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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헌 임득명 "서행일천리" 본문

글과 그림

송월헌 임득명 "서행일천리"

새샘 2022. 7. 21. 10:30

조선시대 후기의 또 다른 독특한 화가로서 임득명林得明(1767~?)을 들 수 있다.

자가 자도子道이고, 호는 송월헌松月軒인 이 사람은 글씨 잘 쓰고, 시 잘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소위 삼절三絶이었다.

글씨는 특히 전서와 예서가 빼아났으며, 글씨와 그림보다는 시인으로서 더욱 유명했다.

천수경파千壽慶派[송석원시사에 들었던 사람들을 말하며, 이 시사를 결성한 사람이 천수경(1758∼1818, 호가 송석원)]들이 결성했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또는 옥계시사玉溪詩社)의 일원이었다.

 

임득명의 시는 그 아버지, 할아버지의 삼대의 시가 ≪풍요선風謠選≫이란 시집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임득명 자신의 시집도 따로 있다.

그리고 여항문학집[조선 후기 서울 지역의 중인 이하 계층을 일컫는 여항閭巷(또는 위항委巷)이 이끌어간 한문학 잡지]인 ≪송월만록松月漫錄≫이라는 시집에도 임득명이 그림 그리면서 붙였던 시들이 들어 있다.

임득명은 단순한 화가가 아니고 시인으로서 유명했기 때문에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도 나오고, 장지연의 ≪위암만록韋庵漫錄≫에도 나오는 그 당시 유명한 중인 신분의 문사였다.

 

오세창 선생에게 들은 바로는 임득명이 원래 서출庶出(첩이 낳은 자식)로서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었음에도 출세를 못했으며, 남의 대필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규장각 서리였기 때문에 글을 잘 했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임득명, 서행일천리 표제,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파주도중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화장추색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박연범사정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평양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예서와 전서,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순안도중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백상루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 서행일천리 용천도중도, 1813년, 종이에 담채, 28x61cm, 개인(사진 출처: 출처자료1)

 

임득명의 대표적인 그림은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온 <서행일천리西行一千里>란 제목의 긴 두루마리(장권長券) 그림이다.

이것은 1813년 나이 46세 때 그린 것으로 모두 일곱 장의 그림(파주도중도坡州途中圖, 화장추색도華藏秋色圖, 박연범사정도朴淵泛槎亭圖, 평양도平壤圖, 순안도중도順安途中圖, 백상루도百祥樓圖, 용천도중도龍川途中圖)이 들어 있다.

 

<서행일천리>는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관서關西 지방[마천령의 서쪽 지방을 말하며, 평안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으로서 파주, 개성(화장, 박연폭포), 평양, 순안, 안주(백상루), 용천(의주)]을 다녀오면서 그린 그림들로서, 연구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떤 이유로 이 지역을 다니면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끄트머리에 순조 때인 1812년 일어난 평안도 지방의 농민 반란인홍경래洪景來의 난에 관련된 기록이 죽 나온다.

그런데 그 난리판에 왜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용천 그러니까 의주 가까이까지 갔다 왔는지, 왜 홍경래의 난이 있었던 흔적을 보고 왔는지 알 수 없다.

무슨 특별한 임무를 띠고 홍경래의 난 후의 민심을 살피러간 것인지, 그 실상과 실제 피해를 보러 간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무슨 사연이 있었던 여행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서행일천리> 긴 두루마리 그림은 바로 그 여행길에 보았던 명적名蹟 즉 이름난 유적들을 일곱 장에 담은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화장추색도>, <박연범사정도>, <용천도중도> 이 세 장의 그림은 대단히 잘 그렸다.

사실 이 그림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임득명이 그림을 잘 그렸다고는 하지만 과연 대가의 풍모가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이 그림들이 나온 후부터는 임득명이 대동소이한 군소 작가가 아니고 제법 그리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박연범사정도>는 겸재 정선의 <박생연도朴生淵圖>에 비해 역동성은 덜하지만, 치밀한 묘사와 섬세한 필법으로 진경의 색다른 묘매를 맛보게 하는 그림으로 평가된다.

천마산天磨山 기슭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가 성거산聖居山을 앞에 두고 사정 없이 깎아지른 절벽을 만나 느닷없이 내리꽂쳐 깊은 못(소沼)을 이루니 이것이 바로 박연朴淵이다.

옛날 박진사라는 이가 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부니 용녀龍女가 감동하여 부군으로 삼았다 해서 박진사의 못을 뜻하는 박연이라 하기도 하고, 아들이 못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긴 박진사의 어머니가 스스로 이 못에 몸을 던졌다 하여 고모담姑母潭이라고도 한다.

폭포 물줄기 아래 오른쪽 옆 바위 사이에 있는 조그만 언덕 위에 들어선 아담한 연갈색 지붕 정자 범사정泛槎亭이 보인다.

 

그런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보면 임득명 그림이 겸재 정선을 따랐다고 했는데, 그림을 보면 겸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겸재풍이 아니다.

겸재풍을 따랐다는 오세창의 글이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서행일천리>를 그린 것은 46세 때이니까 장년의 한참 그림이 무르익을 때의 솜씨로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림뿐 아니라 그 옆에 쓰여있는 예서 글씨라든지 또 그 긴 두루마리에 붙어있는 시를 보면 보통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림에 있어서도 가을 그림에 채색 쓴 것의 농담이라든지 필선의 야무진 모습이 아주 격을 갖추고 있다.

 

결론적으로 <서행일천리> 그림을 통해 비교적 임득명이 좋은 화가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경기일보 http://www.kyeonggi.com/46813

3. https://gijuzzang.tistory.com/3784288

4. 구글 관련 자료

 

2022. 7. 2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