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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5: 문학과 예술, 14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5: 문학과 예술, 14장 결론
새샘 2025. 1. 14. 17:13회의懷疑 scepticism(의심을 품음)와 인간 지식의 불확실성은 철의 세기 Iron Century(1540~1660)에 서유럽이 낳은 수많은 문학, 예술의 주요 주제였다.
물론 그 시대의 모든 시, 희곡, 회화 등이 모두 같은 메시지 message를 전한 것은 아니다.
비범한 문학적·예술적 창조성을 보였던 120년 동안, 천박한 익살극에서 암울한 비극에 이르기까지, 평온한 정적인 삶에서 지극히 격렬한 종교적 순교 장면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실로 온갖 장르 genre(문예 양식의 갈래)와 경향의 작품이 산출되었다.
그 시기의 위대한 작가와 화가는 인간 존재의 양면성과 아이러니 irony—몽테뉴 Montaigne와 파스칼 Pascal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했다—의 실상을 깨닫고 이에 고무되었다.
그들 모두는 당대에 만연했던 전쟁의 공포와 인간의 고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잔인하기 그지없는 세계 속에 붙잡혀 있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비극적 균형으로부터 서유럽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 산출되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1547~1616)의 걸작이자 풍자 로망스 romance(로맨스, 낭만浪漫: 원래 '로마적인 것 romantic things'을 뜻했으나 지금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사랑과 관련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이라는 뜻으로 사용)인 ≪돈키호테 Don Quixote≫는 에스파냐 España 젠틀맨 gentleman(신사紳士)인 라만차의 돈키호테 don Quijote de La Mancha의 모험을 서술한다.
돈키호테는 기사 무용담을 하도 많이 읽어서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되었다.
그의 정신은 온갖 환상적인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이 오십에 기사 수업 편력을 떠난 그는, 풍차를 무시무시한 거인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양떼를 이교도의 군대로 혼동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창으로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는 왜곡된 환상에 사로잡혀 여인숙을 성城으로 잘못 보고 화덕 옆에서 일하는 하녀를 우아한 귀부인으로 착각해 사랑에 빠진다.
기사 편력자 돈키호테와 대조적인 인물은 그의 충직한 종자 산초 판사 Sancho Panza(배불뚝이 산초)다.
산초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실제적인 인간을 대변한다.
그는 먹고 마시고 자는 것과 같은 소박하고도 실질적인 즐거움에 만족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산초 판사의 현실주의가 그의 주인인 돈키호테의 '몽상적인' 이상주의보다 바람직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인물은 인간 본성의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
≪돈키호테≫는 일찍이 에스파냐의 쇠퇴를 가속시킨 바 있는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정신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소설의 주인공, 즉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던 라만차의 돈키호테에게 공감을 느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시대의 희곡
에스파냐 무적함대에 대한 잉글랜드 England의 승리 이후 국민적 자부심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저술활동을 한 이른바 잉글랜드 르네상스 시대의 희곡 작가들은 경박한 낙관론에 함몰되는 일 없이 대단히 풍요롭고 생기 넘치는 작품들을 남겼다.
이들의 대표작에는 성찰적 진지함이 가득 차 있다.
'살갗 밑의 해골을 보았던' 비극 작가 존 웹스터 John Webster(1580?~1634?)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은 병적인 비관론자였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시대(재위 1558~1603)와 스코틀랜드 Scotland의 제임스 1세 시대(재위 1567~1625)의 위대한 희곡작가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은 크리스토퍼 말로위 Christopher Marlowe(1564~1593), 벤 존슨 Benjamin Jonson(1572~1637),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1564~1616) 등이었다.
세 사람 가운데서 30세가 되기도 전에 선술집에서의 말다툼 끝에 생을 마감한 열정적이 말로위가 당대에는 가장 인기가 높았다.
≪탬버린≫과 ≪파우스투스 박사≫ 등의 희곡에서 말로위는 인간보다 몸집이 큰 거인들을 창조했다.
그 거인들은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정복하고 가능한 모든 감동을 느끼고자 했으며, 또 그것에 거의 근접했다.
그러나 결국 그 거인들은 불행한 종말을 맞고 만다.
왜냐하면 말로위가 볼 때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운명에는 위대함뿐만 아니라 비참함도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우스투스 Faustus가 사탄 Satan의 주술로 환생한 트로이의 헬레네 Helen(고대 그리스어 Helénē) of Troy에게 '불멸의 키스 Immortal with a Kiss'를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결국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
불멸이란 악마가 주는 것도 아니고 현세의 키스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적인 비극 작가 말로위와는 대조적으로 벤 존슨은 인간의 사악함과 결점을 폭로하는 신랄한 희극을 썼다.
특히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볼포네 Volpone≫(이탈리아어로 '교활한 여우'라는 뜻)에서 존슨은 기만적이고 탐욕스런 동물처럼 처신하는 사람들을 그렸지만, 후기의 ≪연금술사≫에서는 부자에게서 영악스럽게 이득을 취하는 재치 있는 하층계급에 갈채를 보냄으로써 기만과 경신輕信(깊이 생각하지 않고 쉽게 믿음)에 대한 초기의 공격과 균형을 이루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희곡 작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또는 스트랫퍼드 Stratford)이라는 지방 도시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약간의 교육을 받고 20세 때 고향을 떠나 런던 London으로 흘러들어가 극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 배우가 되고 그 후 어떻게 희곡 작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28세에 이르러 경쟁자들이 시기할 정도로 작가적 명성을 얻었음은 분명하다.
1610년 무렵 여생을 편히 지내고자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약 40편에 달하는 희곡, 150편 이상의 소네트 sonnet(14행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서양 시가), 두 편의 장편 이야기 시를 썼다.
셰익스피어가 죽은 뒤 그의 희곡은 영어권 전역에서 세속적 성경이 되었다.
그 이유는 작가의 비할 데 없는 천부적 표현 능력과 번뜩이는 기지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열정에 사로잡히고 운명에 부대끼며 고통을 겪는 인간 성격에 대한 심오한 분석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주제별로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초기 작품들의 특징은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어리석을지라도 세계는 근본적으로 질서 있고 정의롭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튜더 왕조 Tudor Dynasty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의 투쟁과 영광을 서술한 다수의 사극이 있다.
서정적이면서도 로맨틱한 비극인 ≪로미와와 줄리엣≫, 마법과도 같은 ≪한여름 밤의 꿈≫, ≪십이야≫, ≪뜻대로 하세요≫, ≪헛소동≫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이란 희곡 제목은 야릇한 뉘앙스 nuance(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나 인상)를 풍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초기의 가장 가벼운 희곡 작품마저도 결코 헛소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 대부분의 작품은 명예와 야망, 사랑과 우정 등 인간의 심리적 정체성에 관련된 근본 문제를 탐구했다.
≪뜻대로 하세요≫처럼 심오한 측면을 지닌 작품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작중 인물을 통해 이렇게 성찰한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인생 7막을 거쳐 가는 연기자일 뿐이다."
두 번째 시기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슬픔, 연민, 인간 존재의 신비에 대한 고통스러운 탐색 등이 주조를 이루면서 분위기가 한층 더 어두워진다.
≪햄릿≫으로 대표되는 우유부단한 이상주의자의 비극에서 시작해 ≪자(척尺)에는 자로 Measure for Measure≫와 ≪끝이 좋으면 다 좋아≫의 냉소주의로 이어지며, ≪맥베스≫와 ≪리어 왕≫ 같은 혹독한 비극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작품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이렇게 절규한다.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이다.······ 무의미한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백치의 이야기일 뿐이다."
"개구쟁이 아이 앞에 놓인 파리 꼴이라니 신들 앞에 놓인 우리가 그렇구나. 그들은 심심풀이로 우리를 죽이는도다."
그러나 이 모든 음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두 번째 시기 희곡들에서 작가의 '시적인 장엄함이 솟구쳐 날아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작가로서의 세 번째 시기를 화해와 평화의 심원한 정신으로 마감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 집필한 세 편의 희곡(모두 목가적인 로망스다) 가운데 최후의 작품인 ≪템페스트≫는 인간의 본성과 예술의 힘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에전의 적의는 묻혀버리고 그릇된 것은 자연적·초자연적 수단이 결합해 바로잡는다.
순진하고 젊은 여주인공은 한꺼번에 많은 남자들을 처음 보고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한다.
"오 찬란한 신세계여,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니!"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겪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종국에는 쓰라리기만 한 것은 아니며, 우주의 신성한 계획은 궁극적으로 자비롭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셰익스피오보다 다예다재하지는 않았지만 웅변적인 장엄함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 청교도 시인 존 밀턴 John Milton(1608~1674)이다.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1599~1658) 체제 아래 대표적 정치평론가였던 밀턴은 당대의 사건에서 청교도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여러 편의 논설을 썼고 찰스 1세 Charles I(재위 1625~1649)의 처형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글도 썼다.
그러나 그는 성경만큼이나 그리스 Greece 및 라틴 Latin 고전을 애호했다.
그는 순수한 고전적 시각에서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리시다스 Lycidas≫라는 완벽한 목가적 애가를 썼다.
그 후 찰스 2세 Charles II(재위 1660~1685)의 즉위와 더불어 물러나 은둔하던 시절,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밀턴은 <창세기>의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고전적 서사시 ≪실락원失樂園, Paradise Lost≫의 집필에 착수했다.
'인간에 대한 신의 섭리를 정당화'한 서사시 ≪실락원≫에서 밀턴은 대담하고 교활하게 신에 도전하는, 사탄이라는 강력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 character(작품 내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개성과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처음에는 '악마의 옹호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탄은 결국 ≪실락원≫의 진정한 '서사시적 영웅'인 아담 Adam에게 압도당한다.
인간이 지닌 도덕적 책무와 고난의 운명을 받다들인 아담은 결국 이브 Eve와 함께 낙원을 떠나 '온통 그들 앞에 전개된' 세계로 나아간다.
○매너리즘
인간 존재에 내재된 역설과 긴장은 소란스러운 세기에 활동했던 수많은 불멸의 거장 화가들에 의해 장엄하고 심원하게 묘사되었다.
이 시기 전반기인 154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이탈리아 Italia, 에스파냐 España 회화의 목표는 특수 효과로 관람객을 매혹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달성되었는데, 혼란스럽긴 하지만 때로 두 가지 양식을 모두 매너리즘 Mannerism(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이라 부르곤 한다.
첫 번째 방식은 애당초 르네상스(문예부흥) Renaissance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 Raffaello(1483~1520)의 스타일에 기초한 것이지만, 라파엘로의 단아함에서 자의식이 고양된 우아함—현란하고 초현실적이기까지 한—으로 옮아갔다.
이런 접근법의 대표 화가는 피렌체 화가 폰토르모 Pontormo(1494~1557)와 브론치노 Bronzino(1503~1572)였다.
선예도線銳度 sharpness(농도가 서로 다른 부분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정도) 높은 그들의 초상화는 평면적이고 차갑지만 황홀하다.
그들과 반대쪽에 선 화가들은 다른 양식은 전통적 의미에서 연극적인—지극히 드라마틱하고 정서적 호소력이 있는— 노선을 걸었다.
이 접근법을 따르는 화가들은 본래 미켈란젤로 Michelangelo(1475~1564)의 영향을 받았지만 암부暗部 shadows(어두운 부분) 콘트라스트 contrast(명암대비明暗對比), 역동성, 왜곡 등에서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다.
두 번째 집단의 대표적인 화가는 베네치아 Venezia 화가 틴토레토 Tintoretto(1518~1594)와 에스파냐 화가 엘 그레코 El Greco(1541~1614)였다.
미켈란젤로 양식의 특징에 색감이 풍부한 전통적인 베네치아 취향을 결합시킨 틴토레토는 수많은 기념비적인 대형 그림—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다—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고요히 뿜어내는 어렴풋한 빛과 시선을 사로잡는 극적인 장면 등으로 지금도 보는 이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틴토레토의 작품보다 한층 더 감성적이었다.
원래 그리스 사람으로 본명이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Domenikos Theotokopoulos인 엘 그레코는 비범한 화가로서 그리스의 크레타 섬 Crete Island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에서 그리스-비잔티움 성상聖像 회화(성스러운 형상이나 이미지를 그린 그림)의 특징인 늘이기 기법을 습득하고서 이탈리아로 건너가 틴토레토의 색감과 극적 효과를 체득했다.
엘 그레코는 최종적으로 에스파냐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에스파냐어로 '그리스인'이란 뜻의 '엘 그레코'란 이름으로 불렸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너무도 기괴해서 당대에는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날에 보아도 그의 그림은 너무도 불안정해 마치 정신이상자의 작품 같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엘 그레코의 가톨릭 신비주의에 대한 심오한 열정과 그가 성취한 기법을 간과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으로는 이상화된 풍경화인 <톨레도 풍경 View of Toledo>이 있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가운데 음산하면서도 위엄 있는 빛이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풍경이다.
이 그림에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는, 소용돌이치는 종교적 풍경화와 수많은 훌륭한 초상화들—금욕주의와 영적 통찰력이 절묘하게 뒤섞인 깡마르고 근엄한 표정의 에스파냐인들을 보여준다—이 있다.
○바로크 예술과 건축
1600년 무렵부터 1700년대 초까지 남부 유럽의 주도적 예술 유파는 바로크 양식 Baroque이었다.
이 유파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및 조각 분야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바로크 양식에는 드라마틱하고 불규칙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기괴하거나 지나치게 흥분돼 보이는 것을 피했고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감각을 심어주고자 했다.
로마 Roma(영어 Rome)에서 출발해 반종교개혁 교황청과 예수회의 이상을 표현한 바로크 건축은 가톨릭 세계관의 선전을 목표로 했다.
바로크 회화 역시 반종교개혁에 기여했다.
가톨릭교회는 반종교개혁의 절정기였던 1620년 무렵 도처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반종교개혁의 이상에 동조하지 않은 바로크 화가들은 대부분 자기 영광을 드높이려고 했던 군주들을 위해 봉사했다.
로마 바로크 양식에서 가장 상상력 풍부하고 영향력이 컸던 인물은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1598~1680)였다.
교황의 부름을 자주 받은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영어 Saint Peter's Basilica)에 이르는 빽빽이 늘어선 열주列柱(줄기둥: 줄지어 늘어선 기둥)에서 교황의 권위를 장엄하게 표현했다.
베네치아의 팔라디오 Palladio(1508~1580)의 평온한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결별한 베르니니의 건축은, 기둥과 돔 dome(반구형 지붕) 등에서는 고전적 요소들을 계승했지만, 그 요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시켜 과감한 활동성과 거대한 힘을 함께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베르니니는 교회의 정면을 '입체적으로' 건축하는—즉, 건물 정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각도로 불룩하게 돌출시켜 앞쪽 허공으로 솟구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실험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런 혁신은 관람자의 정서를 예술 작품 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베르니니가 조각 작품에서 추구한 목적도 동일한 것이었다.
베르니니는 헬레니즘 Hellenism 시대 조각의 역동적 동작—특히 <라오콘 군상 Statue of Laocoön Group 또는 Laocoön and His Sons>—을 재현하는 동시에 미켈란젤로의 후기 조각에서 나타났던 경향을 받아들여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조각은 극적 효과를 강조하는 가운데 관람자로 하여금 조용히 관조하기보다 작품에 대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고무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들 대부분은 베르니니 같은 예술적 천재성을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남유럽 바로크 회화의 위대한 걸작을 보기 위해서는 에스파냐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작품에 눈을 돌려야 한다.
에스파냐가 몰락하기 직전 마드리드 Madrid에서 궁정화가로 일했던 벨라스케스는 베르니니와는 달리 바로크 양식의 전형적인 예술가는 아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은 바로크 양식 특유의 쾌활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의 최고의 걸작은 절제된 사색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 양식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유명한 <브레다에서의 항복 The Surrender of Breda>은 한편으로는 근육질의 말과 에스파냐 대공의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패배당한 채 대열이 흐트러진 군대에 대한 비非바로크적인 동정심을 보여주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최대 걸작—에스파냐 몰락 이후인 1656년 무렵 완성되었다—인 <지조 있는 시녀들>은 환상과 현실에 대한 가장 사려 깊고 면밀한 예술적 분석으로 꼽힌다.
○황금시대 네덜란드의 회화
남부 유럽의 예술적 영광에 맞선 북부 유럽의 경쟁자는 네덜란드 Netherlands였다.
그곳에서는 대단히 이질적인 세 명의 화가가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이란 주제를 철저히 탐구했다.
그중 첫 번째 화가는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hel(1525?~1569)이다.
그는 네덜란드 초기 사실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러나 조용한 도시 풍경을 선호했던 선배 화가들과 달리 브뢰헬은 농민의 분주하면서도 거친 삶을 즐겨 묘사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흥겨운 <농민의 결혼식>과 <농민 결혼식의 무도회>, 드넓은 화폭의 <추수하는 사람들>—농민이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힘든 노동 끝에 얻어진 응분의 보상으로 휴식을 취하며 게걸스럽게 술 마시고 코 고는 모습을 그렸다—이 있다.
이런 풍경은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생명의 리듬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브뢰헬은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칼뱅주의자 Calvinist의 폭동과 에스파냐의 탄압에서 나타난 종교적 불관용과 유혈 사태에 염증을 느꼈고, 이에 대해 억제되면서도 도발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통해 비판적 입장을 표현했다.
예를 들면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에서는 무지한 광신도가 서로에게 길을 안내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보다 더욱 강렬한 것은 브뢰헬의 <죄 없는 자들의 대학살>이다.
이 작품은 마치 저 멀리 눈 속에 파묻힌 플랑드르 Flandre(영어 플랜더즈 Flanders) 마을의 고즈넉한 정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자비한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농민의 주택에 난입해 갓난아기를 살해하고, 소박한 농민이 병사들의 처분에 목숨을 내맡기는 광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화가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가톨릭 Catholic(가톨릭교도)과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개신교도)가 다 같이 망각하고 있는 복음서의 한 구절을 암시하며 그리스도 Christ 탄생 직후에 있었던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브뢰헬과 매우 다른 화풍을 지닌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1577~1640)였다.
바로크 양식은 매너리즘과는 달리 반종교개혁의 확산과 긴밀하게 연결된 국제적 운동이었으므로, 오랜 전쟁이 끝난 뒤 에스파냐가 장악했던 네덜란드의 바로 그 지역에서 바로크 양식이 지극히 훌륭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안트베르펜 Antwerpen(영어 앤트워프 Antwerp)의 루벤스는 마드리드의 벨라스케스 이상으로 전형적인 바로크 예술가였다.
그는 수천 점에 달하는 활력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부흥된 가톨릭의 영광을 드높이거나, 하급 귀족의 모습을 곰 가죽을 걸친 서사시의 영웅처럼 묘사했다.
루벤스는 노골적인 선동을 의도하지 않을 때에도 습관적으로 바로크 수법을 현란할 정도로 과도하게 구사했다.
그래선지 그는 오늘날 분홍빛의 풍만한 육체를 묘사한 누드화들로 유명하다.
그러나 수준 낮은 다른 바로크 예술가들과 달리 루벤스는 결코 정묘함을 결여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분위기를 표현한 화가였다.
아들 니콜라스 Nicholas의 온화한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순수한 어린이의 평온한 순간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있다.
루벤스는 생애 대부분 군인다운 용기를 추앙했지만, 그의 후기 작품인 <전쟁의 공포>에서는 그 자신이 "이제껏 너무나 오랫동안 약탈당하고, 능욕당하고, 고난당해온 불행한 유럽의 슬픔"이라고 지칭한 내용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렘브란트 반 린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은 어떤 면에서 브뢰헬과 루벤스가 한데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는—그리고 네덜란드 화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안이한 성격 묘사를 단호히 거부했다.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국경 너머 독실한 칼뱅주의 Calvinism가 압도한 홀란드 Holland에 살았던 렘브란트는 브뢰헬의 무제한적인 국수주의나 루벤스의 풍성한 바로크적 과장을 용인하기에는 너무나 엄격한 사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사실주의적 경향과 바로크적 특징 모두를 새롭게 활용했다.
초기에 그는 성경의 주제들을 잘 그리는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의 그림은 바로크의 풍만한 육체를 결여하긴 했지만, 빛을 머금은 현란한 형태와 매혹적인 실험으로 바로크적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다.
초기의 렘브란트는 고객의 비위를 맞추는 그림을 그려—모델이 된 고객의 확고한 칼뱅주의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돈벌이를 할 줄 알았던 활동적인 초상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점차 시들해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가 아부하는데 진력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몇 차례의 투자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중·노년에 이르렀을 때 그의 개인적 비극은 절정에 달했고 그의 예술도 불가피하게 시름에 잠긴 우울한 것이 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위엄과 은은한 서정성, 두려운 신비감 등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그의 후기 초상화—자화상을 포함해서—는 자기 성찰적 특성이 두드러졌으며, 대상의 절반만 표현하고 나머지는 어렴풋이 암시만 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의 <호메로스의 흉상을 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with a Bust of Homer>와 같은 철학적인 회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이 작품에서 철학자는 마치 서사 시인이 발산하는 빛에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폴란드 기수>는 사실주의적 요소와 바로크적 요소를 높은 차원으로 종합하여, 우수에 잠긴 젊은이가 험난한 세상을 향해 힘차게 출발하는 모습을 그렸다.
렘브란트는 셰익스피어처럼 인생의 여정이 위험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완숙기 회화는 인간의 결점을 용기 있게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14장 결론
1540년에서 1660년 사이의 유럽은 전통적인 사회적·종교적·정치적 권위 구조에 대한 확신을 뒤흔드는 종교 전쟁, 정치 반란, 경제 위기에 한꺼번에 노출되어 고통을 받았다.
사람들은 공포와 회의주의에 빠졌고 유럽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질서를 재확립할 새롭고 좀 더 확고한 토대를 탐색했다.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그 시대는 유럽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평민에게 그 세기는 실로 고통스럽기 그지없던 시기였다.
전쟁 수단을 통해 종교적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파괴적 노력으로 100여 년을 지낸 뒤인 1660년에 이르러서야 유럽에서는 정치 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실질적인 종교적 관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가공할 세기가 끝났을 때도 국내에서의 관용은 아직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신민 사이의 종교적 분열마저도 극복할 정도로 쓸모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위기의 세기는 궁극적으로 신민의 상처를 치유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주체로서 국가가 갖는 권능에 대한 확신이 강화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그와 더불어 종교는 점점 더 개인의 양심이라고 하는 사적 영역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다음 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자율적인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국가—고유의 '국가 이성'과 독자적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국가—에 대한 새로운 확신은 중세에 등장했던 제한된 합의 정부 전통에 대한 강력한 도전임이 입증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1. 14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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