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2: 초기 로마 공화정 본문
로마의 흥기, 서기전 753년~서기전 3세기 | |
전설상의 로마시 건설 | 서기전 753년 |
라틴권 확립 | 서기전 493년 |
로마 공화국 수립 | 서기전 500년 무렵 |
신분 투쟁 | 서기전 450년 무렵~서기전 287년 |
12표법 | 서기전 450년 무렵 |
로마 평민회의 권력 획득 | 서기전 287년 |
기사 계급의 성립 | 서기전 3세기 |
초기 로마 공화정 Early Roman Republic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처음에 로마인은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로마인은 다른 라틴인 영토를 정복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인과 이탈리아 남단에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들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점차 확장했다.
로마인은 대개 정복한 도시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지 않았지만 패배한 적들에게 젊은이를 로마 군대에 입대시킬 것을 요구했다.
로마는 또한 정복된 많은 도시에 라틴권을 확대시켰고, 그들에게 로마의 정치적·군사적 성공에 동참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로마 군대는 거의 고갈되지 않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서기전 3세기에 이르러 로마 군대는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고대 또는 중세 세계의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규묘였다.
기나긴 투쟁은 로마 국가의 농업적·군사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새로운 토지의 획득으로 가난한 로마 시민은 새로운 로마 식민지에서 농민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면서 로마는 놀라우리만큼 오랜 기간 철저한 농업문명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로마는 그리스나 페니키아에 비해 선박 건조나 상업 분야에 대한 관심을 상대적으로 늦게 가졌다.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로마인 사이에는 엄격한 군사적 이상이 확립되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로마의 군사 영웅에 관한 전설은 대부분 초기 공화정 시대에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호라티우스 코클레스 Horatius Cocles(서기전 6세기)는 단신으로 적군 전체에 맞서 싸워 전략 거점 교량을 방어했고, 퇴역 군인이자 정치인인 킹킨나투스 Cincinnatus(서기전 519?~430?)(종종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비교되곤 한다)는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일하던 농장을 떠나 조국 로마를 위해 싸우고자 전쟁터로 향했다.
○초기 공화정의 정부
로마는 완만한 정치 발전 과정을 겪었다.
왕정 교체마저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왕정 타도의 주요 결과는 집정관 consul이라는 두 명의 선출직 관리가 왕을 대신했다는 점, 그리고 원로원 Senatus(영어 Senate)이 공공기금 처분권 및 민회의 모든 활동에 대한 거부권을 가짐으로써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집정관은 민회인 켄투리아 comitia centuriata에서 선출되었지만, 로마 민회는 집단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고대 아테네의 민회와는 달랐다.
로마 민회의 각 집단은 한 표 씩을 행사했고, 통상 가장 부유한 시민으로 구성된 집단이 먼저 투표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가난한 집단들이 투표하기도 전에 다수결에 이르곤 했다.
그 결과 1년 임기의 집정관은 귀족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원로원 의원 가운데서 선출되기 십상이었다.
두 명의 집정관은 과거 왕이 가졌던 것과 같은 완전한 행정적·사법적 권력을 행사했으며, 상대 집정관의 행동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피차 권력이 제한적이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면 원로원이 소집되어 결정을 내렸다.
중대한 비상시국에는 한 명의 독재관이 6개월 이내의 임기로 임명되었다.
공화정 수립 후 파트리키우스 patricius로 불린 초기 귀족계급의 정치 지배권은, 시민 인구의 거의 98퍼센트를 점유하면서도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던 플레브스(평민) plebs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진 200년 동안의 투쟁을 신분투쟁 Struggle of the Orders이라고 한다.
플레브스는 다양한 구성 성분을 지닌 집단이었다.
일부는 상업과 농업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대부분은 소농, 상인이거나 도시빈민이었다.
플레브스는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전시에 군복무를 해야만 했지만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사법재판에서 차별적 판결로 희생을 당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법적 권리를 갖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성문법이 없었고 파트리키우스만이 법률 해석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나빴던 것은 채무로 말미암은 억압이었다.
채권자는 채무자를 로마 밖에서 노예로 팔아치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만 때문에 서기전 5세기 초 플레브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파트리키우스는 호민관 tribunus이라는 새로운 관리의 선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민관은 파트리키우스의 불법 행동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플레브스를 보호할 수 있었다.
이 승리에 뒤이어 법률의 성문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서기전 450년 무렵 저 유명한 12표법 Law of Twelve Tables—나무판 table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후대의 로마인은 이 법을 마치 인민자유헌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앙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법은 채무노예제마저도 폐지하지 않을 정도로 고대 관습을 대부분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법률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설명이 생긴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흘러간 뒤 플레브스는 하위직 행정관의 피선거권을 얻었고, 서기전 367년 무렵 최초의 플레브스 출신 집정관이 선출되었다.
플레브스는 점차 원로원에도 진출했다.
플레브스의 궁극적 승리는, 서기전 287년 로마 평민회 concilium plebis—플레브스만으로 구성된 좀 더 민주적인 의회—가 제정한 법령이 원로원의 승인 여부와 상관없이 로마 정부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다고 규정한 법률이 통과됨으로써 얻어졌다.
영어의 인민투표 plebiscite란 단어는 이 로마 평민회의 결의에서 유래되었다.
로마인의 보수 성향과 공화정의 헌정 안전장치들로 말미암아 이런 개력이 명확히 자리 잡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다양한 개혁들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성공한 플레브스는 로마 사회와 정부의 상위층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 귀족계급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출생에 의한 귀족에서 재산에 의한 귀족으로 변화했다.
로마 정치에서 재산이 지나치게 중요한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이 직접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도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런 제약은 기사계급 equestrian order이라고 하는 중요한 계급의 흥기를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기사계급은 재산가인 동시에 원로원에 대한 영향력도 있지만, 정치보다 사업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계급과 원로원은 칼로 무 썰 듯이 깔끔하게 분리되지는 않았다.
주요 가문 구성원 중 일부는 기사계급이 되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면서 형제와 사촌들의 정치활동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런가 하면 정치에 몸담은 형제들은 가문이 관여한 사업체에 파트너 자격으로 암암리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대를 이어가며 선거에 승리한 소수의 가문은 점점 더 위상이 높아지고 지나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그 결과 서기전 1세기에 이르면 강력한 로마 귀족들마저도 스스로 도시 내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사실상 배제되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일부 귀족들은 훼손된 공공이익의 옹호자로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사사로운 정치적 이익을 추구했다.
역사학자들은 서기전 4세기에서 서기전 2세기까지의 로마가 얼마나 민주적이었는지를 놓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공화정은 최고권이 시민조직체에 있고 관료가 시민에게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왕정과 구분된다.
그러나 공화정이 반드시 민주정인 것은 아니다.
권력을 과두 세력이나 특권집단에게 부여하는 체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 헌정은 경쟁하는 정부기구들—민회, 원로원, 그리고 집정관, 호민관, 재판관, 행정관 등— 사이의 타협과 절충을 통해 과두 지배를 보장했다.
이런 체제 속에서는 어떤 개인이나 혈연 집단이 압도적으로 강력해질 수도 없었고, 인민 의지의 직접적 표현이 로마 정치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오스 Polybios(영어 Polybius)가 볼 때 로마 헌정은 군주정·과두정·민주정 원리의 이상적인 절충이었다.
즉, 그가 보기에 그것은 완벽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체제였다.
○문화, 종교, 도덕
초기 공화정 로마의 정치 변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된 것처럼 지적·문화적 변화도 마찬가지로 매우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문자가 서기전 6세기에 도입되었지만, 로마인은 법률·보고서·비문 이외에는 문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교육은 대체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수되는 가르침—남성적인 스포츠, 실용적 기술, 군사적 미덕 등—에 국한되었다.
그 결과 로마인의 삶에서 문학의 귀족계급 사이에서조차 오랫동안 작은 부분으로 남게 되었다.
전쟁과 농업이 인구 대다수의 주요 직업이었다.
도시에는 소수의 기술공이 있었고 상업의 발전도 미미하나마 있었다.
그러나 서기전 289년까지 공화정 로마에 표준 화폐제도가 없었다는 사실은 로마에서 상업이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았음을 말해준다.
공화정 초기의 종교적 특징은 로마 역사 전 시기를 통해 유지되었다.
여러 면에서 그것은 그리스 종교를 닮았는데 이는 로마 종교가 그리스 종교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마의 주요 신들은 그리스 신들과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주피터 Jupiter는 하늘의 신으로서 제우스Zeus에 상응했고, 넵튠 Neptune은 바다의 신으로서 포세이돈 Poseidon에 상응했으며, 비너스 Venus는 사랑의 여신으로서 아프로디테 Aphrodite에 상응했다.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은 교리나 성사聖事(거룩한 일)를 갖고 있지 않았고 사후의 보상과 징벌을 크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종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하나는 로마 종교에는 조상 숭배가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가정을 지키는 신들 중에는 죽은 조상이 포함되었고, 그들에 대한 숭배가 가정의 지속적 번영을 보장해준다고 간주되었다.
또 다른 점은 로마 종교와 정치생활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는 고대 세계에서 언제나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거대한 가정으로 간주한 로마인은, 국가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신들이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베풀어줘야만 번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로마 국가는 사제단에게 사실상 정부기구 역할을 하도록, 즉 도시의 신들을 숭배하고 공공의식을 주관하며 신성한 전통의 수호자로서 봉사하도록 했다.
사제는 직업 종교가가 아니라 유력한 귀족이었다.
그들은 사제직을 돌아가면서 맡았고 동시에 로마 국가의 지도자로서 복무했다.
그들이 사제 겸 정치인으로서 맡은 이중 역할 때문에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에서보다도 공공 및 정치생활 구조에서 한층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되었다.
로마인은 신들이 가정과 도시에 번영·승리·풍작의 축복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로마인은 애국, 의무, 남자다운 자제심, 권위와 전통에 대한 존중 등을 도덕률로 강조했다.
로마인이 중요하게 생각한 미덕은 용기, 명예, 자제, 조국과 가정에 대한 충성 등이었다.
로마인의 일차적 의무는 자기 행동을 통해 조상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었지만, 로마인이 생각하는 가장 큰 명예는 로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공화정의 복리를 위해 시민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필요하다면 가족과 친구까지도 기꺼이 희생시킬 각오를 해야만 했다.
로마인은 군율을 위반한 자기 아들을 죽인 몇몇 집정관의 냉혹함을 깊은 경외심으로 우러러보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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