트에게 패한 후 그들의 이름을 딴 해안 지역인 팔레스타인으로 물러나 거주했다.

 

북쪽에서 시작된 파괴의 물결은 미케네 그리스의 궁국적인 붕괴를 초래했다.

북부 교역망의 붕괴가 미케네 왕국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미케네 왕국들은 인구 과잉, 심각한 식량 부족, 끊임없는 전쟁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그야말로 종말론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절망에 빠진 피난민의 행렬이 에게해 일대에서 빠져나와 도망쳤다.

북부의 상업 활동 쇠퇴는 히타이트인의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히타이트 왕국은 무서운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성난 파도처럼 밀려온 적에 맞서 수도 하투사스Hattusas(하투사 Hattusa, 하투샤 Hattsha)를 구하고자 필사적으로 싸웠던 히타이트 왕의 기록을 통해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다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지중해 동부 해안의 상업 도시국가 우가리트 Ugarit 왕은 키프로스 Cyprus에 있는 '형제' 알라시아 Alashiya(Alasiya)의 왕에게 편지를 보내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우리가 오늘날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편지를 기록한 진흙 서판이 그의 궁전을 파괴해버린 화재로 인해 단단하게 구워진 덕분이다.

편지는 발송되지도 못한 채로 우가리트는 멸망했고 바다 민족은 전진을 계속했다.

 

바다 민족의 팽창은 지중해 세계의 수많은 문명을 파괴했다.

파괴가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든 도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업도 소멸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타이트 제국 Hittite Empire은 사라졌고, 허약하고 단명한 수많은 공국公國 duchy[왕보다 낮은 작위를 가진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동부 지중해 연안의 대규모 국제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새로운 집단들—때로 바다 민족의 분견대分遣隊(파견부대)들—이 해안에 거주했다.

미케네 그리스의 요새들 역시 붕괴되었다.

그리스는 그 다음 세기(서기전 11세기)에 인구의 90퍼센트가 줄어들었고, 이다음 250년 동안 이어진 문화적·경제적 고립의 암흑시대에 돌입했다.

이제 그리스인은 그들의 독특한 환경에 어울리는 새로운 도시를 다시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집트는 이 침략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주요 교역 파트너들이 멸망당했기에 이집트 역시 기나긴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시리아 Assyria도 침략의 여파로 고통을 겪었다.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아시리아인은 생존을 위해 싸웠다.

남쪽에 있던 카시테인 Kassite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지배체제 역시 바빌론 Babylon 경제와 함께 붕괴하고 말았다.

 

바다 민족의 침략 이후 몇 백 년 동안 근동에는 거대 제국이 등장하지 않았다.

500년 동안 치밀하게 다듬어졌던 후기 청동기시대의 국제 체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파괴의 흔적을 따라 새로운 전통과 새로운 문화적 실험이 등장했다.

새로운 정치적·종교적 지형이 모습을 갖췄고, 철에 기초한 새로운 야금술이 청동기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후기 청동기시대의 타고 남은 재에서 한층 더 지속적이고 활력 넘치는 문화가 솟아나왔다.

그것은 바로 철기 근동 문화 Iron Age Near Eastern Culture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3.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