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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7: 헬레니즘 문화-문학과 예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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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4장 그리스의 팽창 7: 헬레니즘 문화-문학과 예술

새샘 2022. 11. 4. 13:47

테오크리토스(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C%98%A4%ED%81%AC%EB%A6%AC%ED%86%A0%EC%8A%A4)

 

헬레니즘 시대의 문학과 예술은 과거 그리스인이 이룩한 업적의 다양한 국면들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작가가 예술가는 전제적 후원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자 형식적 기교만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헬레니즘 시대의 더욱 커진 삶의 불확실성 때문에 예술 소배자들은 좀 더 극적이면서 덜 난해한 예술 표현 형식에서 만족감을 얻고자 했다.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지 간에 분명 이 시기의 예술은 시민적 삶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예술작품은 수적으로 늘어났고 폭넓게 보급되었다.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헬레니즘 시대 작가는 1,100명을 넘는다.

그들의 작품 대부분은 그저 그런 수준이지만 일부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걸작으로 남아 있다.

 

 

○전원문학

 

헬레니즘 시의 가장 뛰어난 형식은 전원시田園詩(목가시牧歌詩) eclogue였다.

전원시는 목자牧者(목축 특히 양을 치는 사람)와 숲속 요정들의 환상적인 세계를 묘사한 새로운 장르였다.

이 장르의 고안자는 서기전 27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작품 활동을 한 그리스인 테오크리토스 Theokritos(영어 Theocritus)였다.

 

테오크리토스는 도피주의를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도시의 소음 한가운데서 전제적 지배자들과 부대끼면서 혼잡하고 너절한 환경에서 살았던 그는 안개 낀 시골의 매력을 찬미하고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즐거움을 이상화했다.

그의 전원시 중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나의 시골 노래를 시작하라.

감미로운 뮤즈여, 시작하라.

나는 에트나에서 온 티르시스,

이것은 티르시스의 아름다운 목소리일지니."

 

많은 사람들은 이 시의 비현실성에 이질감을 느꼈다.

들판의 목자가 어떻게 이런 세련된 표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독자들은 그의 시적 화려함을 즐겼다.

전원시를 창조한 테오크리토스는 헬레니즘 세계의 범주를 뛰어넘는 하나의 영속적 전통—그것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영어 Virgil)와 영국 시인 밀턴 Milton 같은 거장에 의해 채택되었고 후대의 시각 예술에도 풍부한 주제를 제공해주었다을 확립했다.

현대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 서곡은 알렉산드리아의 이 도피주의 시인에게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산문

 

헬레니즘 산문散文(율격과 같은 외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쓴 글로서 소설이나 수필 따위)  문학은 역사가와 전기작가들이 주도했다.

가장 심오한 역사가는 서기전 2세기 그리스 본토에 살았던 폴리비오스 Polybios(영어 Polybius)였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역사 발전은 순환되며 민족은 필연적으로 성장과 쇠퇴를 거치기 때문에 그 민족에게 과거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안다면 그 민족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 방법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고대의 모든 역사가들 중 폴리비오스를 능가하는 인물은 투키디데스 Thoukudides(영어  Thucydides) 한 사람뿐이다.

그는 사회적·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데는 오히려 투키디데스를 능가했다.

그 시대의 전기傳記는 대부분 경박하고 수다스러웠는데, 그것이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문학적 취향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건축

 

전제적 지배 스타일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 헬레니즘 건축은 장엄하고 장식적이었다.

서기전 5세기와 4세기 그리스 건축의 특징인 균형과 절제 대힌 헬레니즘의 공공건축물은 그리스적 요소를 채택하되 페르시아 군주와 이집트 파라오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두 개의 전형적 사례가 있었다(불행히도 둘 다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하나는 높이가 거의 120미터에 달하고 위로 오를수록 점차 가늘어지는 3층 구조에 꼭대기의 등불을 받치기 위한 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알렉산드리아의 대형 등대였고, 다른 하나는 푸른색 회반죽을 칠한 돌로 건축된 동시대인이 '공중으로 솟았다'고 표현한 알렉산드리아의 성채였다.

 

독알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제우스 제단(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E%98%EB%A5%B4%EA%B0%80%EB%AA%AC_%EB%B0%95%EB%AC%BC%EA%B4%80)

소아시아(터키 반도) 페르가몬 Pergamon에 있는 어마어마한 제우스 제단 Altar of Zeus(근대에 이르러 베를린으로 옮겨졌다)과 대형 야외극장은 높다란 언덕을 마주하고 있었다.

에페소스 Ephesos(영어 Ephesus)의 도로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크기야 어찌되었건 헬레니즘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낸 것은 코린토스식 기둥이었는데, 그것은 과거 그리스 건축물을 주도했던 소박하고 위엄 있는 도리스식·이오니아식 기둥에 비해 한층 장식적이었다.

 

 

○조각

 

아마도 헬레니즘 문화가 이룩한 모든 결과물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예술 분야는 조각일 것이다.

종전 그리스 조각이 인간을 이상화하고 엄격한 절제로써 그리스인이 가진 중용의 이상을 표현하려 한 것과는 달리, 헬레니즘 조각은 극단적인 자연주의와 노골적인 화려함을 강조했다.

조각가들은 얼굴 주름살, 팽창한 근육, 웃의 복잡한 주름 등을 장황하게 묘사했다.

거북한 자세는 대리석 조각가들에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조각가들은 팔다리를 뻗거나 한쪽 다리로 균형을 잡는 등 실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자세를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헬레니즘 조각은 부유한 개인 후원자를 위해 제작되었으므로 착상과 기교면에서 무언가 독특한 것—소장가가 그 독특함을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복잡성이 그 자체로서 찬양되는가 하면, 극단적 자연주의가 기형적으로 양식화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런 작품을 보고 인식의 충격을 경험하곤 한다.

왜냐하면 헬레니즘 조각의 현란하고 과장된 자세는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와 그 추종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고, 19세기와 20세기의 현대 조각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라오콘 상, 바티칸 비오 클레멘스 박물관 Pio-Clementino Museum(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98%A4%EC%BD%98_%EA%B5%B0%EC%83%81)

헬레니즘 조각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그것들은 헬레니즘 시대 미학적 이상의 다양한 국면들을 드러냈다—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먼저 <빈사의 갈리아인>은 서기전 220년 무렵 페르가몬에서 제작되었는데, 뒤틀린 인체를 더할 나위 없는 솜씨로 표현했다.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날개>는 서기전 200년 무렵 작품으로, 흐르는 옷자락을 돌덩이가 아닌 진짜 옷인 것처럼 묘사했다.

서기전 1세기 작품 <라오콘 상 Laocoon Group>은 조각예술 역사상 가장 치열한 감정과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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