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일본의 자기모순적 역사관과 기원 찾기 본문
일본이 한국을 다른 나라와 다르게 대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지만 주변국에 대한 태도에 변함이 없는 독일과 비교해보면 일본의 태도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 서구 국가에는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피해 당사지인 한국과 중국에게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한다.
일본의 모순적인 태도 뒤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 사업이 있다.
일본은 자신들을 대륙에서 온 천손天孫민족으로 자처해왔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자신들의 '고향'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한국을 넘어 만주를 거쳐 중국까지 침략하면서 일본 민족의 북방기원설로 이를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기들의 고향인 동시에 열등한 식민통치의 대상으로 봤다.
지난 100여년에 얽힌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관은 이런 자기모순적 역사관의 산물이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배경인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세계 각국의 문화재를 약탈하던 시기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제국주의 고고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일본은 한국을 정식으로 침탈하기 훨씬 전인 1899년부터 한국의 문화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학자가 도쿄대학 교수이자 도리이 인류학 연구실을 세운 도리이 류조(조거용장鳥居龍藏)이다.
일본에서도 시골이었던 시코쿠(사국四国)의 도쿠시마현(덕도현徳島県) 출신인 그는 정규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음에도 도쿄대학 교수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일본 군국주의에 적극 부응한 데에 있다.
19세기 말부터 그는 청일전쟁의 전쟁터였던 랴오둥(요동遼東)반도를 비롯해 타이완(대만臺灣/台灣), 오키나와, 시베리아 Siberia까지 사방으로 무자비하게 진출하던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현지를 조사했다.
도리이는 각 지역의 원주민을 조사하여 열등한 집단과 우월한 집단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대륙을 건너온 일본인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
일본이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섬에서 벗어나 아시아 대륙 각지를 차지하는 데에 국민적 흥분이 고조되던 당시였기에 그의 자료는 크게 주목을 받았다.
도리이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1910년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마코토(재등실齋藤實) 총독을 만나 한국에서 일본 민족의 기원을 찾는 조사를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6년에 걸친 한반도 조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한국에서 주목한 것은 함경도 지역의 석기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 고인돌이었다.
함경도 지역의 석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미개한' 토착 한국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인돌에 주목한 이유는 반대로 미개한 토착 한국인들 사이에서 살았던 '위대한 일본인' 조상을 발견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도리이는 영국의 스톤헨지 Stonehenge와 비슷한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미개한 토착 한국인과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반도의 고인돌이 일본 규슈(구주九州) 일대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인돌을 추적하면 '위대한 일본인'의 루트를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리이의 생각에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갖고 있던 모순이 잘 드러난다.
원래 서구에서 식민지는 머나먼 아프리카나 근동 지역의, 문명개화가 아주 늦은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역사를 함께한 이웃이었고, 무엇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대륙의 선진문화가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왔다고 여겼다.
게다가 일본인은 스스로를 본토의 원주민들과는 다르며 대륙에서 건너온 우월한 도래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으니, 곧 한반도는 일본인의 기원지이기도 했다.
그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것은 피부 색깔이나 외모가 아예 다른 사람들이 사는, 멀리 떨어진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서양의 식민지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으로서는 이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합리화할지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도리이의 한반도 연구에 기반해 북한의 낙랑군과 남한의 임나일본부를 강조함으로써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토착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미개했는데, 북부는 서기전 108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중국 문명이 한반도를 개화시켰고, 남부는 4세기 후반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어 비로소 문명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야만 문명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일제의 강점을 합리화했다.
지금도 혐한 세력이 한국을 얼토당토않게 비하하는 논리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서 도리이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그를 학문적으로 평가하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일본 군국주의의 발흥을 최대한 활용한 군국주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탄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때 도리이는 '시베리아 출병은 인류학, 인종학 및 고고학에 대한 귀중한 기여다!'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이 한반도, 중국, 오키나와, 타이완, 몽골, 사할린 등을 침략했을 때 함께 다니며 현지인들의 역사와 민속 자료들을 가장 먼저 수집하는 혜택을 얻었다.
그가 다녔던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알려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표할 때마다 그 반향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도리이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그는 제국주의의 어용 인류학자로 낙인찍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륙의 꿈을 잊지 않겠다며 자신이 묻으면 고향 도쿠시마에 북방식 고인돌 무덤을 만들어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일본에서 한동안 금기시되었던 그의 이름은 198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부흥에 힘입어 그 영향력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부활했다.
일본에서는 심지어 그의 연구를 신격화해 '도리이학(조거학鳥居學)'이라고 부르며, 그를 따르는 연구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국내에도 도리이가 남긴 조사 자료를 높이 평가하며 분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물론 그가 남긴 사진과 여러 자료의 학술적인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웃 나라를 '미개인' '변방'으로 매도하여 제국주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점에 대한 엄중한 평가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가담한 학자가 어찌 도리이 한명뿐이겠는가!
아마 당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거의 일본 제국주의에 가담했을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그들이 처한 시대 상황상 어쩔 수 없었으며, 개인의 품성이나 학문적인 업적은 우수하다는 식으로 합리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한국과 만주에서 활동했던 모든 일본 어용학자들이 예외없이 가치중립을 내세웠음을 즉 제국주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주장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용학자들 바라보는 서양의 관점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도 서양에서는 학문 연구에 있어 나치에 부역했던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며, 그들의 이름은 오로지 비판을 위해서만 인용된다.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그 사람들의 개인적 능력이나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제국주의 고고학의 폐해는 그들이 성격 파탄자거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암묵적으로 따라가는 연구 경향이 결국 몇천 만명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금석병용기와 북방문화론
일제는 1920년대부터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와 중국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했다.
바로 '금석병용기'와 '북방문화론'이 등장한 것이다.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는 원래 유럽과 유라시아 고고학의 용어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존재했던 시기를 말한다.
말 그대로 쇠붙이와 돌을 함께 쓰던 과도기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일제는 이 용어를 한반도에 도입하면서 한국인은 제대로 된 청동기나 철기를 쓰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는 의미로 곡해해서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석기-청동기-철기로 이어지는 발전 단계 없이, 한반도의 바닷가에는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 문화에 머문 사람들이 살았으며, 내륙의 산과 평야에는 청동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장식용으로 일부 사용한 민무늬토기 문화에 머문 사람들이 문명을 이루지 못한 채 동시에 살았다는 뜻이 된다.
석기시대에 뜬금없이 중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철과 청동을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금석병용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금석병용기설을 두고 일본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찾아보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은 다분히 고의적이다.
일제의 고고학자들도 이미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서로 다른 시대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른 아닌 일본 내의 고고학 자료가 이를 증명한다.
1920년대에 일본 고고학자들은 일본 고대사에 대해 신석기시대인 조몬(승문縄文)시대가 먼저 있었고, 그다음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한반도 도래인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청동기시대인 야요이(미생弥生/彌生)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청동기시대의 기원인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가 한데 섞여 나온다는 주장은 한반도를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렇듯 일제가 짜놓은 금석병용기 틀은 해방 이후에도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30여년 동안 영향을 끼쳐, 한국 문화의 자체적인 발전을 부정하는 타율성과 정체성론의 기반이 되었으니 그 폐해가 적지 않다.
한반도의 고대문화가 동아시아의 북방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북방문화론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처음 제기했다.
일본인의 기원을 한반도를 넘어서 북방 만주 지역까지 넓히기 위함이었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1920년대부터 노골화된 일본의 만주와 중국 침략 정책이 있다.
자신들이 침략해야 할 만주, 몽골, 시베리아 같은 미지의 땅이 일본인의 기원지라는 주장을 역사적인 복선으로 깔아 일본의 대륙 침략이 자신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것이라는 억지 논리를 만든 것이다.
북방문화론도 일본 패망 후까지 이어져 북방 유라시아의 우월한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일본열도로 내려와 고훈(고분古墳)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마민족설로 자리매김했다.
정작 일본의 현지인은 미개하다고 치부하고 '위대한 일본인' 조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일부 우리가 가진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는 원래 우리의 영토'였다며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떠도는데,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하던 침략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고대에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했던 사실을 현대 국가의 영토로 치환시켜 논하는 것은 오히려 고대 한국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일본 군국주의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일본의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합리화
일본의 한국 경제제재로 한일 갈등이 노골화되던 2019년 8월, 일본 기업 DHC의 회장이 자사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일본인의 조상은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유럽인'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이 뉴스가 한국의 반일감정 고조와 맞물려 국내에서도 크게 이슈가 됐다.
일부 일본인들의 주장이긴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래 북방기원설과 유럽기원설을 외치던 100여년 전의 환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니 참으로 믿기 어려웠다.
굳이 시베리아에 사는 서양 계통의 사람들을 찾는다면 유럽이 아니라 위구르나 튀르크 계통이라고 보는 게 맞는다.
물론 그런 배경을 알고 있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그저 '한국도 싫고 중국도 싫다, 우리 일본인은 너희들과 다르다'라는 일본인의 유치한 생떼일 뿐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기원지'를 끊임없이 바꾸어왔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의 대륙문화를 자신들의 기원으로 보았다.
그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자 곧바로 기원지를 북방 지역으로 바꿨다.
더 나아가 메이지유신에 성공하고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면서는 공공연히 유대인의 자손 또는 서양인의 자손이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이 서양인 후예설을 만들기 위해 꾀나 구체적으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 변천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초상화에 가필을 해 천황을 서양인처럼 묘사했다.
심지어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인 Ainu들도 서양인 계통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유럽 출신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아이누인 자체는 일본의 남쪽에서 살다가 북쪽으로 올라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태평양 연안의 원주민 외모에 더 가깝다.
일본인의 자기 기원에 대한 인식은 '기원지'와 '식민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들이 배워야 할 문화는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일본인의 기원지로 떠받든다.
그러다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순간부터 기원지로 떠받들던 지역은 '미개하고 열등한 사람들의 땅'으로 둔갑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의 기원지가 수도 없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 주장이 얼마나 비루鄙陋(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러움)한지를 말해줄 뿐이다.
물론 기원지 주장이 학문적인 수준에서 논의되거나 증명된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근거 없는 주장이 마치 사실인양 반복되고 있다.
일본이 지금도 공공연히 자행하는 주변 국가를 향한 거침없는 편견과 멸시, 그리고 일본에서 비정상적으로 유행하는 혐한 서적이나 혐중 서적 현상은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그릇된 역사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의 자기모순적 역사관은 15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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