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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압구정" "목멱조돈" 본문

글과 그림

겸재 정선 "압구정" "목멱조돈"

새샘 2024. 4. 12. 13:52

<내가 보낸 시에 그대가 그림을 그려 서로 바꾸어보세>

 

(위)정선, 압구정, 경교명승첩(보물 제1950호), 1740~1741, 비단에 담채, 20.0x31.5cm. 간송미술관, (아래)정선, 목멱조돈, 경교명승첩(보물 제1950호), 1740~1741, 비단에 담채, 23.0x29.2cm, 간송미술관(출처-출처자료1)

 

조선시대에는 단짝으로 어울린 화가와 시인이 몇 쌍 있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1714~1759),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연객烟客 허필烟客(1709~1768)은 서로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이들은 한평생을 같이 살며 시와 그림으로 어울렸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가문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겸재보다 위에 있었지만 평생을 벗으로 지내며 서로의 예술에 대해 깊은 신뢰와 존경을 보냈다.

한산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정3품 삼척부사까지 올랐지만 그에게 관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천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무려 1만 3천여 수의 시를 남겼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졸기卒記(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는 자신의 평가를 쓴 글)가 실릴 정도의 명사였다.

 

겸재와 사천은 어린 시절 서울 청운동에 살면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생으로 만나 각기 시와 그림에서 대성하여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이라고 불렸다.

사천의 시는 남송의 애국 시인인 방옹放翁 육유陸游에 비교될 정도였으니 겸재의 진경산수와는 더없이 어울리는 짝이었다.

 

겸재와 사천은 신묘년(1711)과 임진년(1712) 두 차례에 걸쳐 금강산 유람을 함께 다녀오면서 그야말로 예술로 만났다.

천하의 명승을 두고 시인의 마음과 화가의 눈이 통하여 예술상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일찍이 소동파는 당나라 왕유의 시를 평하여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며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 中有詩"라 하였는데, 사천과 겸재는 각기 자신의 예술 속에 그런 경지를 담아냈다.

 

겸재와 사천이 시와 그림으로 만나는 아름다운 관계는 '시화상간첩詩畵相看帖'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겸재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잘 나타나 있다.

1740년 가을, 65세의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자 사천은 겸재를 임지로 보내면서 "시와 그림을 바꾸어보자"며 '시화상간詩畵相看'을 제의했다.

양천관아는 한강 건너편 양화진 바로 뒤쪽, 오늘날 강서구 가양동 겸재기념관 가까이에 있으니 그리 멀지 않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사천은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고 겸재와 약속했지. 기약대로 이제 시작하노니"라며 이렇게 노래했다.

 

   "내 시와 자네 그림을 바꿔봄세                           (아시군화환상간 我詩君畵換想看)

    경중을 어이 값 매기는 사이로 따지겠는가          (경중하언논가간 輕重何言論價間)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니   (시출간장화휘수 詩出肝腸畵揮手)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부지수이갱수난 不知誰易更誰難)"

 

약속한 대로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그 시에 겸재가 그림을 그려 꾸민 화첩이 ≪경교명승첩≫이다.

상하 2첩으로 모두 25폭인데 상권에 19폭, 하권에 6폭이 실려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상 20폭, 하 22폭으로 실려 있다.)

후대에 화첩의 장황粧䌙/裝潢(표장表裝: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꾸미어 만든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이 바뀌어 순서가 달라지고, 훗날 보완한 그림도 섞여 있어 원상을 그대로 복원하긴 힘드지만, 예쁜 시전지詩箋紙(화전지花箋紙: 시나 편지 따위를 쓰는 종이)에 사천이 쓴 시와 그에 맞춘 겸재의 그림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시인과 화가의 전설적인 만남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경교명승첩≫이란 이름은 '서울 교외의 명승'을 읊고 그린 시화첩이란 뜻으로 경교명승이란 다름 아니라 양천현을 중심으로 하여 한강 상류와 하류의 명승이다.

배를 타고 상류로 오르면 안산의 봉화[안현석봉鞍峴夕烽], 남산의 해돋이[목멱조돈木覓朝暾], 압구정狎鷗亭, 송파나루[송파진松坡津], 광나루[광진廣津], 미사리의 미호渼湖와 석실서원石室書院, 광주의 우천牛川, 쪽잣여울[독백탄獨栢灘], 높은여울[녹운탄綠雲灘] 등으로 이어진다.

하류로 내려오면 공암孔岩, 난지도를 그린 금성평사錦城平沙, 성산대교 앞의 양화진 나룻배[양화환도楊花喚渡], 행주산성[행주일도涬州一棹] 등이 펼쳐진다.

 

각 폭의 그림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한 필치가 없다.

때로는 진채眞彩(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를 사용했지만 능숙한 필치와 간일簡逸한(간략하면서도 뛰어난) 묘사로 재료상의 제약을 모두 극복했으며, 대부분 강변 풍경인 만큼 진경산수의 온화한 시정이 화면 가득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겸재의 남성적인 필치는 금강산에서 얻었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필치는 한강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압구정狎鷗亭>은 부감법俯瞰法(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본 모습처럼 그려낸 회화 기법)으로 잡아낸 한강변 풍광이 너무도 그윽하여 오늘의 모습을 생각하면 딱한 마음이 들 정도이고, <송파진松坡津>은 청록산수로 그렸는데도 고상한 문기文氣가 어려 있어 겸재의 원숙한 필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남산의 해돋이를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을 사랑한다.

화면 처리가 아주 단순하지만 조용함 속에 깃든 평온의 감정과 내면의 울림이 아주 긴 여운을 남긴다.

사천은 <목멱조돈>에 붙인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새벽녘 한강에 떠오르니         (서색부강한 曙色浮江漢)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고릉은조삼 觚稜隱釣參)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조조전위좌 朝朝轉危坐)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초일상종남 初日上終南)"

 

겸재는 70살 되는 1745년 1월 양천현령으로 만 5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때 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승을 자주 그린 듯 서예가 김충현이 소장했던 8폭 화첩을 비롯하여 한강변 진경산수가 많이 전하는데, 모두 그의 원숙한 노필을 느끼게 하는 명작들이다.

이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한강이 차지하는 비중은 금강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4. 1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