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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6: 덕수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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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6: 덕수궁

새샘 2022. 7. 1. 12:57

사진 출처-출처자료1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 - 덕수궁>

 

덕수궁德壽宮에 대한 발굴조사는 다른 궁궐들에 비해 늦어졌다.

2006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된 것이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덕수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져서 복원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덕수궁도 일제강점기에 많은 훼손과 파괴, 변형이 있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덕수궁에 대한 복원·정비 계획을 세웠는데, 복원의 기준 시기를 고종의 덕수궁 중창 반포 시점인 1907년으로 하였다.

덕수궁에 대한 발굴은 함녕전의 행각 터와 만희당 터에 대한 발굴부터 시작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인 침전이고, 만희당晩喜堂은 중명전重明殿[접견실 또는 연회장이었던 서양식 건물] 영역에 속하는 건물로 1901~191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가 창덕궁 낙선재의 건축부재로 사용하기 위해 1910~1920년대에 해체되었다.

 

덕수궁 함녕전(위)과 덕홍전(아래)의 현재 모습

발굴 결과 함녕전 행각 터는 일제강점기 때 훼손으로 그 원형을 추정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고, 기존 행각과 직교直交[직각으로 교차]하여 놓여있는 사괴석四塊石[벽이나 돌담 또는 화방火防을 쌓는 데 쓰는 육면체의 돌] 3매와 벽돌이 발견되어 북쪽 행각의 존재를 부족하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만희당 터에서는 외국인구락부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수영장과 부대시설이 노출되어, 만희당 터는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발굴단은 추측했다.

그러나 수영장 남쪽과 서쪽에서 만희당 터로 추정되는 동서 6칸, 남북 4칸의 규모가 확인되어 만희당의 일면이나마 살필 수는 있었다.

 

2010년에는 덕홍전 행각 터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덕홍전德弘殿은 중화전 오른쪽에 위치하며, 고종이 정무를 보던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이었다.

이전에는 명성황후의 빈전殯殿[국상國喪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으로 사용하던 경효전이었는데 화재로 없어진 후 그 자리에 덕홍전이 들어선 것이다.

조사지역은 덕홍전 주변으로 함녕전과 연결되는 마당에 해당한다.

발굴 결과 동쪽 행각 터인 이안청移安廳[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인 혼전魂殿] 터 지역에서는 담장 2개소와 석렬石列[길게 줄지어 늘어선 돌의 무리]이 확인됐고, 서쪽 행각 터인 중배설청中排設廳[궁중잔치인 연향宴饗 때 참석자들의 공간 준비와 음식 배치를 담당하던 관청]  터 지역에서는 장대석렬長臺石[길게 다듬어 만든 돌의 무리] 1개소와 석렬 및 석군石群[돌의 무리]가 조사되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7.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