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조선시대의 화론과 화사 본문
조선시대의 그림에 관한 논평이나 이론인 화론畵論과 그림 역사인 화사畵史에 대한 얘기다.
본래 유교문화권의 중심인 중국에서는 천오륙백년 전부터 화론, 화사, 화법畵法(그림 그리는 방법), 화품畵品(그림의 품격) 등이 크게 번성했었다.
예를 들면 남제 말기 화가인 사혁謝赫(?~?)이 지은 ≪고화품록古畵品錄≫이라든지, 당나라 장언원張彥遠(815~879)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 이래로 수많은 화인전畵人傳(화가의 전기), 화법, 화론 등이 있었다.
이와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화론은 말할 것도 없고, 흔한 화인전도 그 내용이 아주 적고 변변하지 못해 볼 만한 것이 적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림 문화권 중심지인 중국의 관련 서적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문화권 전체의 공유재산으로서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한문이란 전달 수단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역문화의 특성을 발휘하는데 일종의 장애가 되었었는지는 모른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도 화론과 화인전이라고 할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이런 점은 고유섭高裕燮(1905~1944)의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 상·하권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화론 및 화사의 실질적인 시작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이 1917년 편집하여 1928년 간행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으로 평가된다.
근대 한국 최고의 한국서화 감식안으로 평가되는 위창 선생이 삼국시대의 솔거 이후 역대 우리나라 서화가 1,118명(1,117명이란 기록도 있다)의 인적 정보 및 관련 문헌 기록을 모아 편년체(연대순으로 기록)로 사전 형식으로 정리하여 한문漢文으로 쓴 기록자료집으로서 '미술사학도의 성전'이라 불린다.
서화가를 주제로 하여 체계적으로 편집한 첫 기록물이라는 점과 후대에도 참고하여 고증할 수 있도록 출처를 밝혀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은 자료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근역槿域'이란 무궁화가 많은 땅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위창은 신라, 고려, 조선(상, 중, 하)의 5개 장으로 나누고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하면서, 자字-호號-가세家世(집안 계통과 문벌)-출생연도-수학修學(사제관계)-관직-사망연도 따위를 소개하고 각 서화가들의 예술에 대한 기록과 논평을 싣고 그 출전出典(인용한 글이나 출처가 되는 서적)을 밝혔다.
화사에 대한 책 즉 화인전으로는 청죽聽竹 남태응南泰膺(1687~1740)의 ≪청죽화사聽竹畵史≫가 비교적 체계적이고 됨됨이를 이루고 있으며, 그 이후로 체계적인 책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김정희, 조희룡 시절에 와서 중인과 서민들의 의식이 고양되면서 서민 출신의 화인전이 몇 개 나왔다.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호산외사壺山外史≫와 겸산兼山 유재건劉在建(1793~1880)의 ≪이향견문론里鄕見聞錄≫에 화인전이 포함되어 있다.
또 한말에 오면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1864~1921) 선생의 ≪일사유사逸士遺史≫에도 화인전이 있다.
그리고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1893)의 ≪소치실록小痴實錄≫ 같은 자서전도 나오게 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화론 그것도 중국식의 철학적 화론에 대한 것은 아주 적으며, 그나마 완당 김정희의 글에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화품과 화론 같은 것이 전한다.
특히 완당의 사란법寫蘭琺(난초 그리는 화법) 같은 것은 자신만의 독특한 화론을 표현한 것이어서 중요시된다.
앞에 언급한 우봉 조희룡의 ≪호산외사≫와, 그가 임자도에 귀양가서 지은 ≪해외난묵海外讕墨≫, 옛 회고담으로 된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따위에도 그의 화론이 대한 여러 내용이 있다.
≪해외난묵≫에는 특히 사군자에 대해 청나라 사람의 말을 빌려 그가 얘기한 대목이 주목되며, 이는 중국화론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화론 외에도 섬사람들의 생활이나 유배지에서의 심경을 토로한 내용도 들어있는데, 그런 불우한 생활을 예술적 분위기로 승화해서 표현하고 있다.
다만 중국 옛 화가는 고개지顧愷之(344~406?)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여러 화인들 이야기는 하면서도 한국 화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는 점이 아쉽다.
그뿐 아니라 우봉은 귀양살이 떠나면서 그림 몇 점을 가지고 갔는데 대개 청나라 그림이지 한국 그림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생활은 어려웠지만 기분이 울적할 때는 평소 모아둔 골동이나 서화를 걸어놓고 감상하면서 좋아하는 운취를 가졌던 모양인데, 모두가 중국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완당류의 중국 취미를 지닌 중인이었다.
이처럼 완당과 우봉 시대를 회고해보면 중국 화론에 비하는 화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고, 그나마 이전에 없었던 ≪소치실록小痴實錄≫ 같은 중인들의 화인전이 나온다고 하는 점이 눈에 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화론은 중국 화론을 공유재산으로 인정하는 입장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1.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조선일보 1998. 8.6 인터넷 기사, 오세창 선생 한국미술사 역저 근역서화징 완역,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8/06/1998080670309.html.
3. 이기현, 근역서화징의 기록학적 연구, 서울대학교 S-Space, 2019,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61618
4. 구글 관련 자료
2022. 10. 2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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