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6: 헬레니즘 문화-철학과 종교 본문
헬레니즘(그리스주의) Hellenism 철학은 두 가지 경향을 드러냈는데 이 둘은 헬레니즘 문명 전체를 나란히 관류했다.
첫째, 에피쿠로스 철학 Epicureanism과 스토아 철학 Stoicism으로 대표되는 주류 시대정신은 이성을 인간 삶의 고뇌를 연결하는 열쇠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결합된 철학과 과학이 바야흐로 분리되는 시점에 이르렀지만, 이 시대정신은 분명 그리스적 영향의 표현이었다.
둘째, 회의주의와 다양한 종교를 통해 구현된 비주류적인 또 다른 시대정신은, 이성을 거부하고 진리에 도달할 가능성을 부인했으며 신비주의에 귀착하거나 신앙에 의존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와 종교가는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한 가지 점—즉, 인간 존재가 시련에서 해방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인간적 이상을 표현해줄 수단으로서의 자유로운 시민의 삶이 쇠퇴하면서, 삶을 의미있게 하거나 적어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줄 대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은 모두 서기전 3000년 무렵에 등장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창시자 에피쿠로스 Epicuros(서기전 341~271)와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 Zenon(영어 Zeno)(서기전 344?~262?)은 모두 아테네에서 살았다.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철학은 사회의 복리가 아닌 개인의 선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두 철학은 영적 실체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신과 영혼도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선언했다.
또한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은 모두 보편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두 철학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똑 같다고 가르치면서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두 철학 체계는 달랐다.
스토아학파는, 우주란 하나의 질서 잡힌 전체로서 그 안에서 모든 모순은 궁극적으로 선에 귀착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악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불행은 우주의 궁극 완성을 위한 필연적 부수 사건일 따름이다.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합리적 목적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된 것이다.
어떤 개인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점에서만 자유롭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이건 저항하건 인간은 운명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최상 의무는 우주 질서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그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런 체념을 통해 지고의 행복이 얻어질 것이며, 지고의 행복이란 곧 마음의 평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개인은 이성적 본성에 의해 우주적 목적에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합치시키면서 자신의 영혼에서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씻어내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겪은 악운에 대해 투덜거리거나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토아학파는 스스로의 철학과 조화가 잘되는 윤리적·사회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지고의 선이 마음의 평정에 있다고 믿은 스토아학파는 당연히 의무와 자제를 중요한 덕성으로 강조했다.
그들은 악이 세상에 만연함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할 것을 가르쳤으며, 공공문제에의 참여를 합리적 정신을 지닌 시민의 의무로서 권유했다.
그들은 노예제와 전쟁을 비난했지만, 이런 악덕에 반대하는 실천적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폭력 수단에 의한 사회 변화로 초래되는 결과가 그들이 치유하고자 하는 병폐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고귀한 산물로서 평등주의, 평화주의 , 인도주의 등을 가르쳤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유물론적 원자론에 관한 그들의 철학을 서기전 5세기 후반의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 Demokritos(영어 Democritus)에게서 가져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궁극 요소는 원자이며, 원자는 무수히 많고 파괴할 수 없으며 더 이상 나눌 수도 없다.
우주의 모든 물체 또는 유기체는 원자의 우연한 결합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와 그 추종자들은 우주에 아무런 궁극 목적도 없으며, 따라서 최고의 선은 쾌락—육체적 욕망의 적당한 만족, 최고의 미덕과 이전에 누렸던 만족감을 명상하면서 얻는 정신적 쾌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 앞에서의 영혼의 평온—이라고 결론지었다.
영혼이 물질이므로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함께 죽는다는 것, 우주가 스스로 작동한다는 것, 어떤 신도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개인은 죽음이나 그 밖의 초자연 현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에피쿠로스학파는 경로는 다르지만 스토아학파와 동일한 일반 결론—마음의 평정보다 나은 것은 없다—에 도달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실천적인 도덕적 가르침과 정치학은 공리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그들은 미덕 자체를 목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선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라고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절대적 정의 같은 것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법률과 제도는 그것이 개인 복리에 기여할 때만 정당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일정한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이 지켜지는 유일한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각 개인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국가를 단지 편익을 위한 것으로 간주했고, 현명한 사람은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상의 악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는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현명한 개인은 은둔해 철학을 연구하고 뜻 맞는 소수의 친구들과 나누는 교제를 즐기기 마련이었다.
○회의주의
에피쿠로스학파보다 한층 현저하게 패배주의적 철학을 천명한 것은 회의주의학파였다.
회의주의懷疑主義 skepticism는 서기전 200년 무렵 카르네아데스 Karneades(서기전 214?~129?)의 영향 아래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회의주의학파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에서 나오며 따라서 지식은 제한적·상대적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런 가르침에서 회의주의학파는 그 어떤 것도 확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감각적 인상은 인간을 속이기 때문에 어떤 진리도 확실한 것이 못 된다.
인간은 사물이 이러이러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것, 인생의 의미,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명한 진리 추구자라면 판단을 유보할 것이며, 이것만이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
만일 절대 진리에 대한 무익한 탐구를 포기하고 선과 악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마음의 평정—삶이 허락하는 최고의 만족이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학파는 정치·사회 문제에 관해 에피쿠로스학파만큼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한 이상은 이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없는 세계에서 도피하는 것이었다.
○종교
헬레니즘 종교 역시 정치 참여로부터의 도피 수단이었다.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 종교는 폴리스를 보호하는 신들에 대한 예배를 강조했다.
지역과 신의 연관성에 대한 인식은 헬레니즘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서기전 3세기와 2세기의 뿌리 없는 세계주의적 환경 속에서 그 같은 도시지향적 종교는 호소력을 잃었다.
그 대신 사회의 엘리트 구성원들 상당수는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철학, 회의주의에 끌렸다.
반면 보통 사람들은 현세에서는 정교한 의식을 제공하고 내세에서는 구원을 제공하는 감성적인 인격적 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스어 사용 공동체에서는 극단적인 금욕적 속죄, 신과의 신비적 합일, 내세의 구원 등을 강조하는 종교들이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이들 신비 종교—구성원의 신원이 비밀에 부쳐졌고 은밀히 의식이 거행했기에 이렇게 부른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디오니소스 Dionysos(영어 Dionysus) 숭배였는데, 이것은 디오니소스 신의 죽음과 부활의 신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집트의 이시스 Isis 숭배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전했다.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도 마찬가지였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모든 물질을 악이라고 주장하면서 고행의 실천을 통해 내세의 영묘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혼을 준비하라고 신도들에게 요구함으로써 점차 이원론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들 또한 새로운 땅으로 이주했다.
그리스의 신과 여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들이 근동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동시에 근동의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들이 그리스 본토의 도시에 건립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는 이집트 신화와 근동 신화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고 재구성된 도시라는 점에서 각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헬레니즘 세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 종교와 비그리스 종교가 결합해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다양한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와 같은 융합 흐름에 대해 거센 저항을 펼친 곳—팔레스타인 유대인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에서조차 헬레니즘 문화는 깊숙이 뿌리를 내렸으며, 특히 상층계급에서 확도한 기반을 다졌다.
그리스의 영향은 팔레스타인 바깥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한층 두드러졌다.
서기전 2세기 말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는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 인구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들 그리스어 사용 유대인 공동체의 필요에 부응해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판(≪70인 역 성서≫라도 한다)이 등장했고, 이 성경은 그 자체로서 권위 있는 문서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70명의 학자가 제각기 독립적으로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도 하나하나의 번역이 모두 완벽하게 일치했고, 이는 ≪70인 역 성서≫가 신적 계시의 소산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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