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8: 아차산성 본문
아차산성 阿且山城은 광진구 아차산(해발 285m) 일대에 있는 열국시대 산성이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아차산성의 전체 길이는 1,125미터, 성벽 높이는 평균 10미터이고, 동·서·남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 있으며,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곱은성(곡성曲城: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은 성)이 남아있다고 되어 있다.
1973년에 이미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4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학술조사 때 문헌조사와 지표조사 등 일부 조사가 있었을 뿐이다.
과거 아차산 일대는 도굴이나 체육시설 등으로 파괴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1962년 워커힐 호텔이 건립되면서 발굴 당시까지도 아차산성이 호텔 부지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서 보호되고 있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광진구에서는 1995년 아차산성 종합복원계획을 수립하여 산성에 대해 보수공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석축인 성벽 일부가 노출되면서 발굴 및 실측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96년 아차산성 보수구간에 노출된 31.5미터 구간의 유적을 수습하는 작업이 먼저였다.
그래서 발굴조사는 노출된 유적을 수습발굴하고 실측조사를 실시한 다음, 정비작업의 방향과 1996년 성곽 정비공사의 방향을 정하고, 성곽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실시하였다.
발굴기간은 1997년 9월 26일부터 12월 20일까지였다.
조사 지역은 광진구 광장동 산 31번지 일대 아차산성 1996년도 보수구간 안 석축 형태의 성벽이 노출된 31.5미터 구간과 북쪽으로 5미터 정도 연장하고 남쪽으로 25미터 정도 연장한 60여 미터 구간이었다.
발굴조사 후 발굴단은 성벽의 석축과 유물로 미루어 발굴 당시의 아차산성은 삼국 항쟁기 어느 시기에 처음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보축한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계 유물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세발그릇(삼족기三足器) 등 백제계 유물들이었으며, 고구려계 유물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발굴단은 문헌 기록으로 볼 때 아차산성을 처음 쌓기 시작한 나라는 당연히 백제이긴 하겠지만, 한성백제시대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축성기법에 아차산성의 석성 축조기술이 활용되었는지, 그리고 당시 쌓은 아차산성 모습이 현재 노출된 유구와 동일한 것인지를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발굴단의 견해는 아차산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시사를 준다.
즉 서울에 남아 있는 백제 왕성들이 토성인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 남아 있는 석성인 아차산성에 대한 이해는 좀더 다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발굴조사에서 4,000여 개가 넘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주변에 건물 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보았다.
발굴단은 기와와 토기 등의 출토유물을 통해 성벽 축조의 중심 연대를 추정한 결과 통일신라 중기 전후가 이 성벽의 축조연대로 보았다.
즉 8세기경에 축성되어 9세기부터 신라 말까지는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후 아차산성에 대한 본격 발굴조사는 1999년부터 시작된다.
1999년 발굴조사는 비로 정밀 발굴조사를 위한 시굴조사이기는 했지만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였다.
즉 이 조사는 성벽 축조 시기 및 축조 방법, 성곽 시설물과 성 내부 전체에 산재해 있는 유구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발굴단은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성벽 구조와 축조방법, 그리고 축조시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아차산성은 일정하지 않은 육각형의 평면 형태로 쌓았고, 한 개 또는 2개 이상의 계곡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평면상 성곽 둘레는 1,038.58미터, 성 내부는 계단 모양 지형으로 되어 있다.
산성 중 가장 높은 곳은 지휘소인 장대將臺 터가 있는 산성 서북단의 해발 203.4미터, 가장 낮은 곳은 남문 터로 보고된 성의 남쪽 끝 해발 122미터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전체 면적은 31,271평, 성 내부 면적은 63,810제곱미터(19,304평)이다.
성벽은 내·외벽과 성벽 몸체(체성體城) 내부를 돌로 쌓고, 다시 외벽 바깥쪽으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축을 쌓은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외벽은 7미터 내외이고, 위쪽 성벽 폭은 약 6미터 정도로 추정하였다.
절반 정도만이 조사된 동문 터는 성벽을 완전히 뚫어 놓은 평문식平門式 성문이 아니라 성벽 중간에 성벽 방향과 수직으로 단면 '요凹' 모양 통로를 만들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형식인 현문식懸門式 성문 터이다.
성 내부 중요 지점에 대한 조사에서는 산성 내부 평탄면 중 A지구에서 5기의 온돌, 배수로, 기단 석축이 있는 건물 터의 하부구조가 발굴되었다.
B지구에서는 돌과 뻘흙을 이용해서 만든 지름 약 13미터의 둥근 연못이 발굴되었다.
C지구에는 긴 네모꼴의 대형 주춧돌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짧은 축인 남북 방향의 길이는 9.3미터에 7개의 주춧돌이 놓여 있었고 주춧돌 사이 간격은 1.21미터이다.
D지구에서는 건물 터의 하부로 보이는 석축과 2기의 원형 구덩이 유구(수혈유구)가 발굴되었고, 발굴되지 않은 구덩이 유구가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제 출토유물의 성격과 축조 연대를 알아보자.
토기는 총 12종 945점이 출토되었고, 철기는 쇠자루솥(철제초두鐵製鐎斗)를 비롯해 총 88점이 수습되었다.
발굴단은 성벽의 성토층에서 출토된 토기 분석을 통해 아차산성 석축 성벽을 처음 지은 연대는 7세기 전반으로, 그리고 유물과 유구의 폐기 양상과 토기 분석을 통해 산성이 폐기된 연대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하였다.
기와는 완전한 형태의 개체가 거의 없어 각변의 길이가 10센티미터 이상인 것을 대상으로 통계 처리를 한 결과 총 8,638점의 기와가 조사되었고, 이 중에는 와당과 글씨가 새겨진 명문銘文기와도 있었다.
특히 아차산성의 역사적 성격과 관련해서 기와에 새겨진 글씨는 매우 주목된다.
즉 대부분이 '북北', '북한北漢', '한산○漢山○', '수受', '해蟹' 등으로, 이미 보고된 '북한수국해□선北漢受國蟹□船'의 부분인 것으로 보이며, '북한산○北漢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와도 다량 발굴되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발굴단은 조사결과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아차산성을 신라의 한강 유역 방어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북한산성으로 비정比定[다른 비슷한 것과 비교하여 그 성격을 정함]했다.
아울러 보고서 끝 부분에서는 아차산성의 복원 계획을 제시하였으며, 현재 아차산성은 제2단계인 발굴조사가 진행 중으로, 이번 1999년 조사 이후 아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시작된 대는 2015년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차산성'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2340000,11&pageNo__=5_1_1_0&pageNo=1_1_2_0
3.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11/10/1997111070280.htm(명문기와)
4. 구글 관련 자료
2022. 3. 2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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