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6: 로마 제정 초기(서기전 27~서기 18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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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6: 로마 제정 초기(서기전 27~서기 180)

새샘 2023. 1. 13. 22:10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A%B0%EA%B5%AC%EC%8A%A4%ED%88%AC%EC%8A%A4)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언을 통해 외조카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서기전 63~서기 14)를 자신의 양자이자 제1상속자로 지명해놓고 있었다.
18세의 청년으로 아드리아 해 Adriatic Sea 건너편 일리리아 Illyria에서 카이사르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가 카이사르의 사망 소식을 접한 옥타비아누스는 급히 로마로 돌아와 상속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곧 카이사르의 막강한 두 친구인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 및 레피두스 Marcus Aemilius Lepidus와 힘을 합쳐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듬해 세 사람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정치 파벌을 소탕할 목적으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새로운 지도자들로서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반대파의 주모자들을 추적해 잡아 죽이고 재산은 몰수했다.
희생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였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 암살 모의에 가담한 적이 전혀 없었지만, 집정관 임기 중 안토니우스를 적대시하면서 그를 국가의 공적으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정작 암살 당사자인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와 카시우스 Gaius Cassius Longinus는 이탈리아를 빠져나가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기전 42년 필리피 Philippi 근방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반대파인 '공화정 지지파'가 사실상 분쇄되자 동맹 구성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긴장의 주요 원인은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질투 때문이었다.
그 후의 싸움은 동방과 서방의 대결이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으로 가서 클레오파트라 Cleopatra와 동맹을 맺었는데,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와의 권력 투쟁에서 이집트 왕국의 재원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이가 적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서유럽에서 세력을 확고히 했다.
그것은 위험을 무릅쓴 행동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동시에 퇴역 병사들의 재정착 문제를 함께 다루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인력을 제공했고, 그에게 로마의 보호자이자 안토니우스에 맞서는 로마 전통의 수호자 이미지를 구축할 기회를 부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교묘한 수완을 구사해, 안토니우스를 로마 여왕이 되고 싶어 하는 외국 여성 군주 클레오파트라의 손아귀에 잡힌 인물로 낙인찍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대결에서 그랬듯이, 승리는 또다시 서방으로 돌아갔다.
악티움 해전 Battle of Actium(서기전 31)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를 격파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후 곧 자살했다.
로마가 동방 세력에 의해 장악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이집트는 더 이상 독립 국가가 아니었고, 로마는 지중해 전역의 최고 지배자로 군림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정치 체계

 

악티움 해전의 승리는 로마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번영된 새로운 한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탈리아 주민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들은 10년 동안 내전을 치르면서 쓰라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동안 집정관으로 통치하다가 원로원으로부터 임페라토르 Imperator(황제)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았다.
역사가들은 이 단계를 로마 제국의 출발점으로 간주하지만, 이런 시대 구분은 다소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옥타비아누스는 호칭이 바뀌기 이전에도 이후와 마찬가지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에 '임페라토르'란 말은 '승리한 장군'을 의미할 뿐이었고, '아우구스투스'는 '덕망 있는' 또는 '존경받을 만한'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계승자들이 기존 호칭과 더불어 '황제 emperor'라는 칭호를 정식으로 채택하게 되면서, 점차 황제가 로마 국가 지배자의 일차적인 칭호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선호한 칭호는 좀 더 겸손한 '첫 번째 시민'이란 뜻의 프린켑스 princeps(원수元帥)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했던 시기를 원수정元帥政 시대 Principatus 또는 로마 제정 초기 Early Roman Empire(서기전 27~서기 180)라고 부름으로써 로마 공화정 시대 Roman Republic(서기전 500경~서기전 27), 3세기의 위기(서기 180~284), 전제정 시대 Dominatus 또는 로마 제정 말기 Later Roman Empire(284~610) 등의 다른 시대들과 구분하고 있다.

옥타비아누스오늘날에는 아우구스투스 Augustus로 불린다—(재위 서기전 27~서기 14)는 독재자로 보이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러므로 그는 대부분의 카이사르가 시행했던 공화정 제도를 그대로 두었다.
비록 공화정 제도가 독립적 권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됐지만 말이다.
이론적으론 원로원과 시민은 최고 권력으로 남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아우구스투스가 군대를 장악하고 정부 정책을 결정했다.
다행히 그는 유능한 지배자였다.

그는 제국 전역에 걸쳐 새로운 화폐제도를 시행했다.
로마 시에 경찰과 소방을 포함한 공공 기구를 도입했으며 군대를 재조직했다.
그는 도시와 속주에 과거보다 더 많은 실질적 자치권을 허용했다.
또한 그는 낡고 부패한 징세제도를 폐지했다.
징세관이 징수한 세금에 비례해 보상을 받는 종전의 제도가 독직과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대리인을 징세관으로 임명하고 일정한 봉급을 지급했으며 엄격한 감독 아래 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에 새로운 식민지들을 건설했고, 이탈리아의 잉여 자유민을 식민지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새로운 식민지들은 사회적·정치적 긴장의 주요 근원을 제거했고, 로마 심장부와 제국의 다른 광대한 지역들의 통합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전통 도덕의 엄격한 수호자로 자처했다.
그는 신전들을 재건하고 로마인의 이방신 숭배를 금지시켰다.
로마인의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결혼하지 않은 시민을 벌했고, 과부는 남편이 죽은 지 2년 내로 재혼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간통을 처벌하는 법을 도입하고 이혼을 어렵게 만들었다.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황실 가족을 가정의 미덕과 성도덕의 모범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선전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을 뿐이다.
황제 자신이 혼외정사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딸 율리아 Julia의 난잡한 성생활 때문에 그녀를 머나먼 섬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최대 영역(97~117년). 2세기에 이르러 로마는 지중해 연안을 벗어나 북부 및 중부 유럽까지 팽창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시대(재위 서기전 27~서기 14)부터 트라야누스 Traianus 시대(재위 98~117)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은 팽창에 팽창을 거듭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다른 어떤 지배자보다 많은 영토를 획득했다.
그가 파견한 장군들은 중부 유럽으로 진군해 오늘날의 스위스·오스트리아·불가리아 지방을 정복했다.
로마 군대는 지금이 중부 독일에서만 패배를 경험했고, 진로가 막히게 되자 아우구스투스는 라인 Rhine 강과 도나우 Danube 강을 로마의 북방 한계선으로 확정했다.
그 후 43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 Emperor Claudius(재위 41~54)는 브리튼 섬 Island of Britain(영국)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다음 세기인 2세기 초에는 트라야누스(재위 98~117)가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 Dacia(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을 로마 영토에 편입시켰다.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도 정복했지만 그 때문에 페르시아의 파르티아인 Parthians 지배자들의 적대감을 샀다.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 Hadrianus(재위 117~138)는 정복을 멈추고 브리튼 북부에서 방어정책—하드리아누스 성벽 Hadrian's Wall이 그 상징이다—에 착수했다.
바야흐로 호마 제국의 영토 팽창은 한계에 봉착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판도는 축소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재위 서기전 27~서기 14)가 40년의 지배를 마치고 서기 14년에 사망하자 그의 탁월한 정치적 실험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체제는 대단히 정교한 것이어서, 로마는 거의 2세기 동안 그의 개혁의 열매인 평화와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68년에 있었던 단기간의 내전을 제외하면 황제 사이의 권력 이양은 대체로 평화롭게 이루어졌고, 제국의 관료제는 타락한 황제가 등장한 시절에도 원활하게 작동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전제적 제국이 되었다는 것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유능한 인물들이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받았지만, 그 가운데 프린켑스 princeps(원수)의 진정한 권력을 감출 만큼 세련된 황제는 거의 없었다.
그의 계승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원로원의 엘리트 의원 대부분이 당대의 역사가였던 까닭에 많은 황제들은 공정치 못한 평가를 받았다.
티베리우스 Tiberius(재위 14~37)와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는 모두 유능한 행정가였지만 원로원과의 긴장관계 때문에 때로 극단적 조치를 취했고, 그 결과 엘리트들의 분노를 사곤 했다.
네로 Nero(재위 54~68)와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재위 81~96)는 원로원 귀족계급에게는 욕을 먹었지만 로마와 속주의 대중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다.
실제로 도미티아누스의 속주 정치개혁 및 원로원 특권 무시는 귀족계급의 적대감을 산 원인인 동시에 신민의 존경과 숭배를 촉발시킨 원인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절정은 96년부터 180년 사이였다.

이른바 '5명의 훌륭한 황제(5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네르바 Nerva(재위 96~98), 트라야누스 Traianus(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 Hadrianus(재위 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 Antoninus Pius(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재위 161~180)의 치세였다.
다섯 명의 황제 모두 유능한 행정가였고 아우구스투스의 계승자로서 손색이 없는 지배자임을 입증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독재정치를 펼치면서도 원로원을 존중하는 공화정 형태를 유지했다.
180년까지 5명의 황제 모두가 자기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아들을 두지 못했기에 황제 계승에 적합한 인물을 택해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오현제는 왕조 정치의 어려움—1세기의 원로원 역사가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 중 하나—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까지 그토록 광대한 영토를 성공적으로 통치했다는 것은 분명 로마의 최대 업적에 속하는 일이다.
서기전 27부터 서기 180년까지 200년 동안 로마의 외부에는 적대 세력이 거의 없었다.
지중해는 이제 단일 국가 즉 로마 제국 군사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로마 관리들은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페르시아 국경까지 지배했다.
동시대의 한 웅변가는 이렇게 자랑했다.

"문명 세계 전부가 낡고 짐스러운 무기를 내려놓았다.
마치 축제일 같았다. ··············
곳곳에 체육관, 연못, 기념물, 신전, 작업장, 학교 등이 들어섰다.
초기부터 병들어 있었던 문명 세계는 ·········이제야 바른 지식으로 건강한 상태를 회복했다."

 

○로마화化 Romanization


라틴어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Pax Romana(영어 Roman Peace)'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로마 군대는 브리튼에서 부디카 Boudicca 여왕의 반란이 일어나자 몇 만 명을 살해했다.
로마 속주들 가운데 가장 저항적이었던 유다 Judah에서, 로마 군대는 반란을 빌미로 70년에 예루살렘 Jerusalem 성전을 파괴했고, 135년에는 또 다른 반란을 빌미로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을 학살했으며, 생존자를 제국 전역에 뿔뿔이 흩어버렸다.
이 기간 동안 유다에서는 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같은 수의 사람이 노예가 되었다.
한편 예루살렘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의 이교 수도로 재건되었다.
그 후 500년 동안 유대인은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격렬한 반란은 유다에서조차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이 군대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는 해도 로마 제국은 결코 군대식으로 통치되지 않았다.
로마는 공통의 문화적·정치적 생활에 주민을 동화시킴으로써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지방의 신들은 로마의 신으로 편입되었고, 로마의 신들이 모셔진 판테온 Pantheon에 안치되었다.
많은 도시가 건설되었고 도시생활에 필요한 편의시설—공중목욕탕, 신전, 원형경기장, 수로, 포장도로 등—이 도입되었다.
시민권이 확대되었고 유능한 속주민은 로마의 고위 공직자로 출세할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같은 인물은 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제국의 변경지역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들은 편의상 제국의 국경선을 언급하긴 하지만 실제로 이 국경선은 대단히 유동적이어서 비교적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국경선보다는 '변경지역'이란 말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 그리고 이 변경지역에서 속주 로마인과 그 너머에 사는 비非로마인 사이에 긴밀한 문화적 상호작용이 일어났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로마의 영향력은 변경지역 너머까지, 즉 동쪽의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건너 독일 중심부와 고트족 거주지(폴란드)까지 파급되었다.

3세기에 변경 수비대가 제국의 내전에 투입되기 위해 철수했을 때, 수많은 로마화된 게르만족 Germanic과 고트족 Goths은 때로는 약탈자로서, 하지만 대개는 정주자이자 기대에 부푼 로마인으로서 제국으로 이동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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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