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5: 고전기 그리스의 황금시대 본문
살라미스 해전 Battle of Salamis를 치른 지 반세기 만에 아테네의 국력과 위신은 눈부시게 상승했다.
동부 지중해 최강의 해군국이 되었고 스파르타와 맞먹은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떠올랐다.
델로스 동맹 Delian League은 페르시아 Persia와의 지속적인 전쟁을 서약한 폴리스 polis 집단이었다.
동맹의 리더로서 아테네는 기금과 재원을 관리했다.
그 덕분에 아테네인은 델로스 동맹의 폴리스들을 '그리스의 학교'로 만들 수 있었다.
서기전 5세기에는 그리스 문화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이 나타났고 아테네 민주정치가 활짝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성과는 아테네와 동맹국 사이의 불편한 관계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었다.
서기전 430년대에 이르면 동맹국들은 자유 폴리스라기보다는 아테네의 속국처럼 비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클레이스테네스 Cleisthenes의 개혁은 추첨에 의한 주요 관직의 선출 등 그리스 민주정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오직 하나의 핵심 직책인 장군 스트라테고스(장군將軍) strategos만 전통적 투표방식으로 선임되었다.
한 사람이 여러 해 반복해서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가장 유능하고 야심찬 인물들은 이 직책을 노렸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 Themistocles가 스트라테고스였고, 서기전 470년대와 460년대에 델로스 동맹을 이끌어 페르시아를 상대로 멋진 승리를 거둔 키몬 Kimon(Cimon)도 스트라테고스였다.
그러나 키몬은 델로스 동맹 탈퇴를 기도한 폴리스를 동맹의 적으로 규정짓고 해당 폴리스의 반란을 무력으로 탄압해 동맹을 아테네 정책의 수단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키몬은 군사적 성공을 통해 아테네의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서기전 460년대에 들어 아테네의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서기전 6세기 초 아르콘(집정관) archon이었던 솔론 Solon이 만든 네 계급 신분(제1계급, 기사계급, 농민계급, 노동계급) 중 가장 낮은 계급인 노동계급 테테스 thetes가 정부 안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배의 노를 젓는 직분을 맡은 그들은 아테네 함대의 척추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시민으로서는 폴리스 정부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테테스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아테네의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 페리클레스 Pericles였다.
키몬의 정치적 경쟁자인 페리클레스는 키몬을 물리치기 위해 테테스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하는 정책과 반스파르타적 외교정책을 들고 나왔다.
페리클레스는 서기전 462~461년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고, 키몬은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陶片追放) ostrakismos 제도에 따라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페리클레스는 개혁을 밀어붙여 아테네를 좀 더 완전한 형태의 민주정 체제로 만들었다.
그는 모든 아테네 시민에게 민회에서 찬반 투표만이 아니라 법률의 발의 및 수정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출석자에게 일당을 지급함으로써 가난한 시민이 민회 및 아테네 법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 테테스는 정치적 지배세력이 되었고, 그런 권력을 안겨준 지도자에게 충성했다.
페리클레스는 야심찬 공공건축 계획과 신들—특히 아테나 여신 Goddess Athena(Athene)—을 위한 화려한 축제로 아테네 민주정을 찬양했다.
그는 또한 예술·과학·문학의 넉넉한 후원자로서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을 아테네로 끌어들였다.
그의 대중주의적 정치활동은 아테네인의 우월감을 고무시키는 그의 능력과 결합해, 앞으로 30년 동안 스트라테고스로 재선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아테네의 문화는 전에 없는 번영을 누렸다.
궁극적으로 페리클레스는 재앙을 불러온 지도자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서양문명의 역사에서 대단히 극적이고 찬란한 순간을 연출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문학과 연극
페리클레스 시대 Age of Pericles(서기전 461~429년)의 아테네가 그리스 황금시대 Golden Age of Greece(서기전 500경~ 300경의 약 200년간)에 위대한 문학을 산출한 유일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전기 그리스 Classical Age of Greece(서기전 500-336) 문학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시와 연극(비극과 희극)에 관한 것이다.
서사시와 서정시는 서기전 5세기 초 이미 그리스 문학의 형식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극은 디오니소스 Dionysos(영어 Dionysus) 신에게 바쳐진 아테네 봄 축제에서 합창단이 신을 위해 불렀던 송시頌詩에서 발전된 혁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제를 처음 조직화한 것은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Peisistratos였고, 그것을 비극을 상연하는 축제로 전환시킨 것은 클레이스테네스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테네의 연극은 처음부터 후원자인 아테네 국가의 정치·종교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송시를 등장인물과 합창단을 갖춘 진정한 연극으로 변환시킨 것은 위대한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Aeschylos(영어 Aeschylus)(서기전 525~456)의 업적이었다.
그는 연극에 두 번째(나중에는 세 번째) 인물을 등장시켜 인물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면서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인간 갈등을 표현했다.
연출은 여전히 매우 단순했지만 비극이 주는 정서적 효과는 압도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Aristotle)(서기전 384~322)는 비극의 목적이 관객의 동정심과 두려움을 유발하면서 그런 감정을 카타르시스(정화淨化) catharsis를 통해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단히 유력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것으로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비극의 근본 주제—정의와 법, 영웅을 파멸로 몰아넣는 충성과 의무의 상반된 요구—는 호메로스 Homeros(영어 Homer)에게서 나온 것이다.
대부분의 비극은 전설을 통해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 Agamemnon,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리템네스트라 Clytemnestra,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 Orestes의 복수,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 Oedipus the King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동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 사람들 The Persians≫에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Xerxes의 눈을 통해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아이스킬로스도 이 전투에 참전했을 것이다]에서 거둔 승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작품에서 크세르크세스는 비극적 영웅이 되었다.
소포클레스 Sophocles(서기전 496~406)의 걸작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Oedipus at Colonus≫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비참한 전쟁을 치르던 중 상연되었다.
에우리피데스 Euripides(서기전 485~406)의 ≪트로이의 여인들 The Trojan women≫은 서기전 415년에 상연되었는데, 그해는 시칠리아 원정 Sicilian Expedition으로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분수령이 된 시점이었다.
정의와 법의 충돌, 가족에 대한 효도와 시민의 책임 사이의 대립적 의무에 관한 이야기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Antigone≫는 비극을 가장 잘 다룬 작품으로서, 가장 위대한 성취와 실패를 겪었던 아테네의 역사 맥락에서 소재를 택했다.
희극은 한층 더 직접적인 정치적 의미를 지닌 장르였다.
희극은 투박하고 풍자적이고 거침없었으며, 익살·부조리·비속함 등이 넘쳐났다.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피너 레비 Peter Levi에 따르면 그리스 희극의 주제는 섹스, 농촌 생활, 좋았던 옛날, 악몽 같은 정치, 종교의 기묘함, 도시의 기이한 풍습 등이었다.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서기전 448경~382)는 자신을 불쾌하게 또는 재미나게 하는 모든 것을 조롱했다.
그 조롱 대상은 소크라테스 Socrates의 철학, 에우리피데스의 희극, 그리고 큭히 클레온 Kleon 같은 동시대의 제국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정치인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그 자신이 믿었던 유력한 정치인들을 일상적으로 거칠게 공격한 사회비평가였다.
그는 자신의 희극을 통해 공격한 정치인들 때문에 스스로를 변론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법정에 끌려갔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그의 희극에 분노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극장을 폐쇄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극장 또한 민주정 아테네의 중요한 정신적 일부였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그리스 산문 발달의 비옥한 토양이기도 했다.
서기전 6세기의 그리스인은 시를 통해 사상을 표현했다.
밀레토스 Miletus의 사상가들과 크세노파네스 Xenophanes는 그들의 사상을 시로써 기술했고 솔론 역시 시를 이용해 정치 개혁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서기전 5세기에는 산문이 독특한 문학 양식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아테네인의 문자 해독률이 높아진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 Herodotus(서기전 484?~425?)는 아테네에서 그의 저서 ≪역사 Historiae≫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시장을 발견했다.
그보다 나이 어린 동시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 Thucydides(서기전 460?~400?)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의 역사를 썼다.
이들 두 역사가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키면서 자신들이 사용한 사료의 신뢰성을 강조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간적 설명을 추구했다.
산문의 발전으로 서기전 4세기에는 한층 풍부한 문학 업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플라톤 Platon(영어 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철학 논고들, 위대한 아테네 웅변가들의 감동적인 정치·입법 연설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것들은 4장에서 다룰 것이다.
○예술과 건축
황금시대의 그리스인은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들의 희극적 재능—활기, 유쾌한 관능, 음탕한 기지—은 특히 흑회식도기黑繪式陶器 Black figure pottery[서기전 7세기경 코린토스 Korinthos(영어 Corinth)에서 시작되어 서기전 530년경까지 유행했던 그리스 도기]에서 잘 볼 수 있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못된 성적 장난을 즐기는 개구쟁이처럼 보인다.
좀 더 엄숙한 작품으로는 신전과 공공장소에 세운 대리성 조각상과 부조가 있었다.
아테네의 조각가들은 인간의 위대성을 주제로 삼았고 인체의 아름다움을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이상화된 형상으로 묘사했다.
서기전 5세기 그리스 조각의 가장 놀라운 발전은 균형이 잘 잡힌 자연주의적 누드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이런 발전은 서기전 490~480년경 아테네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그리스적 이상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모든 페르시아인이 노예처럼 지배자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과는 달리 그리스인 자신들은 정치적·사회적 평등을 향유하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아테네인은 꾸밈없는 인체의 고귀함을 돌에 새겨 찬미하는 것으로써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이념을 표출했다.
아테네인은 건축에서도 탁월했다.
모든 그리스 신전은 조화와 안정의 느낌을 자아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지만, 서기전 447~438년에 건축된 아테네의 파르테논 Parthenon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이 멋지고 사치스럽고 복잡한 건축물은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인을 부추겨서 만들었다.
아테네인은 파르테논 신전을 그들의 수호여신인 아테나에 대한 헌신의 상징이자 아테네인의 힘과 용기에 대한 자신만만한 찬양으로 여겼다.
○아테네 남녀의 일상생활
페리클레스는 유명한 장례 연설 끝부분에서 아테네의 기혼여성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아테네를 위해 더 많은 자녀을 낳아 기를 것, '여성 고유의 본성' 이상의 약점을 보이지 말 것, 수다쟁이가 되지 말 것 등이었다.
그의 언급은 고전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민주정치의 성장은 양성 사이 평등을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암흑시대에 귀족 여성은 때로 비범한 아름다움·지혜·용기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정치·군사 문제에 예리한 분별력으로 조언했고, 주변 세계에 대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귀족적 이상이 민주적 이상으로 대치되면서 여성의 운명은 그늘 속의 삶이 되고 말았다.
중장비보병과 그 평등정신에 대한 강조는 남성의 집단 훈련을 장려했고 남성 간의 긴밀한 관계—때로 동성애적 관계—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런 평등정신은 부의 과시—특히 여성에 의한—를 억제했다.
대신 보병에 전사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자녀 양육이 여성의 의무가 되었다.
공공장소는 운동경기나 정치집회 같은 남성의 독점적 활동영역이 되었고, 사적 공간은 자녀 양육, 옷감 짜기 등 여성의 활동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서기전 5세기에 이르면 지체 높은 여성은 격리되어 살았고 여간해서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테네의 소녀들은 14세—생물학적 가임기가 되자마자—가 되면 자기보다 두 배 이상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젊은 남성은 아마도 전쟁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딸의 취향에 상관없이 결혼을 주선했고, 남편이 그녀를 부양할 수 있도록 지참금을 딸려 보냈다.
그러나 법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었다.
아내가 새 가정으로 들어간 뒤에는 대개 자녀 출산이라고 하는 공식 일상이 시작된다.
자녀의 터울을 보통 2~4년이었는데, 이는 통상 젊은 아내가 사망 전(통상 35세 무렵 사망했다)까지 4~6명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이 문 밖에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른 남성의 눈에 띄는 것은 상스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장보기 등의 일은 노예가 맡아 했다.
집 안에서도 여성은 손님이라도 오게 되면 안채로 물러나야만 했다.
지나친 부와 여유의 과시에 거부감을 보인 민주정 아테네의 이데올로기(관념형태) ideologie 때문에 여성은 한가하게 앉아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주로 한 일은 아마 옷감 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비천한 것이었으므로 남성은 그 일에 종사하는 여성을 낮추어 봤다.
현존하는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남편은 아내에게 정서적 애착을 거의 갖지 않았고 자연적 열등자로 간주했다.
의미심장한 한 구절에서 헤로도토스는 리디아 Lydia의 어느 왕에 대해 말했다.
"이 칸다울레스 Candaules는 자신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환상은 기이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내와 사랑에 빠진 것을 '환상'이라고 표현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테네의 한 웅변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쾌락을 위해 매춘부를 얻고, 매일매일의 육체적 시중을 위해 첩을 거느리며, 적법한 자녀를 낳아줄 충실한 주부를 얻기 위해 아내를 갖는다."
스파르타 Sparta가 3계급 노예들인 헤일로타이 Helots에게 의존했듯이 아테네 사회 역시 노예에 의존했다.
노예제가 없었더라면 아테네인이 정치·사상·예술 등에서 이룩한 비범한 성취는 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 공직을 모든 자유민이 서로 나누어 교대로 맡는다고 하는 아테네의 이상은, 자유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동안 농사와 실엄과 가사를 도맡아 돌봐줄 노예가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테네 민주정치의 각종 제도는 서기전 500년경 아테네의 광업과 상업이 확대되면서부터 비로소 온전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인은 그 덕분에 북부와 동부에서 노예를 대대적으로 사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와 노예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아테네 노예제는 광범하게 시행되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작았다.
노예는 통상 많은 인원이 한 팀을 이루지도 않았고 공장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국가 소유의 은광이었는데, 여기서는 많은 수의 노예가 비참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일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예들은 아테네인 가정에서—비교적 가난한 가정에서도—널리 소규모로 유지되었다.
(가정의) 하인과 (농장의) 노동자로 일한 노예가 철저히 야만적인 취급을 당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물론 주인은 마음대로 매를 때리거나 성적인 착취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노예는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 받지도 못했다.
이렇게 된 데는 어떤 사람은 노예 노동을 위해 선택했고, 어떤 사람은 자신들처럼 정치활동을 위해 선택했다고 간주한 아테네 자유인의 관념이 큰 역할을 했다.
자유민 입장에서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의 일상생활은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성 시민은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누렸다.
소규모 농업과 상업이 일반적이었고, 제품 생산을 담당하는 직공 개개인이 소유한 가게에서 소규모의 산업 활동—대부분 도자기 및 무기 제조—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은 드물었지만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서기전 5세기 아테네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했던 한 방패 공장에서는 120명의 노동자가 일했고, 공장 소유권은 거류 외국인이 갖고 있었다.
일부 시민은 다른 시민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했다.
하지만 최고 부유층은 재산 일부를 공공 축제나 해군 장비를 위해 기부해야만 했다.
서기전 5세기의 아테네는 자극적이고 화려한 세계주의적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테네인은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 터무니없을 정도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6. 28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모방기술과 생체모방기술 (0) | 2022.07.01 |
---|---|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6: 덕수궁 (0) | 2022.07.01 |
혜원 신윤복 "미인도"와 작가 미상 "미인도" (0) | 2022.06.24 |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5: 경복궁 (0) | 2022.06.22 |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4: 페르시아 전쟁 (0) | 2022.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