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혜원 신윤복 "쌍검대무" "주유청강" "단오풍정" "월하정인" 본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1813 이후)의 그림을 대표하는 것은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이며, 문화재청이 이 화첩을 국보 제135호로 지정하면서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화첩에는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 일상과 풍속을 그린 연작 풍속화 30점이 들어 있으며, 각 그림의 크기는 세로 28.2cm, 가로 35.2cm이다.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글과 함께 낙관이 있지만 연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과정은 알 수 없다.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이 구입해 새로 틀을 짜고 오세창이 표제와 발문을 쓴 것으로, 미술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18세기 말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혜원은 여색도女色圖(여자와의 육체 관계를 암시하는 그림)와 더불어 춘화도春畫圖(남녀의 성행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그렸다고 되어 있지만 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혜원의 이런 작품들은 풍속도로서는 퍽 재미있지만 회화적으로도 과연 성공한 그림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연구해 볼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서 풍속도로서 재미있는 것과 여색도로서, 회화로서 성공한 예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에 있는 풍속화들은 다 짜임새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서 또한 풍부하다.
특히 여자의 선은 비교적 빠르지 않고 느린 선으로 그렸는데도 어딘지 여색이 풍기는, 말하자면 혜원 아니면 안되는 고혹적인 그림이 나오고 있다.
아무튼 혜원은 여색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물론 혜원이 이런 풍속화만을 그린 것은 아니며, 산수도 전하는 것이 있다.
다만 현재로선 혜원하면 여색도이다.
그런데 혜원은 혜원 이후가 말이 없다.
하도 외도를 많이 해서 그런지, 쫓겨났다는 말이 있고 해서 그런지 뒷 얘기가 없다.
이것 하나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조선의 속화로서는 혜원의 여색도와 더불어 단원과 김득신의 풍속화 등 이 세 사람을 들 수밖에 없는 그런 독특한 그림 세계를 가지고 있다.
신윤복 필 풍속도첩에서 매우 인기 높은 다음 4점의 풍속화를 소개한다.
두 기녀가 양손에 칼을 들고 마주보고 칼춤을 추는 풍속화 <쌍검대무雙劍對舞>는 그림의 짜임새가 돋보인다.
세력 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조선 시대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으로 지금의 국립국악원에 해당)의 악공들과 가무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이다.
악공과 기생의 수로 보아 보통 규모의 놀이가 아님에도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직 주인 대감과 그의 자제낭관子弟郎官(아들과 부하 관리)인 듯하니 그의 세도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혹시 혜원을 키워준 어느 풍류 재상집에서의 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화면 구성에 있어서 대담하게도 일체의 배경을 거부하고 검무하는 광경만 화면에 가득 채웠음에도, 주제 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드러나지 않으니 이는 인물의 포치布置(넓게 널어 놓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리라.
시각의 초점이 되는 칼춤 추는 기생인 검무기劍舞妓들은 의상에서 청홍의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악공들이 이 두 검무기를 중심으로 둘러앉음으로써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꿰뚫어 순간의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혜원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했던가를 이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혜원의 주변을 보는 듯하여 흥미롭다.
<주유청강舟遊淸江>이란 맑은 강 위에서 즐기는 뱃놀이(선유船遊)란 뜻이다.
이 그림의 배경 그림인 절벽을 보면 혜원이 산수도 제법 그렸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왕도王都의 빛나는 문물은 여유롭게 즐기는 귀족생활의 격조 높은 운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녹음이 우거지고 강심江心(강의 한복판)에 훈풍이 일어나자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한강에 놀잇배를 띄우고 여가를 즐기고 있다.
호사豪奢(호화스러운 사치)를 금기로 여기던 조선왕조의 귀족들이니 호화선을 꾸밀 리 없고, 다만 일엽편주에 차일遮日(햇볕 가리개)를 드리우고 풍류를 아는 기생들과 젓대잡이(대금 부는 사람) 총각 하나를 태웠을 뿐인다.
신록이 그늘진 절벽 밑은 감돌아 나가는 뱃전에서는 시원한 생황 소리와 맑고 긴 젓대 소리가 서로 섞여 강심으로 휘돌아나가고 일렁이는 잔물결은 뱃전을 두드리니 여기서 시정詩情이 흐르고 사랑이 무르익는다.
뱃전에 엎디어 스치는 물살에 손을 담가보는 여인이나 이를 정겹게 턱을 고이고 지켜보는 선비의 모습에서도 그렇거니와 어깨를 감싸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한 쌍의 남녀에게서는 시샘이 날 만큼 농밀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런 중에서도 남의 일에는 아랑곳없이 망연히 뒷짐지고 시상詩想에 잠기는 여유를 보이는 것은 역시 왕조 귀족의 몸에 밴 교양이라 할 수 있다.
삿대질에 열심인 뱃사공도 자기 일에만 충실하고 있어 음악을 연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과 함께 질서 있는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시정을 담은 뱃놀이가 굽이굽이 강상江上을 누비며 '청아한 음률을 뿌려도 무심한 갈매기(백구白驅)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고 혜원은 화제를 썼다.
"일적만풍청부득 一笛晩風聽不得 (젓대 소리 늦바람 불어 들을 수 없고)
백구비하낭화전 白驅飛下浪花前 (갈매기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
<단오풍정端午風情>은 단옷날의 추천鞦韆(그네타기) 놀이를 나온 한 떼의 여인네들이 시냇가 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타고 냇물에 몸을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넷줄을 드리울만한 거목이 있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라면 당시 서울에서야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릉이나 성북동 골짜기는 물론이고 삼청동이나 인왕산 계곡을 비롯하여 남산이나 낙산 주변의 여러 골짜기들이 이런 놀이에 적합했을 테니 말이다.
여기가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로서는 퍽 깊은 계곡이어서 인적이 끊어진 후미진 곳이었기에 여인네들이 마음 놓고 의복을 훌룰 벗어 던지고 냇물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는 산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위틈에 숨어든 동자승 둘이서 이 기막힌 풍경에 희희낙락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혜원은 짐짓 화면의 딴 곳으로 옮기려고 그네 뛰는 여인은 화려한 의상을 입히고, 머리 손질하는 여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다리머리를 모두 풀어놓게 한 모양이다.
다홍치마에 반회장 노랑 저고리만으로도 지극히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백설 같은 속곳들이 반 넘어 내 보이는 것은 반라의 여인들에게서보다 훨씬 더 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앉은키보다도 더 큰 다리머리에서도 당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계집종인 듯한 여인이 젖가슴을 드러내 놓은 채로 옷보따리를 이고 오는 것으로써 화면은 상하의 연결이 이루어져서 태연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달 아래의 연인'이란 뜻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은 눈썹달이 침침하게 내리비치고 있는 야밤중에 등불을 비춰 든 선비 차림의 젊은이가 쓰개치마를 둘러 쓴 여인과 담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그림이다.
이들이 어떤 사이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호젓한 곳에서 남의 눈을 피하여 은밀히 만나야 하는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 없는 듯하다.
예법을 생명으로 알던 왕조 귀족들로서 비록 그 상대가 노는 여자라 할 지라도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이가 내놓고 여자와 만나 노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층층시하에 있는 젊은 선비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집을 빠져 나오느라 이렇게 밤 깊어서야 만난 모양이다.
여인은 밤이 늦어서야 나타난 사나이가 야속하다는 듯 여간 새침을 떨고 있으니 답답한 남자는 무엇으로나 달래보려는 듯 품속을 더듬어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야 두 사람이 어찌 모를 리 있으리.
만난 일이 반가워서 벌이는 실랑이일 뿐이다.
그래서 혜원은 다음 화제를 써 넣었다.
"달빛이 침침한 한밤중에 (월침침야삼경 月沈沈夜三更)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양인심사양인지 兩人心事兩人知)"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이런 애틋한 사랑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1350000,11&pageNo=1_1_1_0)
3. 위키백과,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9C%A4%EB%B3%B5%ED%95%84_%ED%92%8D%EC%86%8D%EB%8F%84_%ED%99%94%EC%B2%A9)
4. 간송미술문화재단, 쌍검대무(https://kansong.org/collection/ssangkumdaemu/)
5. 간송미술문화재단, 주유청강(https://kansong.org/collection/juyuchungkang/)
6. 간송미술문화재단, 단오풍정(https://kansong.org/collection/danopungjeong/)
7. 간송미술문화재단, 월하정인(https://kansong.org/collection/wolhajeongin/)
2022. 7. 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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