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1: 서론, 서기전 4세기 폴리스의 실패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1: 서론, 서기전 4세기 폴리스의 실패
새샘 2022. 7. 23. 20:22
4장 서론
그리스 최고의 비극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정치 투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기전 5세기의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Sparta 사이의 파멸적인 소모전이 치러지던 시기였다.
이 같은 양상은 서기전 4세기에도 비슷하게 이어졌다.
주요 폴리스 polis들—스파르타, 그다음에는 테베, 그리고 다시 아테네—은 그리스 세계의 지배권 장악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독립적 기질은 그런 지배권을 장기간 참아내지 못했다.
한 폴리스가 그 목적에 거의 도달한 것처럼 보이면 적대 폴리스들이 연합해 그것을 좌절시켰다.
지방 차이를 버리고 공동 대의를 위해 단결하라는 요청이 비등했지만 그리스인은 지방주의와 배타주의의 폐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사회적·경제적 어려움 또한 가중되었다.
이 문제는 폴리스 사이의 전쟁뿐만 아니라 폴리스 사회 내부의 이념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평등이란 오랜 이상에 대한 믿음은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쇠퇴했다.
부자들은 점차 정치에서 물러났고, 많은 자유시민은 가난에 찌든 자유민이 되었다가 결국 노예로 전락했다.
그 결과는 절망과 냉소였다.
그렇다고 창조적 에너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철학, 과학, 문학 등은 서기전 4세기에 꽃을 피웠다.
유능한 인물들이 굴곡 많은 공적인 삶에서 벗어나 정신적 삶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폴리스 체제가 쇠퇴하면서 진지한 사상가들은 폴리스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기능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마저도 폴리스라고 하는 협소한 지방 세계 내부에 갇혀 있었다.
그리스 세계의 암울한 균형은 마케도니아 왕국 Macedonian(Macedon) Kingdom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무너졌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 Philippos II(영어 Philip II)의 비범한 정복활동은 그리스를 통일시킨 것이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ros III(영어 Alexander the Great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활동은 그리스 문화를 군사력으로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형성한 세계주의적이고 그리스적인 문화—그리스 문화 Hellenic culture와 대비되는 헬레니즘 문화 Helenistic culture—는 거의 1,000년 뒤 이슬람이 흥기할 때까지 근동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폭넓은 문화적 영향력을 미쳤다.
서기전 4세기 폴리스의 실패
그리스 폴리스의 쇠퇴 | |
스파르타의 그리스 폴리스 주도권 장악 | 서기전 404년 |
그리스 전역에서 물가 50퍼센트 상승 | 서기전 400~350년 |
코린토스 전쟁 | 서기전 395~387년 |
테베군이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군을 물리침 | 서기전 371년 |
서기전 4세기 초에는 그리스 문화의 위대한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의 결과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지만 스파르타는 뜻밖의 승리로 얻은 우월한 지위에 걸맞은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스파르타 본국 정치인들은 스파르타 군대를 스파르타 국경 밖에 내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를 놓고 크게 의견이 엇갈렸다.
한편 국외의 스파르타인은, 종속된 동맹국들을 강압적으로 다루었던 아테네인 만큼의 자제력과 신중함도 보여주지 못했다.
서기전 395년 그리스의 상당수 폴리스들—오랫동안 서로 적대적이었던 아테네 Athenai , 아르고스 Argos, 코린토스 Korinthos, 테베 Thebai를 포함해서—이 힘을 합쳐 스파르타에 맞서 싸웠다.
이것이 코린토스 전쟁 Corinthian War(서기전 395~387)이다.
외부 중재 세력—사실상 페르시아 Persia가 구성하고 보증해주었다—이 그리스인에게 억지로 강화를 밀어붙인 덕분에 스파르타는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양상은 앞으로 50년 동안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그러는 동안 주도권은 서서히 페르시아에게로 넘어갔다.
○주도권(헤게모니 Hegemonie) 쟁탈전
코린토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4년간 테베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이것은 폴리스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었다.
테베인은 자치권을 회복한 뒤 에파미논다스 Epaminondas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는 열렬한 애국자이자 군사전략의 천재였다.
그리스인은 일찍이 몇십 년에 걸쳐 경무장 척후병과 궁수를 추가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중장비 보병 팔랑크스 phalanx의 기본 형태를 개량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스파르타 체제를 모방해 그는 동성애자 150쌍으로 구성된 '테베 신성군단'이라는 엘리트 중장비 보병 부대를 창설했다.
에파미논다스는 경무장 부대도 창설했다.
서기전 370년대 초 그는 스파르타와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룰 준비를 마쳤다.
테베와 스파르타의 군대는 서기전 371년 레욱트라 Leuctra에서 맞섰다.
에파미논다스는 일반적인 전술 관행을 피해 최정예부대인 테베 신성 군단을 대형의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배치하고서, 동시에 왼쪽 팔랑크스를 50열 종대로 배치함으로써 좌익을 강화했다.
그는 이 기습작전을 소나가 같은 활과 창 공격으로 위장했다.
양쪽 군대가 맞부닥치자 막강한 테베군 좌익이 스파르타의 우익을 박살 냈고, 최정예부대가 쇄도하면서 스파르타 팔랑크스는 붕괴되고 말았다.
에파미논다스는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메시니아 Messnia로 행군해 들어가 스파르타의 3계급 노예들인 헤일로타이 Helots(1계급은 시민권자인 스파르티아타이 Spartiates, 2계급은 스파르타 주변인과 항복한 자들인 페리오이코이 Perioeci)를 해방시켰다.
이로써 스파르타의 지배권, 나아가 스파르타 사회는 종말을 고했다.
에파미논다스는 단숨에 스파르타를 일개 지방세력으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테베의 세력이 커지자 테베에 대한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들의 적대감도 커졌다.
서기전 371년 아테네는 테베를 도와 스파르타에 맞섰지만, 서기전 362년 테베와 스파르타가 다시 싸우려 하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테베군이 다시 한번 승리했지만 에파미논다스는 전투에서 죽었고 그와 더불어 테베의 주도권도 사라져 버렸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Delian League보다 공정하게 조직된 해군 동맹을 수립해 이 공백을 메우려 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제 버릇을 못 버린 채 이내 동맹을 악용했고, 반란으로 인해 해군 동맹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 결과 그리스는 수많은 적대적 소국들의 군집으로 남게 되고, 이들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모든 폴리스의 세력이 약해졌다.
폴리스들은 또한 내부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테네는 30명의 참주가 과두정의 평판을 망쳤던 까닭에 다른 도시들이 겪었던 정치혁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민주정 지지파와 과두정 지지파 사이의 투쟁이 악화일로였다.
심지어 스파르타에서도 시민권을 잃은 1계급 신분인 한 스파르티아타이가 스파르타 사회의 불만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획책하다가 적발되었다.
○사회적·경제적 위기
폴리스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에 국내 정치투쟁까지 겹치면서 그리스 세계 전역의 사회와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부유한 도시도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재원이 고갈되었다.
많은 사람의 재산이 멸실되었고 많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에서 밀려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스 전역에 걸쳐 지방 소읍들은 반복해서 약탈을 당했다.
농경지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과수원과 포도원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까지 기르려면 오랜 시일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점차 경작 가능한 농지마저도 생산성이 예전보다 떨어졌다.
그 결과 서기전 4세기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전반적인 물가가 50퍼센트가량 상승했지만(일부 품목은 3~4배 상승) 임금은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
세금은 늘어났고, 아테네 부자들은 공공 극장과 건축물의 건립, 전함의 유지와 보수, 축제 상연 등에 개인 재산을 출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렇게까지 했건만 국가의 재화는 두 번 다시 서기전 5세기처럼 흘러넘치지 않았다.
참주들이나 페리클레스 Pericles가 단행했던 것과 같은 야심적인 공공 지출은 서기전 4세기의 폴리스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도시 주민들은 실직 상태에 빠졌다.
전쟁 기간 동안 남성은 소속 폴리스를 위한 군복무에 나서 노잡이나 병사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도시에 평화가 찾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용병으로 복무했다.
시칠리아와 Sicilia와 이탈리아 Italia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리스 본토 출신의 용병을 고용했다.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에서의 원정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그리스 본토의 용병을 고용했다.
페르시아 왕위 주창자 또한 국왕인 친형을 몰아내기 위해 그리스 용병을 고용했다.
이들 그리스인은 페르시아 제국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싸웠고, 왕위 주창자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1만 명의 그리스 용병은 자력으로 살길을 찾아 빠져나왔다.
이 사건은 비교적 소규모의 그리스 군대일지라도 페르시아 땅에서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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