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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5: 경복궁

새샘 2022. 6. 22. 15:53

사진 출처-출처자료1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 - 경복궁>

 

 

1990년부터 시작한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발굴은 1990년대에 이어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2015년까지 계속되었다.

경복궁의 범위가 넓다보니 권역별로 나누어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태원전, 건천궁, 녹산, 소주방, 흥복전, 함화당과 집경당, 광화문, 영훈당 지역이 발굴조사되었다.

 

태원전泰元殿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건립했는데, 주로 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고종은 이 태원전 재실齋室[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인 공묵재恭默齋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태원전 권역은 이미 1997년부터 1998년, 그리고 2000년에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번 2001년 조사는 기존에 발굴된 조사지역을 확장하여 태원전 권역의 전체 규모와 배치상태를 파악하고, 정비·복원하기 위한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태원전 권역의 원형 우물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 결과 태원전 터와 공묵재 터, 서쪽 세답방洗踏房[궁중의 빨래 담당 부서] 터 등의 건물지와 담장 터, 속도랑(암거暗渠: 땅속에 묻은 도랑] 모양의 배수로, 그리고 원형 우물(위 사진) 등이 새로이 확인되었다.

 

 

복원된 건청궁(사진 출처-출처자료1)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천궁乾淸宮은 1873년(고종 10)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었지만,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때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이용되거나 외교관 접대 장소로 사용된 궁 안의 궁이었다.

건천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가 설치된 곳이자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건청궁 터에는 1998년까지도 옛 조선총독부 미술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2002년 이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정비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결과 명성황후가 머물된 처소로 안채 역할을 하던 곤녕합坤寧閤 터를 비롯하여,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인 장안당長安堂 터, 행각行閣(줄행랑, 월랑月廊) 터, 등의 건물지와 외곽 담장 터, 문터 등을 확인하였다.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건천궁은 2007년 복원되었다.

 

 

녹산鹿山 지역은 경복궁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 있는 구릉지 숲을 부르는 이름이며, 녹산 서쪽에는 건천궁이, 남쪽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2003년 발굴 결과 조사지역의 동서 방향 중앙 부분에서 어구御溝[대궐 안 개천]를, 어구를 중심으로 동서쪽에서 각각 담장 터를, 조사지역 남서쪽에서는 녹직처소鹿直處所[녹산 관리인 근무처 및 거처] 건물의 유구를 각각 찾았다.

그러나 어구와 담장 터 등은 전체적으로 노출시키지는 못했다.

출토유물은 기와와 도자기류 등 총 66점이며 이 가운데 고려시대 청자 파편도 있어 흥미롭다.

 

 

복원된 경복궁 소주방(사진 출처-출처자료1)

 

2004년과 2005년에는 소주방燒廚房에 발굴조사가 있었다.

소주방은 궁궐 내 음식을 만들던 주방 즉 부엌이다.

위치는 침전(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 동쪽이며, 북쪽에는 자경전, 남쪽에는 동궁東宮[황태자나 왕세자 거처]인 자선당과 비현각이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었다.

 

조사 결과 내소주방[임금의 수라를 만드는 주방]과 외소주방[차례나 잔치 음식을 만드는 주방으로 대전 밖에 위치], 복회당福會堂[음료와 다과 만드는 주방]의 건물 터 및 그 부속 행각 터들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확인되었으며, 그밖에 우물, 배수시설, 담장 터 등의 부속시설도 확인되었다.

소주방은 2015년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 흥복전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흥복전興福殿은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은 대비전 침전 건물이었지만. 주로 외국공사나 영사, 대신들의 접견 등 왕의 공식 업무 및 행사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1917년 화재가 일어난 창덕궁을 중건하기 위한 자재로 사용하려고 철거되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3차에 걸쳐 흥복전 터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흥복전은 남쪽의 아미산峨嵋山[경회루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인공 동산]·교태전交泰殿[왕비 침전]과 북쪽의 함화당咸和堂[고종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했던 곳]·집경당緝敬堂[왕실 장서와 서화 수장고] 사이에 위치한다.

 

발굴 결과 흥복전 터와 부속 행각 터 등 건물 터 9동의 위치와 규모가 확인되었다.

특히 흥복전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동·서·북쪽 행각 터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일본식 계곡정원인 곡수지曲水池로 인해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한 도상복원을 통해 그 위치와 규모 파악이 가능했다.

 

흥복전 북서쪽에서 고려시대 도랑(구溝) 유구 1기가 확인되었으며, 도랑 안에서 많은 양의 고려시대 기와 파편과 벽돌 파편이 출토되어 이채롭다.

이는 경복궁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 유구가 확인된 것으로, 발굴단은 고려 남경南京의 위치가 경복궁 터였을 가능능성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하였다.

 

 

흥복전 주변지역 발굴조사 지역(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2년과 2013년에는 흥복전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일본식 정원인 곡수지 때문에 일부가 훼손되긴 했지만, 흥복전 권역의 행각 터 13동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밖에 담장 11기, 협문夾門[삼문三門 중 좌우에 달린 작은 문 2개] 터 5기, 벽체시설 13기, 구들시설 6기, 부속시설 2기, 계단시설 3기, 배수시설 7기 등의 부속시설물들이 확인되었다.

2017년 현재 흥복전 주변지역에 대한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건청궁 안에 설치된 전등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흥복전 주변지역 발굴로 흥복전의 부속 전각으로서 내각회의와 경연, 외국 공사 접견 등 왕의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으로 사용되던 영훈당永薰堂에 대한 조사도 2014년과 2015년에 실시되었다.

영훈당은 흥복전과 향원정香遠亭[후원 연못인 향원지香遠池 섬에 있는 2층 누각] 사이에 위치하며, 흥복전 북쪽의 함화당과 집경당과 나란히 서 있다.

이번 발굴 결과 영훈당 본체와 주변 행각 터 등 6동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그밖에 담장 2기, 문터 1기, 배수시설 4기, 우물 터 1기 등 다양한 부속시설들도 확인되었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는 영훈당과 북쪽의 향원지 사이 공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발전소인 전기등소電氣燈所 자리가 석탄 창고와 함께 확인되는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전기등소는 경복궁 건천궁의 점등을 위해 1887년 완공되어 가동되고 있었다. 

 

 

복원된 함화당과 집경당(사진 출처-출처자료1)

 

1890년(고종 27)에 처음 지은 함화당咸和堂집경당緝敬堂흥복전의 부속건물로 향원정 앞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3칸 복도로 이어져 얼핏 보면 두 건물이 한 동인 것처럼 보인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주로 건천궁에서 지낼 때 함화당이 완공되자 건천궁과 이곳을 번갈아 거처로 사용했으며, 1892년부터는 고종이 신하와 정무를 논하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했었다.

집경당은 주로 진강進講[왕이나 동궁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던 일] 장소였고, 왕실의 장서와 서화를 수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흥복전 일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타 버린 창덕궁 복원을 위한 자재 사용을 위해 철거되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만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무실로 사용됨으로써 철거를 면할 수 있었다.

이 두 건물의 행각 터에 대한 조사가 2005년과 2006년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함화당과 집경당의 행각 터 7동이 확인되었고, 그 외에 고종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선대先代 건물 터 5동과 고종 이후 건물 터로 추정되는 후대後代 건물 터 1동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지금의 광화문 일대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광화문 터에서 출토된 궁전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을 새겨 얹는 장식 기와인 잡상(사진 출처-출처자료1)

 

노란선 안에 광화문 월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2006년 문화재청은 '광화문 제모습 찾기' 계획에 따라 1969년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을 철거하였고, 이후 광화문 일대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에 걸쳐 실시하였다.

2006년에는 경복궁 동쪽 담장 북쪽 지역, 2007년에는 봉의문奉宜門[광화문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문이자 중문中門인 흥례문興禮門과 세 번째 문인 근정문勤政門 사이 동쪽 내부 담장 문] 터 및 담장 터, 옛 광화문 동쪽 궁장宮牆[궁궐 담장] 터 북쪽 지역, 궁장 터 및 어구御溝(대궐 안 도랑)와 홍예수문虹霓水門[무지개 모양의 수문] 지역, 광화문 터 및 월대月臺[궁궐의 정전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 지역, 계조당繼照堂[황태자나 왕세자 거처인 동궁의 주된 건물인 정당正堂] 터, 2008년에는 용성문用成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서쪽 내부 담장 문] 및 담장 터, 협생문協生門[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동쪽 내부 담장 문으로서 용성문과 마주본다] 및 담장 터, 동쪽 궁장 터, 2009년에는 광화문 서쪽 궁장 터, 영군직소營軍直所[궁궐 수비병들의 당직 장소] 터 및 초관처소哨官處所[한 초哨를 거느리던 종구품 무관 벼슬의 거처] 터, 2010년에는 서수문장청西守門將廳[도성의 서쪽과 서쪽 궁궐 문을 지키는 무관 벼슬인 수문장들이 소속된 관청],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는 길] 지역, 광화문 동·서쪽 궁장 남쪽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광화문 일대 모습은 이때의 발굴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고종 때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광화문은 경복궁의 중심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됐으며, 특히 고종 때의 광화문은 태조 때의 광화문 기초 위에 세웠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또한 광화문 일대의 궁궐 담장(궁장), 용성문과 협생문 등의 건물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고, 임진왜란(조일전쟁)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조선 전기 건물 터의 존재도 밝혔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6.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