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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고고학자의 시행착오와 해프닝 본문
"비판 받기 싫다면 아무 짓 하지 말고, 아무 말도 마시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시길."
-앨버트 허버드 Elbert Hubbard-
○꿈속의 방상시
1945년 해방된 조국의 혼란스러움은 고고학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유물 발굴에 한국인 고고학자의 참여를 거의 허락하지 않았고, 고고학자를 양성하지도 않았다.
그들만의 식민지 발굴을 영원히 지속할 줄 알았겠지만, 일본은 갑자기 패망했다.
이에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고고학자들은 짐을 싸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빈 몸으로 부산으로 향했다.
유물은 한국인들에게 남겨졌다.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도유호都宥浩 박사는 북한에서 소련이 주둔했던 북한의 문화재를 담당했고, 남한에서는 독일 고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김재원金載元 박사가 국립박물관을 담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에서는 발굴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김재원 박사도 유럽에서 유학을 했지만 발굴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이에 미군정에 부탁을 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근무하며 한국 고고학 발굴을 담당하다가 일본으로 귀환을 준비하던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유광교일有光敎一)를 1년 동안 한국에 머무르게 하고 발굴 및 관련 업무를 배우기로 했다.
1946년 4월에 드디어 남한 최초의 고고학 발굴단이 조직되어서 경주로 출발했다.
발굴 관련 장비는 미군트럭을 얻어서 서갑록이라는 국립박물관 직원과 함께 미리 출발했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가던 트럭은 대구에서 고장이 났고, 고생 끝에 간신히 경주에 도착했다.
트럭이 오는 사이 경부선 기차로 따로 출발한 발굴단은 최초의 발굴지를 어디로 할까 골랐고, 아리미쓰는 자기가 봐둔 곳이 있다며 반쯤 무너진 고분을 지정했다.
그 고분의 정식 이름은 노서동 140호분이다(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신라 고분을 조사해서 각 행정구역별로 일련의 이름을 붙였다).
아리미쓰는 1932년에 경주를 조사하던 당시 주변 민가 때문에 많이 파괴된 이 고분을 눈여겨 보았고, 발굴 실습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발굴을 시작할 때 스님을 모셔와 독경을 하고 개토제開土祭(무덤 안의 사람과 땅의 신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발굴을 시작할 때 지내는 의식. 지금도 발굴을 시작할 때 발굴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개토제를 지내는 경우가 꽤 많다)를 지냈는데, 당시 유별난 구경거리로 경주의 시민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서 발굴장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되었다.
그렇게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분 발굴지에서는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다.
이에 청동그릇에 새겨진 16개 글자로 된 명문銘文 가운데 청동그릇의 이름인 '호우壺杆'(호 모양을 한 물그릇 또는 국그릇이란 뜻)를 따서 이 고분을 호우총壺杆塚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명문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에 따르면 이 청동그릇은 광개토왕의 사후 2년인 을묘년(415년)에 만든 기념 그릇 중 10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신라는 밀려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왕의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호우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유물로 증명된 것이다.
사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나온 예는 그때가 유일했으니, 이 호우총은 비록 일본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호우총에서는 호우 말고도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장 김재원 박사는 한 유물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무에 옷칠을 한 물건인데 두 눈을 부라리듯 험상궂은 도깨비의 형상을 한 유물이었다.
김재원 박사는 기괴한 이 유물을 발굴하는 순간 방상시方相氏를 떠올렸다고 한다.
원래 방상시는 중국이 신 가운데 하나로, 황금으로 만든 4개의 눈이 달린 가면을 쓰고 몸에 가죽을 두른 호위무사로 표현된다.
문이나 입구에서 나쁜 귀신을 돌려보내는 일종의 보디가드인 셈이다.
김재원 박사는 이 방상시가 무덤의 도굴을 막기 위한 일종의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이집트 투탕카멘 Tutankhamun(King Tut)의 무덤이 발굴되면서 소위 '미라의 저주' 소문이 돌았고, 고대 무덤을 잘못 발굴하면 화를 입는다는 믿음이 꽤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김재원 박사는 생전에 악몽을 꿀 때면 여지없이 그 방상시가 나타났다고 하니, 그때의 충격이 무척이나 컸던 모양이다.
최근 그 방상시 유물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방상시 유물은 화살통 장식으로 밝혀졌다.
고대 전사들이 등에 매고 다니는 가장 큰 전쟁도구였고, 거기에 위엄이 서리도록 밑부분에 눈을 부라리는 모습을 넣었던 것이다.
도굴을 방지하려는 도깨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주인이 바뀐 무덤
1991년 1월, 파주 서곡리에 있는 조선 개국공신 한상질의 묘가 도굴되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돌무덤이기 때문에 비교적 도굴이 쉽다.
게다가 인적이 드문 민통선 안에 위치했기 때문에 도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상질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킨 뒤 명나라로 가서 '조선'이란 이름을 받아온 사람으로 유명하다.
무덤이 파헤쳐진 뒤 청주 한씨 문열공파에서는 한상질의 무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나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내부의 돌무덤 벽에 형형색색의 색깔로 벽화가 그려진 것이 확인되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무덤에 네 벽에는 인물상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고, 천장 뚜껑돌에는 별자리가 그려진 것도 있었다.
무덤의 도굴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남한 최초로 고려~조선시대 초기의 벽화가 발견된 일이기도 했다.
무덤의 남쪽 1미터 정도 되는 땅속에서는 4개의 조각으로 깨진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그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날짜를 적어놓은 것이었는데,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 묘지석에 쓰인 무덤의 주인공이 한상질이 아니라 한상질의 외증조부인 고려 시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권준이었던 것이다.
무덤 안에 남은 유물들도 권준이 죽은 1352년에 부합하는 청자와 동전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대법원은 고고학 발굴 결과의 과학성을 인정하고, 무덤의 관리권을 청주 한씨에서 안동 권씨의 관할로 최종 판결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걸까.
이는 고려 말기 권준의 손자인 권용과 증손자인 권진이 연루된 역모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증손자 권진은 공민왕의 자제위子弟衛(고려 공민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 원나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궁중에 설치한 젊은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주된 임무는 공민왕을 보위하는 것)였는데, 그 당시 다른 자제위인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했다.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권진도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하여 권진과 그의 아버지 권용마저도 처형시켰다.
멸족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당연히 권준의 무덤을 지키면서 제대로 된 제사를 지내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안동 권씨와 사돈지간이었던 청주 한씨 집안에서 권준의 무덤을 대신 지키게 되었다.
한상질의 어머니가 바로 권준의 손녀였다.
멸문의 위기에 있었던 상황에서 외가 쪽에서 대신 제사를 잇는 것은 조선 전기에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권준 못지않은 명문가 자제였던 한상질은 권준의 무덤을 관리하고 제사를 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한상질의 무덤은 권준 무덤의 위에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권준의 무덤이 한상질의 무덤 옆에 물건을 묻었던 껴묻기묘(부장묘副葬墓)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껴묻기묘라는 소문이 났으니, 그 안에 각종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도굴꾼들이 실제 한상질의 무덤 대신에 그 밑에 있는 권준의 무덤을 집중적으로 도굴했던 것이다.
○우연히 발견된 나라
고고학은 역사 기록에 보이지 않는 여러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주기도 한다.
2014년 8월, 중국 베이징(북경北京)의 수도首都박물관에서 <연나라 공주가 바라본 패국>이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2007년 5월 산시(산서山西)성 린펀(임분临汾/臨汾)시에서 발굴된 3000년 전 서주西周시대 귀족 무덤의 유물이 소개되었다.
사실 중국에서 서주시대 청동기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무덤이나 구덩이는 너무 흔하다.
그런데 이렇게 베이징을 대표하는 수도박물관에서 대형 전시회를 한 이유는 발견된 청동기가 그 전에서 전혀 몰랐던 '패국覇國'이라는 나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역사 기록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중국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완전히 잊혀진 나라가 발견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나무 죽간 조각이나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등 세계에서 기록이 가장 많은 곳이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의 주나라 시대에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는 믿기 어려운 발견에 고고학자들은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패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했고, 그 왕의 성은 괴['계집 녀女 변'에 '귀신 귀鬼'가 붙는 '부끄러울 괴(인터넷에서 이 한자를 찾을 수 없었음)'로서 '부끄러울 괴愧'와 같은 글자]이며, 패백覇伯이라고 불렸음이 밝혀졌다.
또 다른 청동기에서는 그 왕의 동생인 패중覇中/覇仲의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무덤의 규모가 당시 중국에서도 최고 제후급이었기에 그 나라의 규모 또한 컸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놀라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연나라 제후가 공주에게 하사한 그릇'이라는 글자가 청동기에 새겨진 것이 발견된 것이다.
베이징 근처의 연나라 공주가 패국의 제후에게 시집오면서 가져온 청동기였다.
700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나라가 서로 혼인의 교를 할 정도로 패국의 세력은 컸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패국의 존재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을까.
사료가 유실되었을 것이라는 가장 편하고 무책임한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이 정도 유물을 껴묻기할 정도의 나라라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은 쉽지 않다.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설은 주나라가 처음 봉건제를 시행했을 때에 패국이 등장했지만, 곧바로 스스로 이름을 바꾸거나 그 봉건제에서 탈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패국이 있던 산시성 린펀시 일대는 중국이 오랑캐로 치부했던 적인狄人 또는 귀인鬼人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어쩌면 이들은 오랑캐가 연상되는 패국이라는 이름을 다르게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패국은 다른 이름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는 아직 추측일 뿐이다.
패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는 앞으로 고고학 발굴이 더 이루어져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고학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밝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의 목적은 역사 기록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물이 주는 여러 가지 창의적인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전시품 안에 있는 유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고고학에서는 하나의 유물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또한 새로운 유물은 계속 발견되고 그에 대한 해석 역시 계속 바뀐다.
이렇듯 고고학에는 정답이 없다.
고고학은 매일 바뀌어가는 일상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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