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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4: 종교적 회의와 확실성의 추구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4: 종교적 회의와 확실성의 추구
새샘 2025. 1. 7. 16:581540~1660년 많은 유럽인은 한때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의혹 속에 내던져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전적으로 세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수백만 인류의 존재는 유럽인에게 인간과 인간 본성에 관한 근본 개념을 부분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유럽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비록 완벽한 통일성은 아니었지만—이 종교개혁 및 그 때문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례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1540년까지만 해도 종교적 분열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1660년 이르면 종교적 분열이 영속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유럽인은 더 이상 계시 종교를 보편적인 철학적 결론을 도출하기에 적합한 기반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도 사이에서도 신앙의 근본 진리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무 또한 위협에 직면했다.
지식인과 평민들이 종교적 견해를 달리하는 군주에 대한 저항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덕과 관습마저 자연적 세계 질서와 동떨어진 임의적인 것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만연된 회의적 풍토에 직면한 유럽인은, 급진적 회의주의에서 무조건적 신앙과 정치적 절대주의의 주장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반응에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유럽에 밀어닥친 새로운 지적·종교적·정치적 도전 앞에서 확실성을 재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기초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색했다는 사실이다.
○마녀 사냥과 국가 권력
유럽인의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마녀魔女 witch가 인간 사회에 도덕적 위협을 가하고 있는 확신이었다.
물론 중세에도 대부분의 유럽인은 특정 개인—대개 여성—이 마술을 통해 병을 고치거나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반인이 아닌 권위 있는 지식인들이, 마녀가 악마와 모종을 계약을 맺음으로써만 그와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일단 이런 믿음이 받아들여지자 사법재판관들은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적발해 박해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 Innocentius PP. VIII(재위 1484~1492)는 교황청 종교재판관에게 (마녀 혐의자에 대한 고문을 포함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녀를 찾아내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고문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사실이라고 자백한 마녀의 수는 늘어났다.
고발당한 마녀가 자백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마녀가 '발견'되고 고발되고 처형되었다.
잉글랜드의 경우처럼 고문을 행하지 않고 종교재판소가 활동하지 않았던 지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근대 초기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 박해 열풍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로, 마녀 재판은 가톨릭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개혁가들은 가톨릭 Catholic과 마찬가지로 사탄 Satan의 교활한 힘을 믿었다.
루터 Luther와 칼뱅 Calvin은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더욱 엄격한 재판을 시행하고 일반 범죄자보다 중형을 선고하라고 촉구했고, 추종자들은 기꺼이 개혁가의 권고를 따랐다.
둘째로, 마녀에 대한 공포가 살인적인 수준으로 변한 것은 종교 당국이 세속 정부의 공권력을 등에 업고 마녀를 처형하려 했을 때였다.
1580~1660년에는 마녀를 잡아 죽이려는 열정이 전 유럽에 걸쳐 그야말로 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적어도 4분의 3은 여성이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1620년대 뷔르츠부르크 Würzburg와 밤베르크 Bamberg 같은 독일 도시에서는 1년에 평균 100건의 화형이 있었으며, 같은 무렵 볼펜뷔텔 Wolfenbüttel 시의 광장은 "화형대가 너무도 많이 세워져 있어 마치 작은 숲처럼 보였다"고 전해진다.
1660년 이후 마녀에 대한 고발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Massachusetts 세일럼 Salem의 마녀 재판(1692) 같은 사건이 그 후 반세기 동안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터졌다.
이렇듯 광적인 마녀 사냥 witch hunt(또는 witch purge)은 근대 초기 유럽인이 악마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악을 물리치기 위한 전통적 처방—기도, 부적, 성수聖水 등—의 효험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녀 사냥 광풍의 가장 놀라운 국면 중 하나는,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를 막론하고 영적·세속적 악의 공격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세속 당국이 기소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이다.
마녀 재판이 교회 법정에서 시작되었던 가톨릭 국가들(유럽에서 잉글랜드만이 교회 법정을 유지했다)에서는 수사, 기소, 처벌의 전 과정이 국가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 모두에서 이러한 마녀 재판은 신민의 삶을 규제하는 국가의 권력과 책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권위의 추구
권위를 찾아서(1572~1670년) | |
몽떼뉴의 ≪에세≫ 보댕의 ≪국가에 관한 6권의 책≫ 홉스의 ≪리바이어던≫ 파스칼의 ≪팡세≫ |
1572~1580년 1576년 1651년 1670년 |
'철鐵의 세기世紀 Iron Century'—동시대 사람들은 1540~1660년을 종종 이렇게 불렀다—에 밀어닥친 유럽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권위의 위기였다.
권위의 기초를 재확립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모습을 취했다.
프랑스 종교 전쟁의 절정기 동안에 저술활동을 했던 프랑스 사람 미셸 드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1533~1592)가 제시한 결론은, 확실한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엄격한 회의주의였다.
유복한 가톨릭인 아버지와 유대계이면서 위그노 Huguenot(16~17세기 프랑스 칼뱅파 신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몽테뉴는 38세에 여유로운 명상의 삶에 전념하기 위해 법률가직에서 물러났다.
그 결과물로서 탄생한 ≪에세 Essass≫는 원래는 '실험'으로 여겨지던 하나의 새로운 문학 형식이었다(프랑스어 essai는 '시도'라는 뜻).
몽테뉴의 ≪에세≫는 날카로운 성찰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잘 씌어졌기 때문에, 이후 프랑스 문학사 및 사상사에서 영원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에세≫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범위는 광범위하지만, 두 가지 주제가 핵심이다.
그 하나는 회의주의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 Que sais-je?'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단정했다.
그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진리와 오류를 측정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이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 중 하나인 <식인종에 관하여>에서 주장한 대로, 한 나라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 되고 완전해 보일 수 있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완전히 그릇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관습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야만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몽테뉴의 두 번째 주요 원리, 즉 관용의 필요성이 뒤따른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완전한 종교와 완전한 정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어떤 종교나 정부도 실제로는 완전하지 않으며, 따라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가치가 있는 믿음이란 없다고 결론지었다.
사람은 신앙에 관하여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를 다스리는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단 어떤 영역이든 광신주의에는 빠지지 말아야 한다.
몽테뉴가 근대적 인물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16세기 사람이었다.
그는 "이성理性이란 모든 부문에서 길을 잃고 만다"고 믿었으며,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에 코를 들이대게 만드는" 지적 호기심은 "영혼의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몽테뉴는 숙명론자였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의연하고 위엄 있게 선과 악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박하고 지극히 사사로운 논조에도 불구하고 몽테뉴의 ≪에세≫는 독자들에게 매우 널리 읽혔고, 앞으로 광신주의 및 종교적 불관용에 맞서는 싸움에 기여했다.
몽테뉴는 당대의 시련으로부터의 도피처를 회의주의, 거리 두기, 체념적 위엄에서 구했다.
한편 동시대인인 프랑스 법률가 장 보댕 Jean Bodin(1530~1596)은 국가 권력을 새롭고 더 안정된 기초 위에 재확립하는 것이 당시의 혼란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보댕도 몽테뉴처럼 프랑스 종교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했다.
그는 심지어 1572년 8월 24일 파리 Paris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Feast of St. Bartholomew의 학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학살 사태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혼란을 확실하게 종식시키기 위한 정치적 계획을 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기념비적 저작이자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절대주의 정부 주권에 관한 최초의 논저인 ≪국가에 관한 6권의 책 Les Six Livres de la République≫(1576)에서 그 작업을 해냈다.
보댕에 따르면, 국가란 가족들의 결합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일단 국가가 구성되면 질서 유지가 최고의 의무이기 때문에 어떤 반대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보댕에게 주권이란 "모든 신민 위에 군림하는 지고의 절대적인 영속 권력"으로서 "신민의 동의 없이도 법을 부과할 수 있는" 권력이었다.
보댕은 귀족정 또는 민주정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는 인정했지만, 국민 국가는 군주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군주는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즉, 입법부나 사법부 어느 쪽에 의해서도, 전임자나 군주 본인이 만든 법률에 의해서도— 제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댕은 모든 신민이 통치자의 '단순하고 명백한 선의'를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댕은 통치자가 폭군임이 입증되더라도 신민은 저항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모든 저항은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폭정보다 더 나쁜 방종한 무정부 상태"로 나아가는 길을 열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에 자극받아 정치적 절대주의 이론을 주장한 보댕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1588~1679)는 잉글랜드 내전이 야기한 혼란에 영향 받아 정치 이론의 고전으로 알려진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을 저술했다.
그러나 홉스는 여러 면에서 보댕과 달랐다.
보댕은 절대적 주권자가 왕이라는 것을 당연시했지만, 홉스는 그런 가정을 하지 않았다.
신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정부도 주권적인 (그러므로 전능한) 리바이어던(페니키아 Phoenicia 신화에 나오는 사나운 바다 괴물)으로서 행동할 수 있었다.
또 보댕이 국가를 '가족들로 구성된 합법적인 정부'로 정의하고, 가족은 재산 없이는 존속할 수 없기에 국가는 사유재산권을 축소할 수 없다고 믿은 것과는 달리, 홉스는 국가가 원자 같은 개인을 통치하기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정부 자체의 생존이 위협 받을 경우 자유와 재산권을 짓밟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보댕과 홉스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홉스의 철저한 비관론적 인간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홉스는 시민 정부가 등장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단정했다.
홉스가 보기에 인간은 천성적으로 다른 인간에 대해 '늑대'처럼 행동하는 존재였고, 정부 없는 인간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외롭고, 가난하고, 불쾌하고, 야비하고, 단명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결말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평화를 유지해주는 대가로 주권적 지배자에게 그들의 자유를 양도했다.
그들의 자유를 줘버렸기 때문에 신민은 그것을 다시 돌려받을 권리가 없다.
주권자는 임의로 폭정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주권자는 죽이는 것 말고는 모든 방법으로 신민을 마음대로 억압할 수 있었다.
신민을 살해하는 행위는 주권자의 지배 목적 그 자체—신민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17세기 문화에서 의심의 문제에 대해 가장 치열한 대응을 시도한 인물은 프랑스의 도덕 종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1623~1662)일 것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자 과학적 이성주의자로서 생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30세 되던 해에 종교적 회심 체험을 한 뒤 과학을 버리고 장세니즘 Jansenism—프랑스 가톨리시즘 내의 청교도적 분파—의 확고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때로부터 죽는 날까지 파스칼은 지성과 감성 모두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종교적 회의주의자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득하는 대단히 야심찬 종교적·철학적 계획을 추진했다.
불행히도 너무 빨리 찾아온 죽음 탓에 그의 모든 노력은 ≪팡세 Pensées≫—'생각'이란 뜻이며, 탁월한 문학적 역량으로 서술된 자유로운 형식의 종교적 단편 모음집—에 수록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신앙만이 구원의 길을 열어줄 수 있으며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이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스칼은 악과 영원 앞에 선 자신의 공포, 고뇌, 두려움을 이 책에 표현했지만, 그는 그 두려움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스칼은 이런 바탕 위에서 인간성 및 인간의 자기 인식 능력에 대한—17세기 유럽에 팽배한 교조주의와 극단적 회의주의를 모두 피할 수 었는— 낙관적 전망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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