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8: 서초구 지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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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8: 서초구 지역

새샘 2022. 12. 1. 13:34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서초구 지역>

 

 

지금의 방배동 쌍용예가클래식아파트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초구 지역에서는 먼저, 2005년 9월 7일부터 20일까지 방배동 776-3번지 일대인 궁전아파트의 리모델링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보고서를 확인하지 못해 자세히 알 수는 없고,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연표에 유적의 연대를 청동기시대로 규정하였고, 이 유적에서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유구가 조사되었다.

리모델링 이후 새로 지은 아파트가 위 사진에 보이는 지금의 방배동 쌍용예가클래식아파트이다.

 

 

내곡동 세종대왕 초장지 조사지역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08년에는 내곡동의 세종대왕 초장지初葬地(처음 묻혔던 왕릉 자리)로 알려진 예전 영릉英陵에 대한 발굴조사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조사지역은 내곡동 대모산 남쪽 기슭으로 현 국가정보원 안이다.

조사지역의 남동쪽 약 1km 지점에 태종과 순조 왕릉인 헌인릉獻仁陵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옛 영릉은 태종의 헌릉 구역 안에 있었는데, 터가 좋지 않다 하여 지금의 여주 영릉으로 이장하고 석물들만 땅속에 묻었다고 한다.

이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1973년과 1974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포함한 석물石物(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수습하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했다.

이때 발굴조사로 이 일대는 세종대왕의 초장지로 확실시되었으며, 이후 이 지역은 추가조사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후 문화재청에서는 세종대왕 초장지에 대한 보존·정비 계획을 세우고, 이런 과정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매장주체부인 회다짐(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1기와 층계석, 곡담 기저부基底部(바닥 부분), 상·중·하계석 기저부, 석양石羊·석호石虎 기초부 7기,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 기초부,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기초부 2기, 무인석武人石 기초부 1기, 석마石馬 기초부 1기 따위가 조사되었다.

조사지역 주변에서는 석물 37점이 확인되었으며, 유물로는 암막새 조각, 기와, 벽돌 등 76점이 출토되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적으로 왕릉의 조성 방법을 따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발굴단은 이곳이 기존에 알려진 세종대왕의 초장지는 아닌 것으로 확인했다.

조선 초기의 왕릉은 고려 왕릉의 묘제를 따라 조성되었지만 세조 이후에는 매장주체부의 형식이 이전의 돌방(석실石室)에서 회다짐으로 바뀌었고,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매장주체부는 세조 이후의 매장주체부 형식인 회다짐이었기 때문이다.

 

 

원지동 원 터(원지) 조사지역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2년과 2013년에는 경부고속도로 판교-양재 구간 확장공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은 원이 있던 자리를 말하는 원 터 원지院址에서 유래된 지명인 원지동다.

고려~조선시대에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숙식을 위해 교통 요지에 역驛(우역郵驛: 공무로 다니는 관원에게 말을 공급하던 곳)과 원院(원우院宇: 공무로 다니는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을 설치했는데, 당시 교통의 요지였던 원지동에는 잠원나루에서 말죽거리를 거쳐 판교 이남으로 왕래하는 관원들을 위한 큰 원이 있었다고 한다.

 

원지동 원 터 담장과 축대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 터 2동과 담장 터,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단은 온돌시설이나 아궁이 등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창고와 같은 기능을 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아마도 출토된 유구는 원 터의 출입부 일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사지역 서쪽에 형성되어 있는 원지동 마을 일대에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원 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발굴단은 보았다.

 

2021년 7월 4일 원터골 자락길 산행날 새샘이 찍은 원터골 입구 원지동 원 터 표석

발굴단은 원지동 원 터는 고려 전기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이후 고려 중기에 남경南京(조선의 한양) 건설과 활성화를 통해 남북으로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원의 운영도 함께 활발해지면서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원지동 원 터의 실체를 일부분이나마 확인한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발굴단의 의견을 반영하여 사업범위를 축소하여 유적으로 보존하는 방안으로 결정했다.

현재 조사 유적은 복토가 이루어진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잠원동 고려시대 밭 유구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3년에는 잠원동에 있는 잠원대림아파트 재건축사업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에서 북동쪽으로 480m 거리에 한강이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12m 정도의 편평한 땅이다.

 

발굴 결과, 고려시대 밭으로 짐작되는 경작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면적은 총 2면으로 넓이는 각각 1,021 평방미터와 662 평방미터이다.

유적의 동·서·북 3면은 아파트 입지로 교란되었고, 남쪽은 조사지역 경계 바깥이어서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최대길이가 49m인 이랑의 규모로 보아 대규모 밭으로 추정했다.

 

지금의 잠원동 래미안신반포팰리스 아파트(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미 개발이 완료된 강남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유적, 그것도 밭 유구가 확인되어 매우 주목된다.

지금의 잠원동 래미안신반포팰리스 아파트가 바로 고려시대 밭이었던 자리인 것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2.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