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일본제국주의 시작은 '러일전쟁'이었다! 본문
20세기 초인 1904년 2월 8일에 개전하여 1905년 9월 5일에 종전된 러일전쟁은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둘러싸고 서구 열강을 대표하는 러시아와, 청일전쟁의 승리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게 된 일본사이에 벌어진 커다란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진 곳이 교전 당사국인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대한제국 영토와 한반도에서 가까운 청나라 만주 요동반도와 봉천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큰 아픔과 피해를 겪어야만 했다.
○더 그레이트 게임
러일전쟁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19세기의 세계정세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세계정세를 정치학적으로 '더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열강들이 마치 체스판에서 말을 두고 게임하듯 식민지를 침탈하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당시 세계 바다를 장악한 해양세력 영국과 넓은 영토를 가진 대륙세력 러시아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영국은 아프리카 일부 국가와 인도 따위를 점령하며 다수의 식민지를 침탈했고, 러시아도 식민지를 통한 영토 확장의 욕망을 드러냈다.
그런데 러시아는 동쪽으로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이 없어 바다로 세력을 펼치지 못했으며, 서쪽으로는 이미 영국이 해양을 장악해 바다로 나아갈 방법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육로를 최대한 활용해 세력을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즉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물자를 이동시킨다면 러시아의 오랜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동항을 통해 넓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이 러시아의 최종 목표였다.
신바다를 제패해야 세력 확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철도 건설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다.
국경을 따라 철도를 까는 것보다 청나라를 통과하는 게 거리가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일전쟁 이후 배상금에 허덕이는 청나라에 돈을 빌려주며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 부설권을 요구했고, 청나라는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이제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면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과 함께 대규모의 육군을 동아시아로 신속하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총 길이 9,000km가 넘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의 문제는 동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일본과 충돌한다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군사 요충지인 요동(랴오둥)반도를 확보하고 있던 일본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 소식을 듣자마자 위협을 느꼈는데, 그것은 바로 한반도에 러시아가 진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러시아는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는 부동항을 확보하려면 조선과 요동반도가 꼭 필요했기 대문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동맹국인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소유하는 것은 청나라 수도를 위협하는 동시에 조선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만든다며 일본을 압박하는 삼국간섭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청나라는 요동반도를 되찾은 대신 일본에 추가 배상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그럴 만한 돈이 없었으므로 러시아에게서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부동항인 요동반도의 여순(뤼순)과 대련(다롄)을 일정 기간 관할하면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동시에 삼국간섭에 참가했던 독일은 청도(칭다오)를, 프랑스는 광주(광저우)를 차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엄청난 굴욕을 느끼는 한편 대륙으로 뻗어나가려면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문제는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20세기 첫 세계 전쟁인 러일전쟁의 서막이 오른 장소가 뜻밖에도 대한제국(1897~1910)이라는 점이다.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일본
1896년 2월에 고종이 궁궐을 떠나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러시아 대사관(아관)으로 피란]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을 가져갔고, 다른 열강들도 앞다퉈 철도 부설권과 금광 채굴권을 가져갔다.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모 명성황후 시해라는 짐승보다 못한 짓까지 벌인 일본은 상황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자 분노했고, 러시아와의 대립은 더욱 팽팽해졌지만 일본은 아직 러시아에 맞설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에서 세력을 키우는 러시아를 몰아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뜻밖의 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
1902년 세계 최강대국 영국과 군사동맹인 영일동맹 Anglo-Japanese Alliance을 맺은 것이다.
영국이 극동의 작은 섬나라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영국의 힘을 이용해 다시 한반도에서 세력을 키울 기회를 얻게된 동시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를 이기기 위해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속전속결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군사력만 해도 큰 차이가 났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매우 철저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
동맹국인 영국에 군함과 대포를 대량 주문했고 다른 나라에서 제작한 전함을 구입하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국방비는 국가 예산의 30% 수준이었지만 러일전쟁에서는 무려 40%까지 늘려서 전쟁에 투자했다.
한마디로 일본은 러일전쟁에 올인한 셈이다.
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약한 일본이 쉽게 덤비리라 생각하지 못했으며, 일본조차도 스스로 러시아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일본이 주로 사용하는 전술은 기습공격이다.
일본은 전쟁의 승기를 먼저 잡기 위해 청일전쟁처럼 선전포고 없이 상대국을 공격하는 것이다.
○러일전쟁의 발발
일본의 첫 공격 지역은 요동반도 여순항과 한반도 인천항이었다.
거의 동시에 두 지역에서 러시아 군함 두 척을 공격하며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제물포에서 맞붙은 일본과 러시아, 포격이 시작되고 러시아 군함 두 척이 격침되었고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 군함은 결국 자폭을 선택했다.
그리도 한반도는 청일전쟁에 이어 또다시 다른 나들의 침략 전쟁에 이용당한 것이었다.
이때 일본은 한반도가 위험하다는 명분으로 고종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해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에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우리 민족은 이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며, 선전포고 후 인천에 상륙해 있던 일본군 장교들이 고종을 찾아가 군사력을 압박하여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의 가장 핵심 부분은 일본이 필요하다면 군용지를 마음껏 쓰겠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에 처음 상륙한 일본군 부대는 '임시 한국 주차대'로서, 이들이 일본 정부에게서 받은 명령은 인천 상륙 후 빠르게 경성(서울)에 진입하여 그 땅을 점령하고 확실히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다름아닌 영구 주둔지의 확보였는데, 이때 용산에 있는 토지를 강제 수용하게 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러일전쟁과 더불어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영구히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삼겠다는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계획한 한반도의 식민지화는 바로 러일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상당한 군비를 투자했고, 선제 공격을 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는 러시아와의 군사력 차이를 극복하고 주도권을 장약할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제대로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기습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게다가 시베리아 철도의 미완성으로 육군 병력과 군수품 보급도 힘들었다.
다급해진 러시아는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위에 레일을 깔고 약 3천 필의 말로 기차를 끌게 했다.
일본 해군의 기습 공격이 성공하자 일본 육군은 제물포에서 북쪽으로 빠르게 진군해 러시아군과 압록강에서 한 번 더 전투를 벌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의 경험을 살려 러시아군을 압록강 건너로 퇴각시켰고 압록강 인근의 구련성과 봉황성까지 차례로 함락하면서 한반도에서 러시아 주력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끔찍하고 참담한 상황을 겪었다.
즉 러시아와 일본 모두 각자의 본국이 아닌 나라에서 싸우다 보니 군수물자가 절실했는데, 부족한 것을 모두 한국에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초기에는 러시아군에 의한 피해가 막심했는데 당시 평남 관찰사가 의정부로 보낸 보고서를 보면 그 참상에 말문이 턱 막힌다.
"러시아 병사들은 강제 동원된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의 군복을 입혀 위장하여 같이 전진하다가 밤이 되면 쇠줄로 결박하여 도망갈 수 없게 하였고 또한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채찍질만 하였다.
따라서 살아서 돌아올 바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아녀자가 남편을 잃고 아들이 아비를 잃어 소리 내어 우는 상황을 차마 듣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듯 혹독한 나날이었지만 러시아군이 한국인을 힘들게 한 것은 압록강 전투 전의 3개월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평안도 지역을 청나라 대륙을 침략하는 전진기지로 삼고 강제로 이 지역의 인력과 물자를 혹독하게 갈취했다.
군수물자를 나르는 한국인의 얼굴에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의 페인트를 칠했는데, 페인트 색상이 곧 군수물자의 분류였다.
특히 함경도는 일본군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한국 유일의 군정 지역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역민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 때도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오판으로 우리 국민들은 두 침략자 사이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달픈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러일전쟁에서 3가지 결정적 사건
-사건 1. 여순항 공격과 봉천 전투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러시아가 지배하는 여순항이 일본에 함락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러시아 해군 기지이자 태평양 진출의 거점인 여순은 일본으로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지역이었다.
물론 러시아로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동항이었다.
청일전쟁 때 일본이 여순을 함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러시아는 이곳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콘크리트를 부어 철벽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순항은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곳으로 안쪽에는 넓은 만이 펼쳐지지만 입구가 좁아 배가 한 척밖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안에서 러시아 함대가 포진한 채 공격하니 일본은 항구 쪽으로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 해군은 고민 끝에 여순항 앞 해상에 자신들의 낡은 함선을 침몰시켜 러시아 함선이 어디로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출입로를 봉쇄하면서, 러시아 함선을 파괴하기 위해 물속과 물 위에 폭탄을 설치하는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러시아 해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항구 봉쇄가 길어지면서 지친 일본은 육군을 활용해 압록강을 건너 육로를 통해 여순 요새를 공격했다.
하지만 일본군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항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난공불락의 203고지를 요새화함으로써 방어와 공격 태세를 모두 갖춘 러시아군은, 일본 육군의 공격이 요새에 채 닿기도 전에 아래에서 공격하던 일본군을 포격함으로써 이 전투에서 6만여 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내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러일전쟁에 모든 것을 건 일본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당시 타이완 총독이던 고다마 겐타로(아옥원태랑兒玉源太郞)을 만주총군 총참모장으로 투입했다.
그는 상황을 살펴본 뒤 일본 본토의 주요 항구에서 280mm 구경의 해안포를 뜯어와 사정거리가 몇 km에 달하는 해상용 장거리 대포로 여순항 요새 밑에 설치하였고, 대포를 쏘면서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작전으로 일본군은 마침내 203고지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다시 해안포로 여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침몰시켰다.
그리고 러일전쟁 발발 1년이 다 되어가던 1905년 1월,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항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두 달 후인 1905년 3월, 러시아와 일본은 봉천(심양)에서 최대 규모의 육지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만 일본군 25만 명, 러시아군 36만 명이 각각 투입되었고, 일본은 7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치열하게 싸워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육지에서의 대규모 전투는 모두 끝나게 되었다.
한반도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던 러시아와 일본은 여순을 시작으로 제물포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 압록강, 그리고 서해와 동해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투을 벌였고, 이제 동아시아의 최강자가 누군인지 전 세계에 입증하기 직전이었다.
몇 개월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군은 스스로를 최강자라 여기며 자신만만해했다.
단 한 번의 승리도 얻지 못한 채 후퇴한 러시아 사령부도
"이것은 러시아의 위대한 후퇴다. 최종 승리는 러시아다!"라며 아직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두 나라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전쟁의 운명을 가르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사건 2. 피의 일요일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 러시아에서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러시아 수도로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거주하는 궁전이 있고 전쟁 지휘부가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을 피로 물들인 이 사건은 러일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곳과 멀리 떨어진 반대편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어떻게 러일전쟁의 막을 내리게 했을까?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민이 감당해야 할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 생활이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경제적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경제 위기를 겪던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의 금속기계 공장에서 노동자를 부당 해고하자 공장의 전체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다.
사실 일본은 이전부터 러시아의 내부 균열을 악화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러시아 혁명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해 오고 있었다.
1905년 1월 22일, 노동자들은 부당 해고에 맞서 청원 행진을 벌인다.
약 30만 명의 러시아 국민이 직접 황제 니콜라이 2세에 급여를 올려달라며 거리로 나선 것이다.
당시 러시아 국민에게 황제는 구세주였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황제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제의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겨울궁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제가 아닌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군인이 행렬을 막았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궁전으로 향했다.
그 순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고 약 1천 명이 그 자리에서 희생되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는 이날 거리를 새하얗게 덮은 눈을 붉게 물들였다.
군인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피의 일요일'이다.
자국민에게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 황제를 보며 러시아 국민은 더 이상 그를 숭배하지 않기로 한다.
러시아 전역에 퍼진 황제에 대한 배신감과 충격, 이를 계기로 러시아 전역에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와 군대의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모스크바에서도 총파업이 시작됐다.
1905년 1월은 러일전쟁 중이던 때였다.
같은 시기 러시아 심장부에서 한 달 동안 파업에 참가한 사람만 약 44만 명에 이른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보다 전국에 번진 자국 내 혁명운동을 먼저 수습하기로 한다.
나라 밖 전쟁보다 발등에 떨어진 불인 혁명을 처리하는 게 더 시급했던 것이다.
'피의 일요일'을 계기로 러시아는 내정 혼란을 겪게 되었고 러시아 내부에서는 전쟁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경파의 주도로 러일전쟁은 계속 이어나갔다.
이때 세 번째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3. 러시아 발트함대와 일본 연합함대의 해전
여순항 전투 패배와 피의 일요일 사건, 여기에 봉천(심양) 전투까지 패배한 러시아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바로 러시아의 자존심이자 해군의 상징인 발트함대 Baltic Fleet이다.
러시아 최강 함대 발트함대는 1703년 대 북방전쟁 와중 표토르 대제에 의해 창립,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일본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공격용 전함으로 보유했다.
러시아는 발트함대야말로 영국함대와 맞서서 버텨낼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는데, 육상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러일전쟁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대 발트함대가 있는 발트해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여순항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한시라도 빨리 발트함대가 격전지까지 와야 하는 상황에서 여순항까지 가는 최단 거리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트함대는 이 루트가 아닌 아프리카 대륙을 거치는 훨씬 먼 루트를 선택한다.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이 러시아의 항로를 방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전쟁이 아니라 전 세계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단순히 일본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뒤에 있는 영국과도 싸우는 셈이었다.
발트함대가 지나는 곳곳이 영국 식민지인 상황에서 지름길로 갈 수 없었다.
게다가 긴 항해에는 반드시 연료가 필요하다.
발트함대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석탄을 공급받거나 선체를 수리할 수 있는 항구에 들어야 했는데, 세계 최강의 해양 대국인 영국이 자신의 식민지들을 압박해 러시아 해군이 자신의 식민지 영토에 정박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발트함대는 지름길인 수에즈 운하를 두고도 아프리카 최남단이 희망봉을 우회해서 가야 했다.
1905년 5월, 발트함대가 드디어 영국의 방해를 뚫고 약 200여 일 동안 3만km에 가까운 장거리 원정 끝에 쓰시마 해협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 항해 동안 단 한 척의 배도 잃어버리지 않고 39척의 배가 무사히 도착한 '기적의 항해'를 이뤄낸 것이다.
그들은 곧바로 전투를 치르기보다 먼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전열을 정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일본 해군이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면 일본을 지나야 했기에, 일본은 이 길목을 노렸던 것이다.
결국 쓰시마 섬(대마도) 앞바다에서 러시아의 발트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의 대해전이 벌어졌다.
러시아와 일본 전함들이 모두 일자 대형으로 대치 중이었다.
이때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동향평팔랑東鄕平八郞)가 독특한 전술을 펼쳤다.
갑자기 일본 전함들이 뱃머리를 꺾어 옆으로 늘어서더니 발트함대를 향해 포를 퍼부은 것이다.
사실 이 방식은 일본 함대의 전열이 흐트러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군함들은 일사불란하게 가로줄 대열을 완성해 발트함대의 진출로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러시아 해군들은 우왕좌왕했고, 그 사이 선두에 있던 함대부터 집중 포격했다.
곧바로 러시아 사령부가 탄 함대도 공격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지휘부를 상실한 러시아는 혼란에 빠졌고 일본은 이 틈을 타 전열을 흩트리지 않고 계속 포격하며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전력이 총동원된 대규모 해전은 약 40시간 만에 러시아의 자랑 발트함대가 쓰시마 앞바다와 동해 일대에서 완벽히 침몰하며 끝났다.
그런데 일본은 발트함대를 무찌르려는 과정에서 우리 땅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경남 진해를 불법 점거하며 발트함대를 기다렸다.
마치 자기들 영토인 것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때 약 3개월 동안 진해만 서쪽 한 모퉁이에 있는 적은 섬 취도吹島를 발트함대로 상정하고 과녁 삼아 섬을 향해 함포사격 훈련을 했다.
이 훈련 때문에 섬의 약 98%가 소실되었으며, 남아 있는 바위섬인 현 취도는 원래 크기의 2%에 불과하다.
○일본 제국주의와 한반도 식민지화의 시작
사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의 끝 무렵 병력, 물자, 재정의 모든 면에서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병력과 자원 보충이 얼마든지 가능한 러시아가 전쟁을 포기하지 않으면 일본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는 전쟁을 정리하고 싶어 했고 두 나라는 강화를 맺게 된다.
일본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일본에 있어 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물량 소비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에서 7개월간 소비한 무기 사용량을 러일전쟁 개전 1주일만에 초과했을 정도였으니까.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2억 엔을 사용했기에 러일전쟁에서는 1년간의 전쟁 비용을 4억~5억 엔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1년 7개월간 사용한 러일전쟁 비용은 약 20억 엔으로 청일전쟁 비용의 10배에 달했다.
그중 빚이 13억 엔 정도였는데 절반은 영국과 미국에 빌렸고, 나머지 절반은 국민에게 채권을 강매한 것이다.
전쟁 후에 모든 국민이 이 빚을 갚아야 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학습한 오류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돈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빚을 내서 전쟁을 했지만 이는 도박이었다.
또한 일본은 인명 피해도 컸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동원한 병력은 108만 명이 넘었는데 전사자만 8만 7천 명, 부상자가 38만 명을 넘었다.
연전연승했지만 전쟁이 남긴 것은 상처와 빚뿐이었다.
이러니 장기화된 전쟁에 기진맥진한 정부도 슬슬 강화조건을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가 먼저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이라는 정치적 혼란과 발트함대의 궤멸로 전쟁을 이끌기 어려웠고, 일본은 전쟁 장기화로 인한 물리적 부담으로 더는 전쟁을 할 수 있는 힘과 여력이 없었다.
이때 일본은 미국에 급히 도움을 청했다.
1905년 9월, 러시아와 일본 대표가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 북쪽 해안에 있는 포츠머스 Portsmouth 해군기지에 모여 조약을 맺기로 한다.
치열했던 러일전쟁의 중재자로 나선 것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조항에 대한 의견 차리로 신경전을 이어갔다.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의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하라"는 주장에 대해 러시아전권대사 세르게이 비테 Sergei Vitte는 "그럴 경우 러시아 이익이 손상될 수 있다"라며 거부한다.
일본은 다시 "전비 배상과 사할린섬 할양"을 요구하지만, 러시아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니 한 치의 땅도, 1루블의 배상금도 줄 수 없다. 전쟁을 속행하면 러시아에 승산이 있다"라며 버틴다.
약 1개월의 협상 끝에 1905년 9월 5일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가 최종적으로 체결되었다.
러시아는 요동반도에서 철수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간섭을 포기했으며, 사할린 섬 남부를 일본에 할양했다.
그리고 일본이 대한제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우월권을 가지며 국가의 지도, 보호 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했다.
사실상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해준 셈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우리나라 식민 지배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
영국과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 인도에 대한 영국의 권리를 서로 동의한다는 제2차 영일동맹을, 미국과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서로 승인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Taft–Katsura agreement)을 맺은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약했으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지배한다는 내용에 열강들이 동의했을지 짐작이 가는 조약들이다.
이렇게 러일전쟁은 단순히 한반도에서 벌어진 싸움이 아니라 세계 패권 경쟁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10월 선언을 시작으로 마지막 왕조가 붕괴된다.
동북아 국제정세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한편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며 대한제국의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출처
1. tvN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팀 지음, '벌거벗은 세계사 사건편'(교보문고, 2022)
2. 위키백과 러일전쟁
3. 구글 관련 자료
2022. 10. 2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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