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6: 펠로폰네소스 전쟁, 3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6: 펠로폰네소스 전쟁, 3장 결론
새샘 2022. 7. 12. 12:53
아테네인 Athenian은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아테네인의 자유는 노예 상태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 것이었다.
노예가 노동력의 대부분을 제공했다.
한편 아테네 Athenai의 뒤대한 성취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델로스 동맹 Delian League에 가입한 아테네 동맹국들이 제공한 재원이었다.
동맹국에서 흘러든 잉여 재원이 없었다면 페리클레스 Pericles가 수행한 사업—정치 참여자에 대한 일당 지급, 거대한 건축 사업(또한 가난한 시민에 대한 고용 사업), 아테네의 연국 후원—중 그 어느 하나도 실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정책의 시행은 아테네를 막강한 세력으로 만들었고 민주정을 활력 넘치게 했으며 페리클레스의 인기와 권력 유지에 기여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적 성취는 동맹—그것은 하나의 제국으로 변질되었다—에 대한 지배권에 기초한 것이었다.
서기전 470년대 이후 동맹국들이 이탈 움직임을 보이자 아테네는 그런 시도를 가차 없이 격파했다.
서기전 450년대를 거치면서 반란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서기전 440년대 초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세계의 유일한 경쟁 세력이었던 스파르타 Sparta를 상대로 좀 더 공격적인 정책을 밀어붙였다.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정식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페르시아와의 강화 조약 이후 델로스 동맹은 존재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아테네는 동맹국들을 강제로 묶어둘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상당수 도시들은 동맹에 대한 충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들은 공납을 바치고 아테네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다른 도시들은 더 이상 동맹에 남지 않으려 했다.
아테네는 동맹국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더 큰 강제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아테네 수비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아테네인 식민지 개척자들—그들은 아테네 시민권을 계속해서 유지했다—을 그곳에 이주시켰다.
그리스 문화의 맥락 속에서 그런 행동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에 맞서 그리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맺은 것이었다.
이제 많은 그리스인은 아테네가 전제적인 제국이 되고 말았다고 비난했다.
비난에 앞장 선 도시는 코린토스 Korinthos(영어 Corinth)였다.
코린토스의 경제적 입지가 아테네의 에게해 Aegean Sea 지배로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Peloponnesian League(그리스인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 Sparta and Her Allies'이라 불렀다)의 맹주 스파르타와는 친밀한 동맹국이었다.
마침내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 Thucydides는 아테네의 세력 증대 및 그것이 스파르타에 심어준 두려움과 시기심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근대의 어떤 역사가도 투키디데스보다 나은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아테네 민주정과 그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아테네의 문화적·정치적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토대인 제국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기전 430년대에 이르러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고서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의 발발
몇 차례의 충돌이 있은 후 서기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아테네는 육상에서는 스파르타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은 바다에서 아테네를 대적할 만한 함대를 보유하지 못했다.
이에 페리클레스는 대담한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아티카 Attica(아테네의 수도)의 전 인구를 아테네 성벽과 항구 안으로 밀어 넣고서 그 밖의 지역은 모두 스파르타에게 내주었다.
한편 우월한 아테네 함대는 아테네에 대한 해상 보급 임무를 수행하면서 스파르타 해안 지역을 습격했다.
역사상의 수많은 전쟁이 그러하듯 양쪽은 결말이 속히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전쟁은 27년이나 질질 끌었다.
스파르타는 아티카의 농경지와 목초지를 약탈했고 아테네가 주요 전투에 중장비보병을 내보내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아테네는 여러 차례 전격 기습을 단행해 헤일로타이 heilotai(스파르타가 정복하여 노예로 만든 메시니아인)의 반란을 조장하는 데 성공함으로서 스파르타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시간은 아테네의 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기전 429년 포위당한 도시의 과밀한 인구 집중으로 말미암아 발진티푸스가 발병했고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네 인구의 3분이 1이 사망했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그가 등장시켰던 아테네의 민주적 정치 세력을 통솔할 수 있는 인물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선동가·야심가로서 권력을 추구하는 민중의 본능에 영합했다.
그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인물은 클레온 Cleon이라는 전쟁광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의 독설의 대상이기도 했던 그는 서기전 425년 스파르타의 강화 제안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하다가 4년 뒤 전사했다.
아테네의 유능한 지도자 니키아스 Nicias의 주선으로 한동안 휴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테네 민중은 긴 평화를 원치 않았고, 이내 매력적이고 화려하지만 파렴치하기 그지없던 귀족 알키비아데스 Alcibiades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서기전 415년 아테네인을 설득해 적개심에 다시 불을 붙였고 머나먼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의 도시국가 시라쿠사 Syracusa(영어 Syracuse)에 대한 경솔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패했고 수천 명의 아테네인이 시칠리아에서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시라쿠사에서의 재앙 소식은 아테네 민중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즉각 욕설과 비난이 시작되었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폴리스에서 쫓겨났고, 서기전 411년에 이르러 민중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다.
함대의 노잡이들이 도시에서 떠나 있는 동안 아테네인은 사실상 민주정을 절멸시키는 투표를 했고, 400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과두정을 수립했다.
사모스 섬 Samos Island에 머물던 아테네 함대는 알키비아데스의 지휘 아래 민주적 망명정부를 선언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과두정은 단기간에 끝났고 서기전 409년 아테네의 민주정은 복원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그러한 좌절감과 자포자기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좋은 전조가 아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종식
스파르타도 전쟁을 끝낼 가망은 없었다.
아테네는 갖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함대는 여전히 무적이었다.
마침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 도움을 청했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 함대를 건조하는 데 필요한 황금과 해군 전문가를 제공했다.
서기전 407년에 이르러 유능하고 야심적인 스파르타 총사령관 리산드로스 Lysandros(영어 Lysander)는 에게해 전역에서 아테네 해군을 괴롭혔다.
전쟁 막바지에 가장 혼란스러웠던 상황은 아테네인이 걷잡을 수 없는 내분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기전 406년 아테네는 아르기누사이 해전 Battle of Arginusae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교전이 끝난 후 갑자기 밀어닥친 폭풍 때문에 아테네군 사령관들은 전투 중 좌초된 전함의 선원을 구출하는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많은 선원들은 익사했고 아테네에서는 엄청난 항의가 분출되었다.
항의를 부추긴 선동가들은 여론조작 재판을 벌여 장군들—그들은 어리석게도 아테네로 귀환했다—을 처형토록 했다.
처형된 사람 중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들도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아버지가 도입한 민주정의 희생자가 되었다.
아테네는 이런 식으로 경륜 많고 유능한 수많은 지휘관을 죽이거나 추방했다.
그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는 서기전 404년 지도부가 허약해진 아테네 함대를 격파했다.
아테네는 함대 없이는 식량 공급도 도시 방어도 불가능했다.
리산드로스는 무방비 상태의 에게해를 종횡무진 누볐고, 아테네 동맹국들에 친스파르타적인 과두정을 수립토록 했다.
마침내 리산드로스는 아테네를 포위했고 불가항력의 처지에 빠진 아테네는 항복했다.
코린토스와 테베 Thebai(영어 Thebes)는 아테네를 파괴할 것을 스파르타에 요구했다.
스파르타는 그 요구는 거부했지만 대신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아테네 성벽을 허물고 아테네 함대를 해체할 것이며, 30명의 아테네인으로 구성된 과두정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전쟁 이후의 상황은 암담했다.
아테네의 30명 참주는 18개월 동안 지배하면서 1,500명 이상의 정적을 살해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들의 과도한 조치는 민주파를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만들었다.
스파르타 왕 파우사나아스 Pausanias의 신중한 개입으로 간신히 참극만은 면할 수 있었다.
서기전 401년 말 아테네는 다시 한 번 민주정을 회복했고 전쟁 기간보다 온건한 형태를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 보게 되듯이, 아테네는 또 한 번 잔인하고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치달았다.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뒤를 이어 그리스 세계의 조정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전쟁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 아테네에 훨씬 못 미친 에게해 통치능력 등으로 인해 스파르타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 스파르타는 전 역사 시기를 통해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던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제국의 외연이 광범하게 확장된 결과 스파르타는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고, 헤일로타이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졌다.
또한 그들은 다시 세력을 회복한 페르시아 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페르시아는 에게해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리스의 내전 상황을 이용했다.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 되어 스파르타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에 달했던 네 개의 폴리스—아테네, 아르고스 Argos, 테베, 코린토스—를 한꺼번에 적으로 맞게 되었다.
서로 미워했던 네 폴리스가 협력했다는 것은 스파르타의 세력 우위에 대한 반감이 단기간에 얼마나 고조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리스인에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재앙이었다.
역사를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폴리스 체계의 한계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폴리스 특유의 경쟁 분위기는 파국적 결함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전쟁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전쟁은 도덕적 타락을 불러오고, 기존의 모든 확실성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다.
민주정은 붕괴되었고 제국은 비틀거렸으며 스파르타의 과두정은 새롭게 직면한 도전에 대응할 능력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신들마저도 혼란에 빠진 듯 보였다.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Socrates(서기전 469~399)가 도덕적·정치적 삶을 새롭고 확고한 원칙 위에 재확립하고 시도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이해하려면 그가 태어나기 전 반세기 동안 발전된 철학적 사고의 역사를 간략하게 추적해야 한다.
○피타고라스학파와 소피스트
그리스 철학의 발전 | |
밀레토스학파의 등장 | 서기전 600~500년 |
피타고라스학파가 남부 이탈리아에 등장 | 서기전 530년 |
소피스트의 등장 | 서기전 450년 |
소크라테스의 죽음 | 서기전 399년 |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정복 이후 수많은 밀레토스 철학자들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그 결과 철학적 사유는 그리스의 '서쪽 끝 지역'에서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그리스인의 고통을 반영해 비관주의와 종교적 색채로 물들었다.
그 대표적 사상가는 피타고라스 Pythagoras(서기전 570?~495?)였다.
피타고라스는 서기전 530년경 사모스섬 Samos Island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해 그곳 크로톤 Crotone 시에서 학파—절반은 철학적, 절반은 신비주의적—를 창설했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명상적 삶이야말로 최고의 선으로 간주했으며 그것의 추구는 육체적 욕망을 정화해야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은 물질이 아니라 수數라고 믿었다.
그들은 수학과 음악이론 연구에 전념했고 화성법和聲法(화음을 기초로 하여 선율을 조직하는 방법)을 발견했으며 수를 홀수와 짝수로 나누었다.
피타고라스학파 Pythagoreanism는 오늘날 피타고라스 정리 Pythagorean/Pythagoras' theorem—직각삼각형의 직각을 포함하는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빗변의 제곱과 같다(a제곱+b제곱=c제곱)—로 알려진 옛 바빌로니아의 가설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비록 피타고라스학파가 물질세계에서 등을 돌렸다고는 해도, 그들은 여전히 세계의 규칙성과 예측가능성을 추구하는 그리스 특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그리스인은 자신감 상실—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표출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선두는 아테네였다.
강화된 시민 개개인의 힘은,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개인이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고무시켰다.
그런 세속적 지혜 함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교사집단이 출현했다.
그들은 소피스트 sophist로 알려졌는데, 소피스트란 말은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다음가는 사람 즉 '현인賢人'이란 뜻이었다.
밀레토스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와는 달리 소피스트는 직업 교사들로, 지식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소피스트는 일관된 철학을 가진 학파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일정 정도 공통된 흐름을 보여주었다.
대표적 소피스트는 서기전 445~420년경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선·진리·정의 등이 인간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종교 문제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다.
그는 신이 존재하는지 또는 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런 지식을 얻는 데는 많은 장애물—주제가 모호한데다 인생은 짧으니까—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들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옳고 그름의 절대적 진리나 영원한 기준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만일 감각적 인식이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면 인식하는 개개인에게 타당한 개별적인 진리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가르침은 아테네인에게 위험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소피스트는 개별적인 새로운 상황을 그 상황의 견지에서 검증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김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일상적 삶을 철학적 토론의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 같은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는, 현명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욕망만 채우는 사람이라는 식의 가르침으로 타락하기 쉬웠고, 따라서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일부 비평가들에게 그와 같은 사상은 반민주적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무신론과 무정부상태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 진리가 없다면 그리고 선과 정의가 개인의 변덕에 따라 단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종교·도덕·국가·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었다.
이런 확신은 진리가 실재하며 절대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철학 운동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런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창시한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
소크라테스는 생계를 위해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 부유했다.
아테네 보병의 일원으로 두 차례 참전했던 그는, 아테네가 소피스트의 수치스러운 가르침으로 타락하고 있다고 믿은 열렬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슬로건이나 내세우기 좋아하는 지각없는 애국자는 아니었다.
그는 아테네인의 삶을 윤리적 확실성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재건하기 위해, 진리라고 추정되는 모든 것을 엄밀하게 검증하기를 원했다.
그런 헌신적 이상주의자가 동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통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직후인 서기전 399년, 아테네가 패전과 격심한 내전의 충격에서 막 빠져나오려 할 무렵 한 민주 정파는 소크라테스가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민주 법정은 이에 동의했고 불경건과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친구가 탈옥을 주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판단을 수용하고 폴리스의 법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용히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대의 기록—특히 그의 제자인 플라톤 Platon(영어 Plato: 서기전 429?~349)의 기록—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전해 내려오는 가설을 엄밀히 검증했다.
스스로를 '등에(쇠파리)'라 부른 그는 끊임없이 동시대인에게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릇된 전제에 기반을 둔 검증되지 않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인물이라는 신탁을 받았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동의했다.
즉, 모든 다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다.
둘째, 소크라테스는 낱말에 대한 확실한 정의의 토대 위에서 철학적 사고를 하려 했다.
셋째, 소크라테스는 물질세계에 대한 연구보다 윤리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사물은 왜 존재하며 왜 성장하는지 그리고 왜 소멸하는지 등에 대한 밀레토스 철학자들의 전통적인 논의에서 비켜났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사회를 위한 올바른 행동의 원리가 무엇인지 성찰하라고 촉구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삶과 행동의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소크라테스를 마치 소피스트의 일원인 것처럼 비쳐지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소피스트가 아님을 주장해야 했다.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시장의 철학자'였고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통과 인습을 의심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크라테스가 진리—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삶의 모든 국면에서 편의성 대신 절대적 선의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인해, 폴리스 재건을 위해서는 진리의 확실한 구조를 밝히는 체계를 구축하는 등 소크라테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참화 이후 떠맡게 된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작업을 통해 플라톤은 후대 모든 서양의 철학적 사고의 토대를 놓게 되었다.
3장 결론
르네상스 이래 유럽인은 스스로를 고전기 그리스인의 후예라고 생각했고, 그리스인을 자신과 닮은꼴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그런 무비판적 찬양은 그리스인과 서양인 모두를 오해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일부 지식인이 종교적 회의주의를 견지하긴 했지만, 그리스인은 세속주의자도 합리주의자도 아니었다.
민주정치의 개념을 고안하긴 했지만, 아테네 남성 인구의 일부만 정치 문제에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스파르타는 인구의 대부분을 농노 상태로 예속시켰고 아테네는 노예제를 당연시했다.
그리스 세계 전 지역에서 여성은 이른바 가부장제—아버지와 남편이 주도하는 억압적 체계—에 의해 착취당했다.
그리스의 정치는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리스인은 경제면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결코 거두지 못했고 상업을 경멸했다.
끝으로 아네테인마저도 온전한 관용을 누렸다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의견을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것은 소크라테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양문명의 역사에서 그리스인의 실험이 막중한 의의를 갖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 문화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을 메소포타미아 및 고대 이집트 문화와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전제와 초자연주의의 지배를 받았고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었다.
고대 근동 세계의 전형적인 정치체제는 강력한 사제집단의 지원을 받은 절대군주였다.
문화는 주로 지배자의 위신을 높여주는 도구였고 경제생활은 궁정과 사원에 의해 통제되었다.
반면 그리스 문명은—특히 아테네의 경우—자유, 경쟁, 개인의 성취, 인간적 명예 등의 이상 위에 건설되었다.
자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엘레우테리아 eleutheria—는 그 어떤 고대 근동 언어로도, 심지어 히브리어로도 번역이 불가능했다.
그리스 문화는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인간 지성의 수월성秀越性(다른 것에 비하여 빼어나고 우월한 성질)에 기초한 문화였다.
그리스인이 탐구를 두려워하는 주제는 없었다.
헤로도토스 Herodotus의 글에서 한 그리스인(이번에는 스파르타인)은 페르시아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노예 상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자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유의 맛을 보았다면 그대는 우리에게 창뿐만 아니라 도끼까지 들고서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서양 세계에 얼마나 지속적 영향력을 미쳤는지 판단하려면 그것이 남긴 몇몇 단어—정치, 민주정, 철학, 형이상학, 역사, 비극 등—를 떠올리면 된다.
이 모든 사상과 행동은 인간의 삶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리만큼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는데, 그것들은 그리스인이 고안하기 전까지는 인류에게 알려진 적이 없었다.
서양인이 갖고 있는 휴머니티(인간성人間性) humanity—인류 전체와 개개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고상한 임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스에서 온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존재의 목적은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그리스어로 파이데이아 paideia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모든 자유인은 자신의 조각상을 깎는 조각가라는 뜻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에게서 파이데이아의 이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후마니타스 humanitas라고 불렀는데, 영어 단어의 휴머니티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인은 '그리스는 휴머니티의 발상지'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인에게 신세졌음을 인정했다.
이 로마인들의 표현은 당연히 옳은 말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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