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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4: 페르시아 전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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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4: 페르시아 전쟁

새샘 2022. 6. 19. 19:43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그리스의 상고기上古期 Archaic Greece(서기전 800년~480년)는 페르시아 Persia와의 극적인 투쟁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그리스인의 적개심이 솟구치기 시작할 무렵 페르시아는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100만 명이 넘는 무장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반면 그리스는 폴리스들의 집합체로서 서로를 지독하게 의심했으며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례적인 거대 폴리스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기 1만 명의 중장비보병을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각기 수백 명의 병사밖에는 제공할 수 없었다.

20년 동안 페르시아의 정복 위협이 그리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침내 그리스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전쟁의 경험은 그리스 세계를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이오니아의 반란(서기전 499~494)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은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Herodotus(서기전 484?~425?)가 남겼다.

그의 역사 서술은 그가 살았던 서기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지적 풍토를 여러모로 반영해주고 있다.

그는 지리적·문화적 결정론을 드러내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전쟁의 원인을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해묵은 증오심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직접 원인이 밀레토스 Miletus에서의 정치 투쟁에 있다고 설명했다.

 

서기전 501년 페르시아가 임명한 밀레토스의 꼭두각시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 Aristagoras는 다리우스 대왕 Darius the Great(다리우스 1세, 재위 서기전 521~486)의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으로서 누렸던 자신의 전성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꼭두각시에서 애국자로 돌변한 그는 밀레토스인 Miletus과 다른 이오니아인 Ionian에게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 본토에 군사 지원을 요구했다.

스파르타인은 외국으로의 군대 파견을 거부했지만, 아테네 및 에레트리아 Eretria[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에우보이아섬 Euboea(Evia) Island의 도시국가]는 동족인 이오니아인에게 25척의 선박과 선원을 파병하는 데 동의했다.

이 소규모 병력은 아나톨리아 Anatolia 반도에 있던 리디아 왕국 Kingdom of Lydia의 옛 수도 사르디스 Sardis(당시 페르시아의 행정 중심지)를 함락하고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러고 나서 아테네인과 에레트리아인은 이오니아인을 내버려둔 채 배편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남은 이오니아 반란군은 5년 동안 용감한 투쟁을 벌였지만 서기전 494년 페르시아의 우월한 군사력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리우스 대왕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그리스 신민들이 에게해 건너편의 동족에게 기대를 품을 수 있는 한 또 다시 자유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징벌 원정에 착수했다.

왕은 에게해를 가로지르는 원정에 휘하 장군 중 가장 뛰어난 장군 두 명과 2만 명의 병력을 보냈다.

서기전 490년 여름 에우보이아섬에 상륙한 페르시아 군대는 에레트리아를 약탈·방화하고 주민을 포로로 잡아  페르시아로 끌고 갔다.

그런 다음 좁은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 아티카 Attica의 마라톤 평야 Marathon plain에 상륙했다.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서기전 490)와 그 이후

 

위협이 임박했음을 알아챈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종교행사 때문에 도울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인근의 작은 폴리스인 플라타이아 Plataea만이 아테네에 지원군을 파견했을 뿐이다.

아테네의 팔랑크스 phalanx(8열 종대로 어깨를 서로 맞댄 중장비 보병의 밀집대형 전술)는 단독으로 막강한 페르시아에 맞서야만 했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페르시아군을 상대할 기병을 갖지 못한 채, 아테테의 팔랑크스는 페르시아군 진영을 마주한 두 언덕 사이에 자리 잡았다.

여러 날 교착 상태가 이어진 뒤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 Miltiades는 페르시아군이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중이며 페르시아 보병(1만 명의 아테네 중장비보병보다 수적으로는 우월했지만 장비는 빈약했다)이 취약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는 공격을 지휘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페르시아에 괴멸적 손상을 입혔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 전사자가 6,400명에 달했고 아테네군 전사자는 192명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쫓기듯 철수했다.

 

아테네는 세계 최강의 제국을 패배시켰고, 그 위업을 스파르타의 도움 없이 달성했다.

아테네인의 자부심은 하능를 찌를 듯 치솟았고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승리를 뽐냈다.

그러나 아테네 정치인 테미스토클레스 Themistocles는 그리스가 아직 페르시아의 최후를 본 것은 아니며 페르시아군은 반드시 훨씬 더 큰 규모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서기전 483년 아테네인은 아티카 변방에서 매장량이 풍부한 은광을 발견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뜻밖의 횡재였던 은을 당시 관행처럼 나누어 가지는 대신 200척의 최신식 전함을 건조하는 데 쓰도록 아테네인을 설득했다.

그 결과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추가 위협이 임박했던 바로 그 시점에 그리스 세계 최강의 해군 국가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레르크세스의 침공(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서기전 480~479)

 

서기전 486년 다리우스 대왕이 사망하자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Xerxes(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 재위 서기전 486~465)가 뒤를 이었다.

크레스크세스는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육로 침공을 준비했다.

서기전 480년 600척 규모 선단의 지원을 받은 크레스크세스의 대군(헤로도토스는 병력을 170만 명이라고 기록했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최소 15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으로 추정)은 서기전 480년 사르디스를 출발해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좁은 해협에 배다리를 가설하고 그 위를 건넜다.

아테네를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들을 보낸 부왕과는 달리, 크세르크세스는 직접 원정군을 지휘했다.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즉시 항복했다.

그러나 아테네 Athenai·스파르타 Sparta·코린토스 Korinthos를 비롯한 30여 도시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페르시아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그리스 동맹을 결성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그리스 동맹군은 스파르타의 군사 지휘를 받으며 테르모필라이 고개 Thermopylae pass에서 크레스크세스를 맞아 테르모필라이 전투 Battle of Thermopylae를 벌였다.

3일 동안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대군을 막아냈고 그동안 그리스 함대는 에우보이아섬 북쪽 해협 아르테미시움 Artemisium 근방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교전했다(아르테미시움 전투 Battle of Artemisium).

스파르타가 주도한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그리스가 패했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히고 나서 안전하게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아테네를 더 이상 지킬 수 없음을 깨달은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인을 설득해, 아테네를 포기하고 아티카 해안 건너편의 살라미스섬 Salamis Island으로 피난하도록 했다.

9월 초 아테네인은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불태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편이었다.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은 보급을 함대에 의존하고 있었다.

가을에 에게해를 항해하는 것은 악천후 때문에 위험했으므로 페르시아군은 불리한 계절이 다가오기 전에 결전을 치러야 했다.

 

9월 말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인이 살라미스섬에서 도망치려 한다고 판단하고 엘레우시스만 Eleusis Bay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임전 태세를 갖춘 테미스토클레스의 그리스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군은 크레스크세스가 엘레우시스만 언덕의 왕좌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페르시아 함대를 괴멸시키면서 살라미스 해전 Battle of Salamis에서 승리했다.

 

이듬해인 서기전 479년 그리스 군대는 플라타이아 전투 Battle of Plataea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페르시아군을 그리스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내면서 페르시아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그리스 폴리스들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 최강 제국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 역사의 전환점으로서 고전기(또는 황금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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